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많은 생각이 있겠지. 자포자기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 힘을 바라는 사람도, 혹은 불의 아름다움에 매혹된 사람도 있을 거야.”
“하지만… 교단이라고 해도 그들에게는 신이 없잖아요. 기적을 바랄 수가 없는데…….”
이 세계의 종교 시스템이란 말하자면 믿음과 혜택의 등가 교환이다.
인간은 신에게 믿음을 바치고, 신은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사도, 그리고 그 아래 사제들을 통해 은총을 베풀었다.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신의 존재란 얼마나 믿음직한가.
하지만 사도님은 조금 회의적이었다.
“글쎄다. 그 부분은 어떻게 될지 나도 모르겠구나.”
“무슨 말씀이세요?”
“인간의 믿음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가능하게 한단다.”
믿음…….
나는 문득 걸음을 멈췄다.
‘인간은 신에게 믿음을 바치고.’
그러나 불의 교단에는 믿음은 있지만 신이 없었다.
“새로운 신이 탄생할 수도 있다는 뜻인가요?”
“장담할 수는 없지만, 내 생각에는 그래.”
“플렌드나 님께서는…….”
“그분은 아무 말씀도 없으시단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믿음의 총량이란 게 있을 텐데, 새로운 신이 탄생하면 나머지 신들이 나눠 먹을 파이가 줄어드는 것 아닌가?
그렇게 말하자 사도님은 폭소를 터뜨렸다.
“미뉴엘, 어릴 때부터 그랬지만 넌 정말 특이한 애야.”
한참 웃고 나서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한다는 말씀이 그거였다.
“대체 누가 신의 사정을 걱정한다는 말이니? 인간 주제에.”
순간 사도님의 눈이 유리알처럼 반들거렸다.
그 눈빛은 내가 익히 알던 사도님의 것이 아니었다. 좀 더 무기질적이고 위협적인…….
‘플렌드나?’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간혹 사도의 몸을 신이 빌린다는 이야기는 들어봤지만 목격한 건 처음이었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고 자라서 신이 친근하네요. 떫니?’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그러나 괜히 아름다움의 신에게 덤볐다가 원형 탈모나 종기가 생기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자연스럽게 질문만 건넸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 제 안에 있는 힘을 어떻게 정령석에 돌려놓을 수 있을까요?”
“그건 정령의 마음에 달렸지.”
“네?”
정령에게도 생각이 있다는 뜻인가?
하지만 신이란 친절을 몰라서 나타날 때만큼이나 사라지는 것도 급작스러웠다.
대화는 여기에서 뚝 끊기고, 사도님은 잠시 고장 난 로봇처럼 눈을 깜빡거리더니 신기하다는 듯 웃으셨다.
‘아, 돌아오셨다.’
“너도 참. 놀라지도 않고 질문을 하는구나?”
“놀랐어요, 엄청!”
놀랐지만 생존 본능이 더 강했을 뿐이다.
“그래. 나도 놀랐단다. 플렌드나 님께서 직접 말을 건네시는 사람은 정말 드물거든.”
엄청난 체험이기는 한데, 나는 정확한 답을 듣지 못해 오히려 조금 시무룩해졌다.
“바보 같이 반문하지 말고 더 물어볼 걸 그랬어요.”
이를테면 ‘정령하고 대화가 통한다는 말씀이세요?’라고 묻는다든지.
“얘는. 그 상황에 납죽 엎드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생각해.”
사도님은 내 어깨를 두들기며 엄지를 척 내밀었다.
“다음 사도는 네가 될지도 모르겠는걸?”
사도님에게서 후임을 찾는 퇴사 희망자가 보인다면 내 눈이 잘못된 걸까.
나는 다소곳이 거절했다.
“저는 속세에서 살고 싶어요, 사도님.”
미남을 모아 눈요기하며 살고 싶습니다.
대충 끌어다놓은 핑계를 듣고 사도님은 또 한참 웃으셨다.
“그건 플렌드나 신전과 다를 게 없잖니?”
어라? 그것도 그렇네?
역시 신전으로 돌아가는 게 정답인가, 하고 갸웃거리는 내게 사도님이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에 왔으니 함께 차나 마셔주련?”
다른 신의 사도들도 이럴까. 신도라면 누구나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할 시간을 내어주면서도 그녀는 마치 내 시간을 빌리는 사람처럼 물었다.
“물론이죠.”
