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붙어 있으면 붙어 있을수록 서로에게 좋지 않았다.
사람이 양심이 있지. 계속 도움을 받으면서도 차갑게 대하기는 힘들었으니까. 그리고 내가 그럴수록 에사디엔은 친밀감을 느낄 터였다.
게다가.
‘사도님이 안 보여.’
사도님은 나서서 사제들을 지휘하면 지휘했지, 절대로 혼자 도망갈 분이 아니었다.
슬슬 사제들도 사도님의 부재를 깨닫고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몇몇의 지휘로 아직 일어나지 못한 사람들을 깨우고 건물의 상태를 확인하는 와중이었다.
“흑흑.”
갓 귀의했는지 수련 사제복을 입은 어린아이가 구석에서 몸을 수그린 채 훌쩍거리고 있었다.
“저기, 괜찮아? 어디 아픈 데라도 있니?”
라망드를 처음 만났을 때가 딱 이만할 나이여서 나는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다가가 말을 걸었다.
그뿐이었는데, 흘러나오는 답이 놀라웠다.
“사, 사도님이…….”
“사도님? 사도님을 봤어?”
“저쪽으로, 가셨, 흑, 어요.”
아이는 중간중간 울음을 삼키며 정원 쪽을 가리켰다.
하지만 정원 너머에는 다른 건물이 없다.
“그럴 리가…….”
“분홍 머리 누나를 데려오라고, 누나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셨어요.”
“나를?”
그러자 아이가 혼자 울고 있었던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날 못 찾아서 당황스러웠겠구나.’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알아?”
“네.”
아이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나는 순순히 그 작은 힘에 이끌려 걸음을 내디뎠다.
‘사도님은 플렌드나 님의 총애를 받는 분이야. 그러니 심각하게 위험하진 않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이유 모를 불안감이 배 속에서 꿈틀거리는 것만 같았다.
불안함은 정원 가운데에 위치한 가제보 바닥이 뻥 뚫린 모습을 보며 극에 달했다.
“여기예요.”
‘아니, 여기에 이런 게 있었다고? 지하 통로 입구가?’
이쪽으로 오는 사람이 없는 걸 보면 사제들도 모르는 듯한데…….
“저기, 사도님이 이쪽으로 가신 게 맞……?”
돌아보며 질문하려던 나는 허리춤에서 느껴지는 뾰족한 물건에 그만 혀를 깨물어버렸다.
“조용히 하시고 내려가세요.”
“…….”
“어서요. 공녀님만 데려가면 사도님은 괜찮아지실 거라고요.”
언제 훌쩍거리며 코를 먹었냐는 듯 싸늘한 말투였다. 보이지는 않지만 아마 표정도 그렇겠지.
‘그러고 보니 이 아이, 계속 얼굴을 가리고 있었어.’
이제야 깨달았다. 처음부터 우는 시늉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입술을 깨무는 내 허리를 뾰족한 것이 다시 한번 쿡 찍었다. 천을 뚫은 날붙이의 감각은 어떤 협박보다 확실한 재촉이었다.
‘에사디엔을 보내고 난 다음이라 다행이다.’
함께 있었다면 또다시 그를 위험에 빠뜨릴 뻔했으니까.
‘걱정하는 건 아냐. 여기서 더 빚을 지기 싫을 뿐이야.’
그렇게 생각하며 지하도로 내려가자마자 라망드의 것과 닮은 청량한 신성력이 물씬 느껴졌다. 최소한 지하 어딘가에 사도님이 계시기는 한 모양이었다.
“빨리 걸어.”
아예 반말로 뒤바뀐 명령과 함께 또 허리가 쿡 찔렸다. 반복될 때마다 조금씩 더 깊게 들어오는 칼끝 때문에 피가 주룩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아프잖아. 멀쩡히 데려오라는 말은 안 하든?”
“닥치고 걸으세요. 댁의 숨만 붙어 있으면 되니까.”
장난이 아니었다. 한 번 더 쑤셔 박으려는 기색이 역력해 얼른 발을 놀리자 바람이 빠지는 듯한 비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당연한 말이지만 지하도는 카펫 따위 깔려 있지 않은 돌바닥이다.
잔돌을 밟아 발바닥이 따끔거렸지만 걸음이 느려질 때마다 같은 자리를 후비는 고통에 이를 악물고 버텨야 했다.
