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왜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나는 축 늘어진 채 포션을 입에 물고 있었다.
“저 불 무서워한다고 말씀드렸는데…….”
“허허, 내가 집중하느라 그만……. 유가티스한테만 비밀로 해주게나. 응?”
우리 어머니한테 약점이라도 잡히셨나.
‘잘됐지, 뭐.’
다음에 뭔가를 부탁할 때는 어머니를 통해서 해야겠다.
나는 몸을 일으키며 씩 웃었다.
“알겠어요. 팔로스만 잘 좀 부탁드릴게요.”
우리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불을 만들어내 실험했다.
그 결과 어떤 불도 상관없었지만 마력이 섞인 것은 흡수되지 않고 막힌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이황자와 사라진 마법 학파.
이황자와 불의 교단.
그들 사이에는 확실히 연결 고리가 있었다.
‘하지만 이황자도 프레세리아 제국 사람이잖아. 어째서 죄 없는 제국민들을 괴롭히는 거지?’
정말이지 배배 꼬인 놈의 생각이란 알 수가 없었다.
잔뜩 골몰한 나를 일깨운 건 브라시다스의 웃음소리였다.
“팔로스야 내 제자니 당연히 잘 가르칠 걸세.”
“알아요.”
“그러면 보통은 다른 걸 부탁할 텐데.”
“먼저 여쭤본 건 저니까요. 마법사님도 실험이 재미있으셨을 테니 윈윈이죠?”
나는 뻔뻔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 윈윈이라기보다는 내가 훨씬 이득인 시간이었다.
대마법사를 만나려고 기를 써도 그림자조차 보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 판국이다. 그런데 나는 독대로도 모자라 그가 직접 실험까지 해줬(?)으니.
“과연 유가티스의 딸답구먼.”
나는 반짝 고개를 들어 되물었다.
“정말요? 그거 칭찬이죠?”
“물론일세.”
나는 최근 들어 가장 환하게 웃었다.
넘치게 사랑받고는 있지만 내가 언니들에 비해 능력 없는 사람인 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이런 내게도 멋진 우리 어머니를 닮은 구석이 있다는 게 너무 기뻤다.
‘헉, 그런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났어?’
저녁 연회가 시작될 시각이 이제 막 지나가고 있었다.
팔로스도, 라망드도 우리를 찾고 있을 것이었다.
“빨리 가자고요, 빨리!”
채근하던 나는 아예 브라시다스의 로브 자락을 잡고 질질 끌었다.
“아이고, 노인네를 이렇게 마구 다루면 안 된다네.”
“겉으로는 중년으로밖에 안 보입니다!”
“호오, 역시 올리브를 꼬박꼬박 챙겨 먹은 보람이 있구먼.”
“올리브의 문제가 아니지 않나요?!”
교수들의 연구실이 있는 탑에서 연회장까지는 그다지 멀지 않았다. 브라시다스와 함께 연회장에 들어서자마자 뺨이 따가울 정도로 강렬한 시선이 느껴졌다.
‘아직도 남아 있었구나…….’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누구의 눈길인지 알 것 같아서 애써 모른 척했다. 이제 무시하겠다고 경고도 했으니까.
“우리 팔로스가 저기 있구먼.”
팔로스는 아이들 몇 명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 애들보다 키가 작아서 잘 보이지 않는데 브라시다스는 잘도 찾아냈다.
“역시 내 제자야. 입학식 날부터 인기가 많구먼.”
팔불출 대마법사의 의견과 내 생각은 전혀 달랐다.
완전히 구석도 아니지만 테이블 배치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잘 닿지 않는 각도. 벽을 뒤로한 채 둘러싸인 팔로스.
몇 명은 팔로스의 어깨를 툭툭 밀치기도 했다.
“친구 같은 분위기는 전혀 아닌데요?”
“뭐? 그런가? 애들을 가르치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
“에휴.”
그러고 보니 브라시다스에게는 팔로스가 첫 제자였다.
‘게다가 우리 어머니가 어렸을 적에도 대마법사로 이름을 떨쳤다고 했으니…….’
최소한 삼사십 년 이상은 텃세 같은 것을 모르고 존경만 받아왔겠지.
“대마법사님의 첫 제자가 귀족도, 부유층 자제도 아니고 평민에 뒷배 없는 꼬맹이라서 괴롭히는 거죠.”
“아까부터 느꼈지만 입이 상당히 거칠구먼.”
“어머나. 제가요? 오호호.”
“허허허.”
나와 마주 보며 허허 웃던 브라시다스가 돌연 팔로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 어디 가세요?”
“저 고얀 놈들이 내 금쪽같은 제자를 건드리려고 하니 혼쭐을 내줘야 하지 않겠나!”
“아이고, 참으세요.”
진짜 팔불출이시라니까!
“지금 저 애들은 마법사님 때문에 질투하는 건데 거기에 기름을 끼얹을 필요는 없지요.”
게다가 브라시다스는 팔로스와 사제의 연을 맺기는 했지만 다른 학생들에게도 강의를 해야 했다.
