41화
“여기에 서명하면 되는 건가.”
드디어!
“네. 맞아요!”
들뜬 나는 저릿한 발도 잊고 친절하게 여기, 여기 하며 사인할 부분을 짚어주었다.
“잘 생각하셨어요. 저보다 더 착하고, 예쁘고, 건강하고, 좋은 분을 만나실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에사디엔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
처음에는 만년필이라도 찾는 줄 알았다. 그러나 슬슬 주머니를 네 군데는 뒤졌겠다 싶어질 무렵까지도 움직임이 없자 내 인내심은 고갈됐다.
“뭐 하세요? 여기 사인하시라니까요?”
다그쳐도 움직이지 않기에 마침내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대체 뭐 하시……?”
정이 떨어졌는데도 여전히 경국지색인 에사디엔의 얼굴이 가까워진다 싶더니.
쪽.
믿을 수 없는 소리와 함께 이마에 뜨끈하고 말랑한 뭔가가 닿았다.
“이게 뭐, 무슨, 뭐 하는 짓이에요!”
내가 펄쩍 뛰다시피 물러나는데도 에사디엔은 눈가를 붉힌 채 연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는 이제 정말 이 사람이 미친 건지 진지하게 고민되기 시작했다.
“웃는 얼굴이 너무 오랜만이라……. 예뻐서 그만.”
내가 웃었나?
아니, 이게 아니라!
“이거 성희롱이에요.”
“그대도 내게 무단으로 입을 맞췄지.”
“아, 예전 일까지 끌고 나오시는 거예요?”
“미뉴엘, 내 말은.”
파혼장을 다시 가져가는 에사디엔의 목소리가 더없이 나긋했다.
전이었다면 좋아 죽었겠지만 그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고 있는 지금은 맨몸에 차가운 실크가 닿은 것처럼 소름이 돋았다.
“그대는 언제라도 내게 키스할 수 있는 단 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으윽. 피, 필요 없어!
나는 주춤주춤 더 물러섰지만 어느새 등은 아름드리나무에 부딪혔고 에사디엔은 여유롭게 다시 거리를 좁혔다.
“미뉴엘.”
나도 모르게 이마를 손으로 가리며 버럭 외쳤다.
“그런 권리는 거부하겠으니 당장 사인이나 하시죠!”
“미안하군.”
찌이익.
사과와 함께 파혼장이 반으로, 다시 또 반으로 찢어지더니 결국은 종이 눈처럼 조각조각 흩날렸다.
아까의 미소는 어디로 숨었는지 에사디엔은 평소의 무던한 얼굴로 돌아와 그 짓을 행하고 있었다.
“무, 무슨……. 그걸 왜 찢어요?”
“나는 이미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미뉴엘. 몇 번을 보내도 마찬가지다.”
에사디엔은 경악하는 내 얼굴을 낱낱이 관찰하고 있었다.
아니, 관찰하는 건지 잡아먹으려고 노리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눈이 이글거렸다.
“앞으로도 내가 거기에 서명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미뉴엘.”
에사디엔의 눈높이가 점차 낮아졌다. 마침내 한쪽 무릎을 꿇은 그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니 나를 버리지 말아다오.”
‘꿈인가?’
손등을 꼬집었더니 아팠다. 믿을 수 없어서 또 꼬집었지만 여전히 아팠다.
‘이, 이럴 리가 없는데.’
현실을 부정하며 계속 손등을 꼬집는 내게 나긋한 고백이 닿았다.
“사실은, 미뉴엘. 나는 질투했다.”
“지, 질투요?”
“라망드 사제를. 테오를. 그대와 함께 있는 것이 부러웠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못된 말을 내뱉었지.”
손등을 꼬집던 손은 어느새 멈춰 있었다. 이 얼얼한 통증은 거짓이 아니었다.
‘지금 이 상황이 꿈이 아니고 현실이라는 말인데. 그렇다면…….’
나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꽉 맞잡았다.
‘에사디엔이… 진짜로 미쳤나 봐.’
화를 냈다가, 웃었다가, 이상한 소리를 하고, 갑자기 파혼장을 찢더니 무릎을 꿇지를 않나!
정말 잘못 걸렸다는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미뉴엘.”
에사디엔이 다시 내게 손을 뻗었다.