마치 채찍질 당하는 짐승처럼.
상대도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조랑말 길들이는 것 같네. 하기야, 찔리면 피 흘리고 아파하는 건 귀족이나 짐승이나 다를… 윽.”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뚝 끊기며 챙그랑, 하고 날붙이 떨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설마.’
순간적으로 익숙한 얼굴이 떠올랐지만 애써 지웠다.
‘에사디엔은 돌아갔잖아.’
하지만 천천히 돌아선 내 눈에 들어온 것은 가슴이 꿰뚫린 아이와 그 뒤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는 에사디엔이었다.
“에사디엔!”
그 모습에 카듀렌에서의 일이 겹쳐 보이며 다리에서 힘이 쭉 풀렸다.
“당신이 왜 여기 있는 거예요……?”
“왜냐니. 그러면 그대 혼자 수상쩍은 곳에 들어가는데 보고만 있으라는 뜻인가?”
털썩 주저앉은 내게 다가온 에사디엔은 명백히 화난 상태였다.
“실례하지.”
그러면서도 그의 온몸에서는 걱정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더불어 찢긴 옷 틈으로 들어와 조심스럽게 상처에 포션을 바르는 손길이 느껴져 얼굴이 폭발할 것처럼 뜨거워졌다. 더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자 순식간에 분위기는 어색함의 끝으로 치달았다.
“…….”
“…….”
적막을 깨트린 건 우두둑, 우두둑, 하는 뼈와 관절이 비틀리는 듯한 소리였다. 아이의 시신이 눈 깜짝할 새 성인의 몸으로 탈바꿈하는 광경에 나는 입을 가렸다.
“세상에. 내가 지금 뭘 본 거야?”
“암살자들이 쓰는 변용술(골격을 바꾸는 기술)이다.”
순간 ‘잘 아시네요.’라고 할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아냈다. 하마터면 어릴 때부터 암살자들한테 시달리셔서 잘 아시네요, 하는 뉘앙스가 될 뻔했다.
‘으휴, 이 주책.’
반면 내가 안절부절못하는 걸 알 턱 없는 에사디엔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미뉴엘, 발을 보여다오.”
“네?”
“바닥이 이런데 신발도 신지 못했잖은가.”
“그…….”
조선 시대만큼이나 여기도 발을 드러내는 것은 금기시되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스타킹이 엉망으로 더러울 텐데.
‘아니, 아니지. 에사디엔 앞에서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잖아.’
이제 좋아하는 사람도 아니고 그냥 예쁜 조각상인데.
마음을 다잡고 양쪽 발을 치맛자락 아래로 빼꼼히 내밀었다.
“여기요. 얼른 부어주세요.”
“…….”
“왜요? 스타킹도 벗을까요?”
“아, 아니다. 그저 참… 작구나 싶어서.”
흥. 발 커서 좋으시겠수.
포션에 젖은 발이 따끔거렸다. 발가락이 오므라드는 걸 보고 에사디엔이 또 웃었다.
“오늘 도움을 참 많이 받네요. 정말 감사한데, 이만 돌아가세요.”
부루퉁하게 말하자 에사디엔의 미간이 조금 좁아졌다.
“사도를 구해야 하지 않나?”
“황자님께 더 폐를 끼칠 수는 없어요.”
“안쪽에서 상당한 수의 기척이 느껴진다. 그대에게는 내가 필요해. 이건 기사로서 하는 말이다.”
“제 기사들을 부르면 돼요.”
“그때까지 사도가 버틸 수 있을 것 같지 않군.”
“…….”
아무렴 나보다야 에사디엔이 기척을 읽는 데 뛰어날 것이다. 더 반박하지 못하는 내게 그는 마지막으로 못을 박아버렸다.
“황자도 폐하를 모시는 사람 중 한 명이다. 로콰이트 내에서 사도가 당하는 것을 좌시할 수만은 없다, 미뉴엘.”
이 사람이 이렇게 말을 잘했던가?
“알겠어요. 대신 다치시면 안 돼요.”
“걱정해 줘서 고맙군.”
에사디엔의 손이 내 볼을 간지럽히듯 쓸었다. 나는 그것을 매몰차게 걷어내며 덧붙였다.
“황제 폐하의 노여움이 카르이넨으로 향하는 걸 원치 않기 때문이에요. 오해하지 마세요.”