나라고 거절할 리가 없다. 존경심을 담아 사도님의 손을 잡으며 싱긋 웃었다.
“어머나.”
그 손을 놓지 않은 채 사이좋게 걸어 사도님의 개인 응접실에 다다른 참이었다.
사도님이 뭔가를 뒤늦게 떠올린 사람처럼 손뼉을 마주치며 걸음을 멈췄다.
“이런. 예배실에 찻장 열쇠를 두고 온 것 같구나.”
“제가 다녀올게요. 라망드도 아직 거기 있을 것 같은데.”
“아니야. 요 앞에 수련 사제들 휴게실이 있으니까 잠깐 부탁하고 올게.”
“쉬고 있는데 미안하잖아요. 그냥 제가…….”
“산책해서 이제 지칠 때가 됐잖니? 들어가서 쉬고 있으렴.”
그렇기는 했다. 나는 사도님의 배려를 감사히 받아들여 응접실로 들어섰다.
그런데 그 안에는 선객이 앉아 있었다.
“미뉴엘.”
나를 보고 천천히 일어선 그 사람은.
꿈엔들 잊으랴?
360도 돌아버린 에사디엔이었다.
“아악!”
약 2초간의 정적이 흐르고, 나는 엄청난 비명과 함께 당장 몸을 돌려 손잡이를 붙들었다.
하지만.
철컥.
문이 잠기는 것과 함께 사도님의 청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하하. 미뉴엘, 마음을 열고 한번 대화해 보렴.”
“사도님!!”
쾅쾅쾅쾅쾅!
문을 마구 두들겨봐도 손만 아플 뿐 돌아오는 건 점점 멀어지는 웃음소리뿐이었다.
“사도님, 사도님이 어떻게 저한테 이래요?!”
“저… 미뉴엘.”
“가, 가까이 오지 말아요!”
나도 모르게 빽 소리쳤다가 입을 가렸다. 큰 소리가 나면 더 자극받을지도 모르니까.
‘어쩐지. 매일 찾아온다더니 오늘은 문밖에 아무도 없다 했어.’
그런데 대체 오늘 내가 여기 온다는 사실을 에사디엔이 어떻게 안 걸까. 게다가 사도님의 도움까지 받다니…….
의심스럽게 바라보는 나를 달래듯 에사디엔이 천천히 말했다.
“미뉴엘, 나는 미치지 않았다.”
미친 사람은 절대로 자기가 미쳤다고 말하지 않지!
나는 입을 꾹 다문 채 문에 더 바짝 붙기만 했다.
잠시 그런 나를 바라보던 에사디엔은 옅은 한숨을 내쉬고 내 쪽으로 의자를 하나 밀어주었다.
“앉도록. 힘들 테니까.”
그러고는 뚜벅뚜벅 걸어 나와 멀찍이 떨어진 반대편 벽에 기대섰다.
“이 정도면 괜찮겠나? 이 자리를 벗어나지 않겠다. 약속하지.”
“…….”
“정말이다. 직접 증명이라도 하고 싶지만 방법을 모르겠군.”
에사디엔은 며칠 사이 부쩍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턱선이 평소보다 더 두드러지고 입술도 거칠게 일어나 있었다.
‘피폐한 모습도 어울리지만 역시 원래가 더 예쁘… 아니! 이게 아니라!’
나는 냅다 고개를 홰홰 휘저었다.
저 요망한 외모가 정말…….
아무튼 지난번보다 에사디엔의 상태가 조금 가라앉은 것 같아서 쭈뼛쭈뼛 자리에 앉았다.
‘체력을 보충해 둬야 도망도 칠 수 있는 거지. 암.’
내가 앉은 것만으로도 에사디엔은 안심한 듯 어깨에서 힘을 뺐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아무런 말도 없이 왼손을 검 손잡이에 올린 채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기만 했다.
‘아니, 왜 자세가……. 설마 날 죽이고 싶은 건가?’
미쳤다고 모욕을 줘서?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라페슈도 죽이려 했다고…….
‘다, 단번에 목을 치려고 앉힌 건가?’
설마 그건 아니겠지. 내가 서 있든 앉아 있든 앞구르기를 하든 에사디엔은 나를 단칼에 벨 수 있을 텐데.
그렇게 생각은 했지만 꿀꺽 침을 삼키며 조금 더 뒤로 물러앉았다.
“그, 그럼 왜 이런 식으로 등장하시는 건데요?”
“그것이…….”