나는 질겁하며 드레스 자락을 확 끌어당겼다.
“시, 싫어요!”
이 종잇장 같은 몸으로는 성인은커녕 어린애도 이기기 힘들다. 그런데 미친 사람, 그것도 에사디엔처럼 거대한 미친 사람을 내가 어떻게 감당해!
나는 그대로 줄행랑쳤다.
어떻게 집에 도착했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 상태로 맨 먼저 마주친 아버지에게 헐떡이며 소리쳤다.
“황자님이 미쳤어요!”
아, 내 체력은 여기까지였다.
눈앞이 까무룩 어두워지면서 놀란 아버지가 날 받아 드는 게 느껴졌다.
* * *
내가 쓰러진 후, 우리 집은 당연하고 나중에는 황성까지 발칵 뒤집혔다.
“삼황자님은 정상이시래.”
누워서 반강제로 요양 중인 내 머리를 쓸어주며 라망드가 소식을 전했다.
“의사들이며 여러 신전에서 사제들도 가서 확인한 모양이더라.”
“그게 정상이라고? 그게?”
믿을 수가 없었다.
정말로 모두가 그렇게 진단을 내렸다면 그건 분명 에사디엔이 너무 돌아버려서일 것이다.
그렇잖은가? 180도 돌리면 정반대가 되지만 360도 돌리면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처럼.
“하……. 라망드, 나 정말 여기서 못 살 것 같아.”
“왜. 실연의 후유증이 그렇게 커?”
“장난 칠 기분 아니야. 에사디엔이 내 눈앞에서 파혼장을 찢어버렸단 말이야.”
“찢었다고?”
드디어 라망드의 표정도 조금 심각해졌다. 나는 이때다 싶어 에사디엔의 만행을 풀어놓았다.
“말도 마. 아무리 보내도 파혼장에 서명할 일은 없을 거라고 선전 포고도 하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자기를 버리지 말라면서 무릎까지 꿇더라고.”
“…….”
라망드가 고개를 돌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누운 상태라 내 위치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입술을 달싹거리며 중얼거리는 건 욕설이 분명했다.
‘이마에 뽀뽀한 건 말하면 안 되겠다.’
들켰다가는 라망드가 정말로 황자궁에 쳐들어갈 것 같은 기세였다. 나는 조용히 눈 밑까지 이불을 끌어당겼다.
“미안해, 미뉴엘.”
그제야 조금 진정했는지 라망드가 내 뺨에 손을 올리며 사과했다. 닿은 피부를 통해 흘러드는 신성력은 어느 틈엔가 올랐던 체온을 시원하게 가라앉혔다.
“내가 같이 가야 했는데.”
“무슨 소리야? 훈련에 파견 나갔으면서. 알면서 가만히 있었던 것도 아니잖아.”
그렇게나 침착하더니 돌아 있을 줄이야. 그걸 대체 누가 알았겠느냐고. 나도 몰랐는데.
하지만 라망드는 심각하기만 했다.
“이제 파견 같은 거 안 나가. 네 옆에만 있을게.”
“안 그래도 돼. 황자님이 설마 매일 우리 집으로 찾아오고 내가 외출하는 걸 알아내서 쫓아오지는 않으시겠지.”
“몰랐구나? 파혼장 보낸 후로 매일매일 찾아오셨어.”
“뭐어?”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나려고 했지만 라망드가 검지로 톡 미는 힘에 다시 벌러덩 누워버렸다.
“어머님, 아버님께서 대문도 열지 말라고 엄명을 내리셨지만.”
“으으…….”
“그러니까 네가 외출할 때는 나라도 함께 가야지.”
라망드가 손가락으로 내 이마를 살살 문질렀다.
설마 알 리가 없겠지만, 에사디엔이 입을 맞췄던 부분에 라망드의 손가락 끝이 스칠 때면 괜히 심장이 벌렁거렸다.
“너, 너 그렇게 맨날 나랑 붙어 있으면 데이트는 어떻게 하려고 그래?”
“데이트? 갑자기 무슨 데이트?”
“좋아하는 사람 있잖아, 라망드.”
얼마 전, 첫사랑이 안 이루어지는 게 당연하다고 했다가 라망드가 발끈했던 게 아직도 생생했다.
마침 라망드도 그 기억에 닿은 게 분명했다.
“아. 그거?”
