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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 영애 집착을 시작합니다 (46)화 (46/130)

46화

나는 기어코 팔로스의 머리를 쓰다듬어버렸다.

“저녁에 연회가 있잖아. 그때 맛있는 거 많이 먹자?”

잠시 후에 볼 텐데도 아쉬웠다. 그 마음을 누르고 인사한 뒤 바깥으로 나오자 옹기종기 모여 있던 원장과 아이들이 내게 꾸벅꾸벅 인사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너무 시간을 오래 끌었나 싶어 미안하면서도 단정하게 꾸민 아이들이 귀여워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뒤에서 귀여운 아이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덩치가 불쑥 나타나는 게 아닌가.

“미뉴엘.”

“엄마야, 깜짝이야!”

거의 무방비 상태였던 나는 너무 놀라 거의 펄쩍 뛰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아, 젠장. 역시 라망드를 보내지 말 걸 그랬나.’

하필이면 오늘도 라망드에게 지원 요청이 있었다. 무조건 나와 동행하겠다는 걸, 정 걱정되면 오후에 오라고 등을 떠밀었는데.

“흐윽.”

숨을 내뿜자 상체가 숙었다.

“미뉴엘!”

에사디엔 특유의 시원한 향이 풍긴다 싶었던 다음 순간, 나는 그의 품 안에 있었다.

그리고 에사디엔은 서슴없이 무릎을 꿇으며 내 가슴 위에 귀를 댔다.

“다행이다. 심장 박동 소리는 정상인 것 같…….”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들던 에사디엔이 마지막 음절을 헛바람처럼 집어삼켰다.

내 얼굴을 직접 볼 수 없어서 모르긴 몰라도 어마어마한 표정이었을 것이다.

“냉큼 이 손 떼요, 성희롱범.”

“그, 이건 정말로 걱정되어서…….”

“멀쩡하다면서요. 떨어지세요.”

하지만 에사디엔은 미적거리며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허리에 둘린 팔에 힘이 더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빨리!”

“…알았다.”

그제야 천천히 떨어져나간다.

‘꼭 소리를 질러야 말을 들어.’

하지만 손과 얼굴이 떨어졌다 뿐이지 가까이 선 건 마찬가지였다.

에사디엔의 향기와 눈도 깜빡이지 않고 바라보는 짙은 시선 때문에 거의 껴안긴 것 같은 기분이었다.

“더 떨어져요! 세 걸음 이상 다가오지 마세요.”

에사디엔의 얼굴이 살짝 부루퉁해지더니 아주 조금 더 떨어졌다.

갓 걸음마를 시작한 아기 걸음으로 세 걸음이나 될까? 에사디엔의 평소 보폭을 생각하면 반걸음도 안 될 것이었다.

“그게 세 걸음이에요?”

으르렁거리자 소심한 반항이 돌아왔다.

“…그대 기준으로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지금 놀리는 건가 싶었지만 급격히 피곤해진 탓에 입씨름을 그만뒀다.

‘앓느니 죽지.’

“아니, 대체 왜 이렇게 불쑥불쑥 나타나는 거예요, 황자님? 안 바쁘세요?”

한가하면 파혼 동의서에 사인이나 하시지.

“오늘은 황태자 전하 대신 내빈으로 온 거다.”

그게 이렇게 내 앞에 나타난 이유는 되지 않는다.

‘역시 지난번 일 때문에 심리적 거리가 좁혀졌나 봐.’

그 생각이 문득 들어 방어적으로 팔짱을 단단히 낀 내게 에사디엔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묻고 싶은 게 있다.”

“뭔데요?”

“미뉴엘, 그대의 이상형이 뭐지.”

“…네?”

이건 웬 뚱딴지같은 소리야. 요즘의 에사디엔은 정말이지 예측 불허였다.

“갑자기 이상형은 왜 물으세요?”

“그대가 좋아할 수 있는 남자가 되고 싶어서…….”

“…….”

이건 정말로 충격적이어서 나는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웃는 눈매가 요염하고 예쁜 사람이 좋다. 존댓말을 매끄럽게 쓰는 것도 좋다.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으면 좋겠다. 노래도 잘 부르고.