“그래.”
그런데도 에사디엔은 기분 나쁜 기색 없이 웃는 것이 아닌가. 더 놀라운 일은 그다음에 일어났다.
“그대의 말대로 다치지 않고 싸울 수 있게 힘을 주겠나.”
“힘이요?”
뭘 어떻게 하라는 건지.
얼결에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에사디엔은 나를 거의 으스러트릴 것처럼 세게 껴안았다.
“흐억!”
종잇장 몸 구겨져요!
그러고는 그것으로도 모자랐는지 쪽 소리가 날 정도로 입술을 부딪치고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도대체.’
힘을 주는 게 아니고 어이를 뺏긴 것 같았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멍하니 눈만 끔뻑이다가 곧 사납게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야, 이 양아……!”
“미뉴엘.”
욕 끊는 타이밍 보소?
“장갑, 싫어하는데도 억지로 벗기려 해서 미안했다. 그런 상처가 있는 줄은 몰랐다.”
“…….”
몰랐던 에사디엔의 일면을 또 발견했다. 그는 기습의 달인이었다.
“여기서 절대로 움직이지 마라.”
마지막으로 당부를 남기고, 에사디엔은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기습이다!”
“젠장, 사도를 더 압박해!”
잠시 후, 그와 마주한 적들이 내지르는 소리를 어렴풋하게 들으며 나는 양손을 꽉 마주 잡았다. 목구멍 아래에 뭉쳐 있던 뭔가가 조금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손… 역시 봤구나.’
에사디엔이 내 손을 흘깃거리거나 혐오스럽게 여기는 표정도 짓지 않아서 얼마 동안은 성인식 날 내 손을 보지 못했던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에사디엔은 내 손을 봤고, 징그러워하기는커녕 진심으로 사과를 건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고백할걸.’
지레 겁을 먹고 숨겼던 것 하나만큼은 조금 후회가 되었다.
콰아아앙!
그때, 물렁해진 마음마저 부술 듯한 굉음이 들렸다. 퍼뜩 정신이 든 나는 어느새 주저앉아 있던 몸을 일으켜 소리가 들린 곳으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에사디엔은 멀찍이서 가만히 있으라고 했지만 도저히 걱정이 되고 좀이 쑤셔서 그럴 수가 없었다.
‘다 우리 집안을 위해서야. 예쁜 조각상 황자 말고. 암, 그렇고말고.’
그렇게 속으로 되뇌며 몸을 숨긴 채 조심조심 눈을 내밀어 격전의 현장을 훔쳐보았다.
“관절염!”
사도님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진 건 처음이었다.
날카롭게 눈을 치뜬 사도님이 외치며 손을 뻗자 가리킨 곳에 있던 자들이 중력을 버티지 못하는 것처럼 동시에 무릎을 꿇었다.
“으악!”
‘관절염?’
설마. 잘못 들었겠지.
한편 사도님의 다른 쪽 손에서는 신성력이 흘러나와 희뿌연 막으로 변하며 불로 이루어진 고리에 달라붙어 있었다.
반투명하게 가려졌는데도 이런 지하에 들이칠 리 없는 햇빛이 투과하는 것으로 보아 그냥 고리가 아니라 통로 역할을 하는 듯했다.
‘저것을 통해서 침입했구나.’
지하도가 꺾이는 방향으로 보아서 이쯤이 딱 신전의 아래쪽이었다. 여기저기 찢긴 채 널려 있는 스크롤을 보니 마법으로 신전 사람들을 재웠구나 싶었다.
‘3층까지는 힘이 미처 닿지 않은 건가?’
사도님의 응접실이 3층에 있었던 것이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다.
한편 에사디엔은 혼자서 만렙 찍은 게임 캐릭터처럼 활약 중이었다. 그가 검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사람이 몇 명씩, 무슨 수수깡처럼 우수수 쓰러졌다.
“나머지를 부탁합니다!”
“알겠습니다.”
에사디엔이 적을 반수 이상 처리하자 사도님은 완전히 불의 통로를 닫는 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에사디엔이 있어서 다행…….’
아니,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흠흠.
정신을 차리려고 고개를 휘휘 내젓는 짧은 사이에 에사디엔은 남은 자들을 대부분 쓰러뜨리고 불의 힘을 쓰는 자들과 맞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