“맞지? 그러니까…….”
“누구인 거 같아?”
“어엉? 내가 아는 사람이야?”
나는 다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번에는 라망드도 막지 않고 어깨를 감싸며 도와줬다.
“글쎄? 그런데, 미뉴엘.”
“응?”
“만약 내가 그 사람하고 잘돼서 결혼이라도 하겠다면 어쩌려고 그래.”
“결…혼?”
“그래. 결혼.”
그 말은 즉, 사제직을 포기한다는 뜻이었다.
사제들은 플렌드나에게 평생을 바치는 대가로 몸에 지닌 신성력을 발현시킬 수 있다.
만약 사제의 길을 선택한 사람에게 운명의 상대가 생긴다고 해도 플렌드나는 사랑을 관장하는 신답게 너그럽게 놓아준다.
대신 신성력은 송두리째 사라진다고 들었다.
‘라망드는 고위 사제로 올라갈 수 있을 만큼 신성력의 그릇이 크다고 했는데.’
내 마음을 읽은 것처럼 라망드가 이마를 마주 대며 피식 웃었다.
“됐어. 신성력이 없는 내가 어떻게 네 옆에 있겠어.”
열에 시달렸던 수많은 밤을 기억한다.
그 많은 밤 동안 라망드는 수호천사처럼 항상 내 침대맡을 지켰다.
‘미안해, 라망드. 나 때문에 자지도 못하고…….’
‘저 같은 건 신경 쓰지 마시고 빨리 나으세요, 공녀님.’
가물가물한 눈으로 어렴풋한 빛에 휩싸인 그를 볼 때면 가끔은 정말로 플렌드나가 보낸 천사 같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고맙게도 라망드는 그때나 지금이나 싫은 내색 한번 없이 내게 묵묵히 신성력을 베풀었다.
그러니 신성력이 있든 없든 라망드는 이미 내 은인이자 소중한 사람이었다.
“괜찮아.”
“…뭐?”
“괜찮아, 라망드.”
어릴 때부터 사제로서 살아온 라망드다.
그런 그가 그 길을 벗어날 생각까지 했다니. 얼마나 그 사람에 대한 마음이 깊은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너한테 신성력이 없어도 우리 관계는 변하지 않을 테니까.”
물론 라망드의 그녀가 허락한다면 말이지만.
대체 누굴까? 알기만 하면 최선을 다해서 친해질 텐데!
“…절대로?”
나는 할 수 있는 한 나의 진심을 꾹꾹 눌러 담아, 또 그만큼 라망드와 맞잡은 손에 힘을 주며 확고하게 대답했다.
“당연하지!”
라망드의 입꼬리가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내가… 친구 하나는 정말 잘 뒀네.”
하지만 그 웃음은 어째서인지 조금 슬퍼 보였다.
* * *
“불의 교단에서는 정령의 힘을 노리는 것 같더구나.”
사도님이 드물게도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
화창한 주말 오후.
예배가 끝난 후, 나는 완연히 가을에 들어서 따뜻한 햇볕을 맞으며 사도님과 함께 신전을 거닐고 있었다.
“애초에 처음부터 정령의 힘을 어느 정도 손에 넣고 출발한 것 같다고 해.”
불을 내려면 마찰로 불똥을 만들든 다른 불을 옮겨붙이든 해야 한다.
그런데 교단에서 지르는 불은 말 그대로 그냥 허공에서 난데없이 나타나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렇다고 마법인가? 하면 마력도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다.
‘정말 내 추측이 맞았을 줄이야.’
“결국 정령석까지 차지하려 들겠군요?”
“더 큰 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 작은 힘으로 만족할 리는 없겠지.”
그리고 내 안에 있는 것도 부스러기라고 지나칠 리도 없겠고.
그렇다면 나는 정말로 로콰이트를 떠나야 했다.
대도시는 어딜 가나 그렇겠지만 수도는 엄청난 인구 밀집 지역이다. 여기에 대화재가 발생한다면 말 그대로 아비규환이 될 것이었다.
“더 심각한 것은 교단에 투신하는 사람들이 조금씩 늘어난다는 거란다.”
“왜 그러는 걸까요? 그들은 파괴만 일삼고 있잖아요.”
불과 얼마 전까지 자신이 살던 터전을 파괴한 집단에 투신하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