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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 영애 집착을 시작합니다 (45)화 (45/130)

45화

예측할 수 없이 쏟아지는 불덩어리를 피하며 틈을 노리는 그의 얼굴에서 땀이 떨어졌다.

‘불의 교단이었구나.’

속에서 울화가 꿈틀거리는 걸 보면 마법이 아니라 불의 힘이 확실했다. 그리고 불의 교단이라면 나를 데려오라고 했다던 것이 이해가 된다.

‘또 앞에 나서서 탱커처럼 맞아줘야 하는 건가?’

망설이는 사이 쓰러져 있던 자들 틈에서 좀비처럼 천천히 일어서는 놈이 있었다. 그의 손에서 단검이 번뜩였다.

그를 엄호하듯 불덩어리들이 에사디엔의 시야를 어지럽히며 잔뜩 쏟아졌다.

때를 놓치지 않고 좀비 같은 놈도 에사디엔의 뒤를 노리는 것을 보며 나는 두 번 생각할 겨를도 없이 뛰어들었다.

‘어딜 감히!’

콰악!

손에 쥔 구두 굽이 제대로 놈의 뒤통수에 박히더니 뚝 부러졌다.

‘치, 치명타?’

종잇장 몸도 딜이 잘 나올 때가 있구나!

“윽!”

좀비 같은 놈은 단말마를 마지막으로 영원히 쓰러졌다. 괜히 신었다 했는데 마지막에 제 역할을 다해 준 구두야, R.I.P…….

“미뉴엘.”

한 번에 공격을 쏟아부은 탓에 쿨 타임이 다 안 찬 불의 교도들을 그 틈에 처리한 에사디엔이 다가왔다.

가만히 숨어 있으랬는데 움직여서 또 화를 낼 줄 알았건만, 그의 입에서 나온 건 솔직한 감사였다.

“고맙다. 덕분에 살았다.”

“뭐……. 신세를 갚았을 뿐이에요.”

비록 그는 나를 몇 번이나 도와줬지만.

흠흠, 머쓱하게 헛기침하는 나와 묵묵히 바라보는 에사디엔 사이로 사도님이 흘리는 웃음소리가 끼어들었다.

“후후후. 사이가 좋아졌나 보구나. 역시 함께 있어야 해결되는 법이야.”

에사디엔과 나는 동시에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좋아지기는요. 뭐, 딱히 좋아질 게 있나요?”

“…….”

에사디엔의 눈꼬리가 대번에 아래로 처졌다. 나는 고개를 홱 돌리며 웅얼거렸다.

“그, 그렇게 보지 마세요.”

쯧쯧. 작게 혀를 찬 사도님이 에사디엔을 위로했다.

“갈 길이 멀군요, 황자님. 저리 보여도 카르이넨 가문 사람이라 고집이 아주 대단하답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노력할 생각입니다.”

노오력은 무슨!

“사도님, 대체 누구 편이신 거예요!”

“호호호, 글쎄다. 재미있는 편?”

어휴. 여기서 말려들면 썰렁한 아재 개그를 한참 들어야 한다는 걸 아는 나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관절염이라고 외치셨던 건 뭐예요? 전 제가 잘못 들은 줄 알았어요.”

“관절의 꽃말은 건강이지.”

“네?”

“신체는 건강한 상태일 때가 가장 아름다운 거란다, 미뉴엘.”

그러니까 사도님의 말씀은, 관절을 아름답지 못한 상태, 그러니까 건강하지 못한 상태로 만들어버렸다는 뜻이었다.

“아까는 그놈들의 관절을 아예 녹여버렸지. 후후후.”

밝은 미소를 보는 것과 동시에 그렇지 못한 내용을 듣자 등줄기에 땀이 주룩 흘렀다.

‘플렌드나 님, 충성, 충성!’

앞으로 헌금을 조금 더 많이 해야겠다고 다짐하며 반쯤은 확신했던 사실도 확인차 물었다.

“아까 그놈들, 불의 교단이죠?”

아니나 다를까 사도님의 표정이 당장 날카로워졌다.

“맞아.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놈들이야! 저걸 보렴, 미뉴엘!”

에사디엔과 내 시선이 사도님의 손가락을 따라 위로 올라갔다.

‘헉.’

아까는 난장판이라 미처 깨닫지 못했는데, 불의 통로가 생겼던 자리에는 엄청나게 커다란 신상이 서 있었다.