요리를 잘해서 홍두깨살이나 닭가슴살도 촉촉하고 부드럽게 구울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와 마음이 맞는 사람이어야 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 끼워 맞추고 나면, 그 사람을 에사디엔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게 자신을 죽이고도 과연 그가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건 그냥… 연기잖아요.”

이제는 연민이 차오를 지경이었다. 그런 생각이었다면 신전에서 보여줬던 모습도 연기였던 걸까?

기대하지 않았던 배신감이 비 온 뒤의 죽순처럼 불쑥 솟았다.

아무리 이황자에게서 벗어나고 싶어서 대공가의 비호가 필요하다고 해도 그렇지. 황태자도 이제는 그를 보호해 줄 텐데.

“왜 그렇게까지 하시려는 거예요?”

에사디엔은 말없이 입술을 깨물었다. 버림받은 동물 같은 표정에 배신감이 그나마 죽었다.

동시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저러다가 나보다 훨씬 나쁜 사람한테 걸리면 어쩌나 싶었다.

“받아주는 척 갖고 놀다가 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드나요? 점잖게 파혼하자고 하는 걸 고맙게 여기셔야 해요, 황자님은.”

“파혼하고 싶지 않다. 나는 그대를 원해.”

“분명히 좋은 사람이 나타날 거예요. 셀레스테 영애도 황자님한테 반했으니까 만나보세요.”

“그대가 그랬지. 이제는 나를 봐도 설레지 않는다고. 내가 그 여자를 볼 때 그렇다. 아무 감정도 들지 않아.”

설레지 않는다는 말을 듣자 뜬금없이 지난번에 신전에서 있었던 일들이 눈앞을 스쳤다.

계단에서 에사디엔이 구르기 직전의 날 붙든 것이며, 손을 보고 사과를 건넸던 일, 상처에 포션을 발라줬던 일, 동시에 같은 말을 하고 웃었던 일이.

그 때문에 하마터면 시선이 흐트러질 뻔했지만 주문처럼 나 자신에게 되뇌며 넘길 수 있었다.

‘나는 단호박보다 단호하다! 그리고 이 사람은 조각상이다!’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있든 겉으로는 담담히 선 내 앞에서 괴로운 것을 삼키듯 에사디엔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속눈썹조차도 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대를 볼 때는… 여기가, 아플 정도로 뛰어서. 그런데 보지 못하면 죽을 것 같이 아파서.”

그렇게 말하는 에사디엔은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안쓰러운 건 안쓰러운 거고. 상대의 마음에 들기 위해 자신을 바꾸겠다는 건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런 말이 있어요. 황자님께 도움이 될 거예요.”

에사디엔이 아파하는 표정 그대로 나를 응시했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믿을 수 없다.”

“믿게 되실 거예요. 저도 안 그럴 줄 알았거든요.”

“미뉴엘!”

“제 이름 부르지 말아 주세요. 대화도 이것으로 끝입니다.”

“…가지 마라.”

애원하듯 떨리는 손이 내 손끝에 닿았지만 나 자신도 믿을 수 없는 속도로 그것을 뿌리쳤다.

“다음번에 또 나타나시면… 전 황자님을 무시할 거예요.”

* * *

마법사의 연구실은 처음이라 이리저리 둘러보았지만 일반 교수실과 그다지 다른 점이 없었다.

유리문이 달린 책장에 책과 스크롤만 가득할 뿐.

펄펄 끓는 마법 약 냄비라든가 말린 쥐꼬리 같은 건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흑. 내 마법 학교 로망이…….’

어릴 적 내가 가장 좋아하던 책은 마법 학교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었다. 그 추억을 현실에 대입하려는 시도는 무리였구나, 하고 생각할 때였다.

차를 따라 건넨 브라시다스가 평온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 보이는구먼.”

“네? 아, 아닙니다.”

나는 서둘러 찻잔으로 입을 가렸지만 사실 브라시다스의 말이 맞았다.

그의 연구실을 둘러보면서도 에사디엔의 애처로운 모습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으니까.

