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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 영애 집착을 시작합니다 (43)화 (43/130)

43화

우릉…….

“…들으셨어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인 후 잠시 눈동자를 아래쪽으로 굴리던 그는 무언가 결심한 듯 이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사이에도 다시 한번 우르릉 소리가 났다. 장식장에 끼운 유리가 달각거리며 흔들릴 정도의 진동마저 느껴졌다.

‘지, 지진인가?’

하지만 로콰이트에서, 아니 프레세리아 제국에서 지진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는 미뉴엘이 된 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약속을 못 지켜서 미안하지만, 일단 나가지.”

눈 깜빡할 사이 에사디엔은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상황이 심상치 않으니 다가온다고 뭐라 하기도 어려웠다. 게다가 여기는 3층. 만약 건물이 무너지기라도 하면.

‘에사디엔은 오로지 나 때문에 여기에 온 거야.’

내 목숨도 목숨이지만 자칫 에사디엔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그를 아끼는 황제의 슬픔이 카르이넨에 폭탄이 되어 떨어질지도 몰랐다.

나는 입술을 한 차례 깨무는 것으로 망설임을 털어버리고 에사디엔의 손을 잡아채 뛰기 시작했다.

“빨리 가요.”

순순히 협조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던지 에사디엔이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지만 못 들은 척했다.

어느 틈엔가 문은 열려 있었다.

빨리 뛰어나가기만 하면 될 줄 알았는데 그게 생각보다 그리 만만치가 않았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중앙 계단까지는 아직 멀었는데도 명불허전 종잇장 몸은 벌써 숨이 찼다.

오늘따라 내켜서 신은 높은 구두도 발바닥을 마구 공격하고 있었다.

“자, 잠시만요.”

기왕 손을 잡은 김에 에사디엔의 힘에 의지해 높은 구두를 벗어 들었다. 그런데 어쩐지 그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미뉴엘, 내게 안기는 것이 낫지 않겠나.”

“뭐라고요?”

“아, 그러니까……. 그, 내가 그대를 안아 드는 것이 빠르지 않을까.”

“…….”

이성은 에사디엔의 말이 맞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흔쾌히 따르지 않은 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얼굴이 점점 빨개지는 그 때문이었다.

차분하게 설득한 게 조금 전인데 이렇게 티가 날 정도로 미련을 흘리고 말이야.

“발이 다칠 수도 있지 않은가.”

궁색한 변명까지.

참고로 신전 내 복도에는 폭신한 카펫이 쭉 깔려 있다.

“됐습니다. 실내인데 발을 다치기는 무슨…….”

결국 거절하며 다시 걸음을 뗐을 때였다.

우르릉!

잠시 잠잠하다 싶더니 훨씬 더 커진 소리와 함께 벽에 금이 쫙 갔다. 천장에서 돌 부스러기가 후두두 떨어진 건 덤이었다.

“으아!”

나는 짧은 비명과 함께 에사디엔의 목을 답삭 끌어안았다. 미련이고 나발이고 일단 살고 보자!

“괜찮을 거다, 미뉴엘. 진정해라.”

그런데 그는 어정쩡하게 나를 목에 매단 채로 다독이는 게 아닌가. 후다닥 뛰어나가지는 못할망정!

나도 양심이 있지. 몇 초 만에 손바닥 뒤집듯 말을 바꾸는 게 아무렇지 않을 리 없다. 결국 민망함을 이기지 못하고 에사디엔의 어깨를 찰싹 때려버렸다.

“아, 위로하지 말고 빨리 들어줘요!”

“기꺼이.”

웃음 섞인 대답과 함께 손이 무릎 아래로 들어왔다. 몸이 번쩍 들리는 걸 느끼며 나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왜, 왜 맞으면서 좋아하는 거야.’

하여간 이상한 사람이라니까.

‘그나저나 인기척이 없어도 너무 없어.’

아무리 3층의 절반은 사도님의 개인 공간이라지만 일하는 사람조차 없을 리는 없다.

게다가 조금 전의 진동은 누구라도 느낄 법한 것이었는데 복도 반대편에서 뛰어나오는 사람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두근두근.

주변이 조용해서 그런지 에사디엔의 심장 박동 소리가 귓가를 가득 채웠다.

‘사, 사람이니까 심장이 뛰는 게 당연하지. 안 뛰면 죽어!’

의식하지 말자. 의식하지 말자.

두쿵두쿵!

“…….”

의식하지 않으려 할수록 더 크게 들리는 것 같은 건… 내 착각인가?