“내 플렌드나 신상(神像)☆초거대 크리스털 에디션이! 완성되는 데 30년이나 걸린 건데!”

그 소중한 신상의 하반신에 흉하게 구멍이 뻥 뚫렸으니 사도로서 분노하는 것도 당연했다.

사도님은 사제들이 픽픽 쓰러지는 모습을 보자마자 이상을 깨닫고 흘러나오는 기운을 따라 바로 지하에 내려오셨다고 했다.

“미뉴엘, 못된 불의 찌꺼기들을 퇴치하도록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으마. 이건 사심이야!”

사도님은 거의 불을 뿜는 용처럼 분노하셨다.

‘완전 플렌드나 덕후셨네……. 그러면서 다음 사도는 무슨.’

앞으로도 한참은 더 사도로 지내실 것 같다고 생각하며 픽 웃었을 때였다. 에사디엔과 눈이 딱 마주쳤다.

“…….”

그리고 우리는 거의 동시에 서로에게 몸을 기울이며 속삭였다.

“미뉴엘, 신전 일은 조금 뒤에…….”

“신전에 금 간 건 나중에 얘기해요.”

생각이 통했다.

“푸훗.”

내 입에서 웃음이 흘러나온 것과 동시에 살짝 커졌던 에사디엔의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어찌 보면 아무것도 아닌 순간이었는데도 가슴 밑바닥에 딱딱하게 가라앉았던 것이 진흙처럼 부드러워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슬그머니 잡아오는 손길에 퍼뜩 제정신이 돌아왔다.

‘내가 뭐라는 거야, 지금?’

아까부터 뭐가 자꾸 녹아내리고 부드러워진대.

플라스틱도, 유리도, 알루미늄도 재활용할 수 있지만 사람은 재활용이 안 된다는 건 만고불변의 진리다.

“흠, 돌아가죠.”

나는 잡힌 손을 빼내고 냉정하게 돌아섰다.

정신 차리자, 미뉴엘 카르이넨.

* * *

마법 학교의 입학식.

원래는 떡하니 내가 후원자요, 하고 얼굴을 드러내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팔로스를 제자로 콕 점찍은 대마법사님이 입학식 때 보자고 (혼자) 약속해 버려서 어쩔 수 없게 되었다.

…라고, 나는 내 앞에 앉은 꼬마 예비 마법사 팔로스에게 반쯤 변명 중이었다.

“괜찮아요. 저도 후원해 주신 분이 어떤 분이신지 궁금했어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아직 앳된 얼굴에는 경계심과 어색함이 사이좋게 깃들어 있었다.

그 기분을 익히 알기 때문에 굳이 오고 싶지 않았던 건데.

그래도 내 코가 석 자라 어쩔 수 없었다. 사실 입학식 참석은 명분일 뿐 대마법사 브라시다스를 보러 온 목적이 더 컸다.

“정말 감사합니다. 우리 집 애들이 입은 옷도 봤어요. 그것도 감사합니다.”

팔로스는 고아원을 ‘우리 집’이라고 불렀다. 그만큼 이 애에게는 좋은 곳이었다는 뜻이겠지.

“아니야. 내가 감사하지.”

우울했던 날 충동적으로 내밀었던 손이 엄청난 인연을 잡았다.

내가 왜 고맙다고 하는지 모르는 팔로스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그냥 싱긋 웃기만 했다.

“아이들 옷은, 좋은 날이니까 다 같이 좋은 추억 만들었으면 해서.”

마법 학교에 입학하는 것은 굉장한 일이라 입학식에도 온 가족이 출동한다고 들었다.

팔로스만 혼자 덩그러니 앉아 있는 건 보고 싶지 않아서 고아원 사람들도 참석할 수 있게 마차를 몇 대 보냈다.

옷도 깨끗하게 몇 벌씩 맞춰준 건 그야말로 ‘하는 김에’였다.

“좋은 날…….”

“아니야? 팔로스, 너는 마법 학교에 입학하고 싶어 했잖아.”

입학 건으로 원장과 다투는 것을 들었다는 말에 팔로스의 귓불이 조금 붉어졌다.

“맞아요. 그런데 후원자님.”

“후원자님?”

나 방금 달 풍선이라도 쐈니?

내 표정이 미묘해지자 어물거리던 팔로스가 말을 바꿨다.

“…영애님?”

후원자님에 이어서 영애님은 또 뭐람.

나는 킥킥 웃으며 팔로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다가 참았다. 열네 살이면 딱 어린이 취급받기 싫어할 나이니까.