에사디엔이 고개를 숙였다. 마치 내 눈치를 살피는 것처럼.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용건만 간단히 해주세요. 헤어진 마당에 솔직히 이렇게 둘만 만나는 거, 불편합니다.”
“헤어지다니. 나는 파혼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분명히 말했다, 미뉴엘.”
“저도 용서하지 않는다고 말씀드렸어요, 황자님.”
“…….”
침묵이 못내 의심스러웠다. 진짜 오락가락하는 거 아닌가?
“설마 기억 못 하…….”
“기억한다!”
“아, 예.”
기억하면 하는 거지 왜 소리를 지르고 난리람. 역시 제정신이 아닌……?
“정말 미치지 않았단 말이다.”
뜨끔했다.
‘눈치만 빨라서는.’
아니, 이런 눈치는 빠르면서 왜 내 마음은 몰랐대……?
하아. 생각하니까 또 열받으려고 한다. 아예 떠올리질 말아야지.
‘이너 피스, 이너 피스.’
몰래 라마즈 호흡법을 행하는 내게 에사디엔이 천천히 말했다.
“지난번에는… 미안했다. 그대가 내 정신 상태를 오해했다고 해도 할 말이 없다.”
“…….”
황족으로서 자존심도 있을 텐데 이렇게까지 말하다니.
나는 우물쭈물 시선을 들어 에사디엔과 눈을 마주했다. 지난번과 다르게 그의 눈은 잔잔했다. 내가 알던 잔잔한 바다와도 같은 눈.
그것을 보자 에사디엔의 주장이 맞는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저도 죄송합니다. 섣불리 판단한 모양이에요.”
솔직히 사과하자 에사디엔이 살짝 웃었다.
“이렇게 된 건 내 감정을 감추기에만 급급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드러내려고 노력했는데…….”
‘아아.’
이랬다가 저랬다가 했던 에사디엔의 상태를 떠올려보니 조금 납득이 됐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뭐랄까. TV 볼륨을 높였다가 음소거 버튼 누르기를 반복하는 것과 비슷했다.
“조절이 어렵더군.”
하지만 지금은 퍽 익숙해진 것 같아 보였다. 그의 입술에 매달린 쓴웃음이 증명했다.
“차라리 미쳤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그러면 그대와 보냈던 시간 속에서 살 수 있을 테니까.”
절절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내 표정은 차게 식어갔지만 점점 더 고개를 숙이는 에사디엔은 보지 못했다.
“그 정도로 그대를 보고 싶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플렌드나의 사도에게 부탁했다.”
이런 상황에 딱 알맞은 명곡이 있지.
‘있을 때 잘해. 후회하지 말고.’
“지난번에도 말씀드렸는데요.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고요.”
“그 말에 대해 많이 생각해 봤다.”
에사디엔이 고개를 들었다.
이쪽으로 다가오고 싶었는지 다리를 움찔했지만 약속을 상기하고 끝내 버티는 모습이 생각보다 안쓰러웠다.
“미뉴엘, 우리는 오해로 엇갈린 것이 아닌가? 그것을 풀고, 또 내가 부족한 것을 알았으니 앞으로 고쳐나가겠다고 하면.”
목이 타는지 그가 침을 꿀꺽 삼켰다.
“내가 너무 이기적인 것인가?”
“아니에요.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죠.”
“그러면…….”
에사디엔의 눈이 희망으로 반짝 빛났다.
이 사람이 이렇게 알기 쉬웠던가, 생각하며 이번에는 내가 쓰게 웃었다.
“뭘 기대하시는지는 알겠지만, 부응할 순 없겠어요.”
나는 뒤에 두고 온 것은 돌아보는 성미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제 황자님을 보면서 제가 설레지 않아요.”
재에는 불이 붙지 않는 법이고, 나는 그에 대한 마음을 다 태운 뒤였다.
“…….”
“그러니 이만 파혼장에 서명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이런 자리도 더 없었으면 하고요.”
내가 자리를 마무리하려는 것을 알아차린 에사디엔이 다급히 나를 불렀다.
“미뉴엘.”
“하아. 황자님, 이러셔도 달라질 것은…….”
“아니, 잠시만.”
“네?”
에사디엔의 표정이 일순간 변했다.
그 표정 그대로 그가 입술 앞에 손가락을 세웠다. 무슨 소리를 들으려는 듯해 나도 덩달아 숨죽이며 귀를 기울였을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