그때 에사디엔이 곤란한 듯 말했다.

“미뉴엘, 자꾸 몸을 떼면 떨어질지도 모른다.”

“네?”

그 말에 눈을 떠보니 의식하지 못한 사이 점점 그에게서 고개를 떨어뜨리는 중이었다.

“죄, 죄송해요…….”

얹혀가는 주제에 이게 무슨 추태람.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사과하자 에사디엔은 살포시 웃으며 나를 안은 팔에 힘을 더했다.

“괜찮다.”

“왜…….”

“음?”

“아, 아니에요.”

나도 모르게 오늘따라 왜 그렇게 자주 웃느냐고 물을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질문은 관심의 표현이다. 에사디엔을 밀어내는 상황인데 애매한 관심을 드러내면 그가 파혼장에 사인해 주지 않을 것이 당연했다.

두근.

온몸으로 느껴지는 온기와 심장 박동에 입술을 짓씹던 내 눈에 드디어 사람의 모습이 들어왔다.

“황자님, 저쪽에 사람이 쓰러져 있어요.”

“그렇군……. 반대편에도 몇 명 보인다.”

인기척이 없었던 이유는 2층에 다다르자 알게 되었다. 여기저기 사제들이 정신을 잃은 채 널브러져 있었다.

“살아 있다. 맥이 정상인 걸 보니 그냥 잠든 모양이야.”

“이 사람도요.”

코 아래에 손가락을 대보자 평온한 숨결이 느껴졌다. 마법 저항이 높은 사제들이 무방비로 쓰러진 모습을 보자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우르릉.

그 와중에도 건물을 울리는 소리는 간간이 이어지는 중이었다.

나는 호출기를 만지작거리며 고민에 빠졌다.

‘우리 기사들을 불러야 하나?’

평소라면 당장 눌렀겠지만…….

‘혹시라도 기사들이 진입했을 때 건물이 무너지기라도 한다면?’

그들은 기사지 구조 대원이 아닌데 나 때문에 희생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사제들을 외면할 수도 없었다.

비록 이 사람들은 나와 유년 시절을 함께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플렌드나의 사제다. 신전 생활을 오래 한 나로서는 뭐랄까. 육촌쯤 되는 친척같이 느껴져서.

“미뉴엘.”

눈에 띄는 사람들을 한곳에 모은 에사디엔이 잔뜩 울상을 지은 나를 보고 움찔했다.

“왜, 왜 그러지.”

“에사디엔, 어떡해요? 이들을 두고 갈 수가…….”

에사디엔을 보자 더 울컥했다.

‘에사디엔도, 아니 이 사람이야말로 빨리 내보내야 하는데.’

하지만 내 힘으로는 한 사람도 옮기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무력한 자신이 뼈저리게 혐오스럽다.

바닥에 퍼진 치맛자락을 움켜쥐며 그렇게 생각했을 때, 문득 다가온 온기가 내 얼굴을 감싸며 들어 올렸다.

“미뉴엘, 괜찮으니 진정해라.”

내 앞에 무릎 꿇은 에사디엔이 침착하게 시선을 맞췄다.

“그대의 귀걸이는 지난번처럼 포션이겠지. 그것으로 두어 명만 깨우면 다들 사제이니 알아서 할 것이다.”

“아……!”

눈이 번쩍 뜨였다.

“맞아요.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라망드의 신성력이 담겼으니 상태 이상 무효화 옵션이 달린 게 당연했다. 피 토할 때만 마시다 보니 그 사실을 잊고 있었다.

발딱 일어서는 나를 에사디엔의 손이 단단하게 잡아주었다.

갑자기 믿음직함이 급상승한 에사디엔을 보며 솔직히 인정했다. 지금 내 곁에 그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고마워요.”

인정한 것 치고는 조금 우물쭈물해 버렸지만 에사디엔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 눈을 휘었다.

‘윽.’

그 모습을 정면에서 본 순간 가슴 밑바닥이 묵직하게 내려앉는 것 같았다.

“이, 이거 받아요.”

이 얼굴을 계속 보면 열 번이 아니라 한 번만 더 찍어도 넘어가겠다!

본능이 외치는 소리에 따라 다급히 에사디엔에게 포션 병을 하나 쥐여주고 홱 돌아섰다.

“어우, 눈부셔.”

대체 왜 자꾸 웃어대는 거야?

사실 ‘자꾸’라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다. 사람들이 보통 무의식적으로 짓곤 하는 웃음보다 훨씬 빈도가 적었으니까.