“미뉴엘 이모라고 불러.”

여섯 살 차이는 참 미묘했다. 누나라고 부르라기에는 뭔가 강요하는 것 같아서, 조금 억울한 감이 있었지만 차라리 ‘이모’를 선택했다.

팔로스도 조금 의아한 표정을 지었을지언정 순순히 따랐다.

“…미뉴엘 이모, 저를 왜 도와주신 거예요?”

“아, 그걸 물어보려던 거야?”

“불편하신 거라면…….”

“전혀 안 불편해. 그냥 그만큼 궁금했구나, 싶어서.”

으음, 나는 길게 소리 내며 고민했다.

전생의 기억 때문에 동질감을 느꼈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 아닌가.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얼버무리는 것뿐이었다.

“그냥.”

“그냥…이요?”

“응. 그냥 네가 거기 있었어.”

납득하지 못하겠는지 팔로스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나는 그것을 살짝 눌러 펴주며 웃었다.

“실 팔찌가 이끌어줬다고나 할까? 나도 어릴 적에 많이 만들었거든.”

“이모가요?”

“그럼. 그 생각이 나서, 나도 우리 집… 식구들에게 나눠주려고 샀다가 널 만난 거야.”

“그렇구나…….”

팔로스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뭔가 개운하지 않은 듯한 얼굴이었다.

요즘 에사디엔을 상대하면서 많이 봤던 표정이라 나는 더 말을 보태지 않고 느긋이 기다렸다.

“그런데 제가 생각만큼 공부를 못 하면 어떻게 해요?”

역시.

“네가 입학하고 싶어 했으니까 열심히 해야지, 당연히?”

“열심히 해도 안 되면요?”

“무섭니?”

“…네.”

팔로스는 꽤 솔직한 아이였다. 그리고 당당했다.

실 팔찌를 팔던 여자아이를 생각해 보면 귀족 앞에서 할 말을 하는 게 꽤 어려울 텐데도.

‘이런 애라면 걱정할 필요 없겠어.’

“넌 잘할 거야.”

“…….”

“하지만 네가 원하는 건 이런 말이 아니겠지. 솔직히 나도 마법사가 아니라 열심히 하면 결과가 잘 나온다고 장담은 못 하겠어.”

팔로스는 아무 말 하지 않았지만 눈에 띄게 어깨가 처졌다.

“그렇다고 그렇게 실망하지는 말고.”

나는 테이블에 찻물을 조금 흘린 후 그 물로 긴 선을 그었다.

“이게 지금 네 앞에 있는 길이라고 치자.”

“…마법사의 길이요?”

“그래. 가고 싶었던 길이지만 걷다 보면 네 길이 아니라고 생각될 때가 올 수도 있어. 이건 너 자신만 깨달을 수 있는 거야.”

그리고 ‘마법사의 길’ 옆으로 잎맥처럼 갈림길을 몇 개 추가했다.

“혹은 다른 일을 하고 싶어질 수도 있고.”

중학생 때 꿈꾸던 장래 희망을 직업으로 가지는 사람이 얼마나 있던가? 대학교 전공을 살려서 직업을 선택하는 사람도 적은 마당에.

인생이란 계획대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 정령 때문에 고생길이 예상되는 나처럼!

“만약 다른 일을 하고 싶어지면요?”

“그러면 치열하게 고민해야지. 고민하고, 또 고민해서 선택하고.”

“그게 잘못된 길이면…….”

“걱정하지 마. 설령 잘못되었더라도 끊긴 길은 아닐 테니까.”

갈림길에 또 다른 갈림길들을 그려 넣었다.

인생은 긴데 아직 칼로스는 열네 살이다. 스무 살이든, 서른 살이든. 아니면 마흔 살이든. 몇 살이 되어도 새로운 도전을 하기에 늦은 때란 없다.

“네가 서른 살에 새로운 공부를 시작하더라도, 예순 살까지 이어간다면 삼십 년 경력의 전문가가 되는 거야.”

“그런…가요.”

칼로스는 물로 그린 흐릿한 그림을 머릿속에 그대로 집어넣으려는 것처럼 한참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나는 이만 일어날게. 원장님하고 동생들이랑 좋은 시간 보내.”

“저… 이모하고는 이제 못 보는 건가요?”

“응? 나?”

아, 이건 좀 감동적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경계하던 아이가 이렇게 묻다니. 마음을 조금 열어준 것 같아 뿌듯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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