“팔로스를 보니 어떻던가?”

“앞으로의 생활을 걱정스러워했지만, 제가 보기에는 잘 해낼 것 같더군요.”

“그렇지? 똘똘한 아이일세.”

브라시다스는 허허허 웃었다. 벌써 어화둥둥 우리 제자, 하는 모습이 보였다.

“지난번에 봤던 현혹 마법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서 조금 조사를 해보았네.”

앗, 하는 사이 주제는 마치 마법 게이트를 탄 것처럼 다른 곳으로 이동해 있었다.

“시전자를 찾아가게 된다던 그 마법 말씀이시지요?”

“그렇다네. 그때는 이제 사용하지 않는 옛날 방식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뭔가 미심쩍어서 조금 조사를 해보았지.”

브라시다스의 얼굴이 금방 교수님답게 변했다. 나는 당장이라도 만년필과 종이를 꺼내 필기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을 누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오래전에 사라진 학파에서 쓰던 마법이더군. 주로 연구하던 분야가 현혹, 환시나 저주 쪽에 치우쳐 있었어.”

“매장당한 거군요?”

딱 위정자들이 싫어할 종목이기는 했다. 말 그대로 혹세무민 아닌가.

“그 말대로라네. 벌써 오십 년 전 일이야. 그런데 그 명맥이 음지에서 이어져 왔던 걸세.”

허어.

“그렇다면 그들은 이황자님, 혹은 불의 교단과 손을 잡았다는 뜻이겠군요.”

“불의 교단이야 자네 안의 불씨를 생각하면 그럴 수 있다지만, 이황자는 또 뭔가?”

“삼황자님과 사이가 안 좋으시거든요.”

간단하게 말했지만 긴 시간을 산 사람답게 브라시다스는 그 안에 포함된 모든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그전에도 두 번이나 휩쓸렸어요. 한 번은…….”

납치도 당해 봤다고 말하려다 멈칫했다.

이황자로 추측되는 가면남의 뒤에 서 있던 두 사람. 한 사람은 스크롤을 썼고 한 사람은 불을 쏘아냈다.

“마법사님, 스크롤도 마법사만 쓸 수 있는 거죠?”

“그렇지. 마법 수식을 새겨놓기는 하지만 발동하는 데 필요한 마나를 주입해야 하니까 말일세.”

그런데 과연 두 사람이 모두 다 마법사였을까?

“그러면 혹시, 마법으로 만들어낸 불을 제가 흡수할 수 있을까요?”

“마법으로 만든 불 말인가?”

“네. 뭐… 파이어 볼 같은 거요.”

“파이어 볼?”

그게 뭐냐는 듯한 반문에 아차, 했다. 여기는 그런 마법이 없는 모양이었다.

“손 앞에서 이만한… 머리보다 큰 불덩어리가 나오던데요?”

“불로 만든 구체라. 주변 공기를 차단한 채 만들어야 하고 이동시킬 때도 그걸 유지해야 할 텐데, 호오.”

이후로도 그는 계속 뭔가 중얼거렸지만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건 거기까지였다. 순식간에 혼미해진 내 상태를 보고 브라시다스가 웃었다.

“허허허. 아무튼 불길을 뿜어내는 건 쉽지만 쿠키처럼 모양을 잡는 건 어려운 일이라네.”

실력이 엄청난 마법사라는 뜻인가? 싶었지만 그의 말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불을 지배하는 자라면 모를까.”

불을 지배하는 자!

…라면 분명 정령의 힘을 쓴다는 뜻이다.

손을 세게 움켜쥐었다. 황실 사람이 불의 교단과 손을 잡았다는 건 정말 좋지 않은 소식이었다.

“나도 오래 산 편이지만, 정령의 힘을 몸에 품은 사람은 자네가 처음일세.”

“그러면…….”

“답을 알려줄 수는 없어도 실험을 도와줄 수는 있지.”

“시, 실험이요?”

어째 으스스한 단어에 내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지만 브라시다스는 어쩐지 즐거워 보이기만 했다. 마법사들은 전부 실험광이라던 어머니의 말이 머리를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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