그래도 약혼자였던 시절보다는 확실히 잦아서 볼 때마다 숨을 헉하고 들이켜게 되었다.

‘헉은 무슨 헉? 그냥 조각상이라고 생각하면 되잖아! 알겠어, 미뉴엘 카르이넨?’

그게 마음대로 되냐.

‘미뉴엘 씨, 대답.’

으아아아! 알았다고!

나 자신을 꾸짖던… 아니, 나 자신에게 꾸짖음 당하던 참이었다. 방금 포션을 입 안에 흘려준 사제가 콜록, 기침하며 눈을 떴다.

“으… 당신은?”

“정신이 들어요? 나는 미뉴엘 카르이넨입니다. 위험하니까 다들 깨워서 데리고 나가요.”

때맞춰 건물도 다시 한번 우릉, 하고 울었다.

“아, 알겠습니다.”

사제를 부축해 일어난 후 돌아보자 마침 에사디엔도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여기는 이분들에게 맡기고 내려가요. 아래층도 조용한 걸 보니 비슷한 상황일 것 같아요.”

“같은 생각이다.”

기사인 에사디엔도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다면 거의 확실하다. 나는 그가 손을 내밀기 전에 먼저 치맛자락을 휘어잡고 계단을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미뉴엘, 위험……!”

위험은 무슨. 계단도 제대로 못 내려가면 엘리베이터 없는 이 세상에서 지금껏 어떻게 살았겠어?

…라고 생각한 순간.

여러 겹으로 이루어진 스커트 부분의 천 한 장이 어느 틈엔가 손아귀에서 흘러내리며 콱 밟혔다.

“앗!”

그 탓에 당연히 몸은 앞으로 확 쏠렸고, 나는 눈을 꽉 지르감았다. 엉망진창으로 계단을 구를 것이 확실했다.

‘이놈의 몸뚱이, 이젠 계단 내려가는 것도 무리냐……!’

하지만 이어진 충격은 각오했던 머리나 어깨가 아니라 배에서 느껴졌다.

“쿠헉!”

“미안하다. 급해서…….”

말끝을 흐리는 목소리는 분명 에사디엔의 것이었다. 도대체 무슨 수를 썼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넘어지려는 나를 따라잡아 낚아챈 것이다.

‘와, 진짜 왕자님 같은 행동만 하네.’

빛나는 미모를 보자 살았다는 생각보다 그런 감상이 먼저 들었다.

“흐, 케흑, 쿨럭.”

급하게 들이켰던 숨이 기침과 함께 흘러나왔다. 그러자 에사디엔은 득달같이 물음을 쏟아냈다.

“괜찮은가? 포션을 마시겠나? 발목이 시큰거리지는 않는가?”

“멀쩡해요. 호들갑은…….”

어찌나 극성스러운지 내 얼굴이 다 홧홧했다. 본 사람이 없다는 게 다행이었다.

“아, 아무튼 고마워요. 신세만 지는 것 같네요.”

“그런 말 하지 않아도 된다, 미뉴엘.”

에사디엔은 괜히 가슴이 다 간질거릴 정도로 사근사근하게 말하며 나를 다시 번쩍 안아 들었다.

“걸을 수 있어요!”

“알지만, 불안해서.”

“…….”

바로 눈앞에서 몸개그를 했으니 아니라고도 할 수 없었다.

‘이건 조각상! 사람 아니고 조각상!’

최대한 자기 최면을 거는 수밖에.

그러나 의식하지 않으려고 할수록 더 에사디엔의 존재감이 크게 느껴졌다. 고작 이 층에서 일 층으로 내려가는 길이 산길을 걷는 것만큼이나 길게 느껴질 정도로.

그렇게 편안한 몸과 불편한 마음으로 도착한 일 층에는 사제들뿐만 아니라 성기사들도 섞여 있었고, 덕분에 다 깨어나는 걸 기다리지 않고도 수월하게 밖으로 대피시킬 수 있었다.

“거의 다 나온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밖에서는 진동이 느껴지지 않았다. 두리번거리는 내 어깨를 에사디엔이 조심스럽게 잡았다.

“미뉴엘, 이제 사제들에게 맡기고 돌아가는 게 좋겠군.”

“아, 네. 오늘 감사했습니다.”

“혹시 모르니 내가 바래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러면 이만 물러가 볼게요.”

에사디엔의 어깨가 눈에 띄게 처졌지만 나는 허리를 깊숙이 숙여 보이고 얼른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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