“그러면 그냥 두고 보라는 말인가?”
“설마요. 뒷배가 멀쩡히 있다는 걸 보여줘야죠.”
나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팔로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짜증 나는 소리들이 들렸다. 부모님 안부를 묻는 건 우스울 정도로 엄청난 모욕이 팔로스에게 퍼부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내 웃음은 굳건했다. 이런 날벌레들쯤이야.
“안녕, 얘들아.”
“야, 웃어. 사이 좋은 척… 우와.”
서둘러 팔로스를 잇새로 어르던 녀석들이 날 보더니 입을 떡 벌렸다.
‘그래! 내가 예쁘긴 하지!’
항상 만나는 사람이 고정되어 있으니 내 미모에 감탄하는 사람이 통 없었단 말이지!
“훗.”
긴 머리를 뒤로 찰랑 넘기며 팔로스에게 손을 뻗었다.
“늦어서 미안해. 배고프지?”
“괜찮…아요.”
머뭇거리는 팔로스의 손을 내가 먼저 붙잡았다. 그걸 뿌리치지는 않았지만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게 싫었는지 아이의 얼굴이 어두웠다.
‘당연히 싫겠지…….’
이해했지만 이대로 둘 수는 없었다. 팔로스는 똑똑한 아이니 스승 때문에라도 꾹꾹 눌러 참을 테니까.
“야, 팔로스. 누나가 있으면 있다고… 말을 할 것이지. 하하. 오해했잖아?”
제일 먼저 말을 건 아이는 가장 앞에서 팔로스에게 모욕을 주던 녀석이었다.
“맞아. 오해했잖아. 누나, 우리 팔로스 친구거든.”
두 번째 녀석은……. 아니, 귀찮으니까 1호와 2호라고 하자. 2호는 1호의 끝말을 따라 했다.
‘총 여섯 명.’
그중 나머지 네 명이 은연중 이 둘을 둘러싸듯 서 있었다. 그렇다면 리더하고 그 딸랑이 정도인가.
나는 1호에게 상냥하게 웃으며 물었다.
“느그 아부지 뭐 하… 아니, 네 부친은 뭐 하는 분이니?”
“아. 우리 집? 자쿠 남작가라고, 무역업으로 유명해. 평민이 드레스 빌려 오느라 무리했을 텐데 힘들면 연락해?”
“난 얘하고 사촌. 아버지가 여기에서 근무하셔. 원하면 누나도 취직시켜 줄게.”
1호와 2호는 사촌이었구나. 그래서 이렇게 쌍떡잎처럼 쌍으로 싹수가 노오랗구나?
“어머, 재수 없기도 하셔라.”
필살 미소와 함께 목소리를 나긋나긋하게 내자 몇 초간은 욕을 내뱉었다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이놈들은 바보가 분명했다. 대체 어떻게 마법 학교에 입학한 건지.
‘그나저나 이 상황, 어쩐지 기시감이 드는데.’
편한 옷을 선호하는 나지만 오늘은 팔로스 기죽지 말라고 힘을 잔뜩 주고 왔다.
최고급 비단 위에 드문드문 올려진 건 구슬이 아니라 전부 진주다. 사각 네크라인을 따라 놓은 자수는 은사. 목을 장식한 것은 진주와 핑크 다이아몬드.
‘이런 것도 못 알아보면서 무역업을 하는 집안의 자제?’
코웃음이 절로 났다.
더 어이없는 건 잠시 후 다가온 이놈들의 부친들도 전혀 다를 바 없는 수준이라는 점이었다.
심지어 2호의 아버지는 내가 팔로스의 후원 및 입학 서류를 작성하러 왔을 때 받지 않으려던 그 직원이었다.
“아, 그때 그?”
역시 상대도 나를 알아봤다.
“귀족이라더니. 역시 사칭이었나?”
그 말 한마디에 아이들의 눈빛이 잔혹해졌다. 1호, 2호의 부친들은 이미 값을 매기듯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고 있었고.
‘참 나. 취직을 시켜주겠다고? 그럴 위치도 아닌가 본데.’
내가 쓴 서류를 봤다면 이름도 알 텐데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그 봉인을 열어서 볼 직급이 아니라는 뜻이다.
때마침 저쪽에서 사람들을 둘러보던 학교장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가 곧장 반색하며 다가오자 나는 속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사이다 터뜨리러 오시네.’
그런데 의외로 가만히 모욕을 견디고 있던 팔로스가 한계에 달했는지 폭발하려고 했다.
“이익……! 이분은!”
“쉿. 팔로스, 조금만 참아.”
아이의 어깨를 토닥토닥 다독이며 속삭였다.
‘당신은 화를 내도 되잖아요.’
나를 올려다보는 팔로스의 시선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런 자리에서는 화를 터뜨리는 것도 효율적으로 해야 재미있는 법이거든.”
“네?”
팔로스가 반문한 순간 세 발 앞으로 다가온 교장이 인사했다.
“아, 이사장님. 여기 계셨군요.”
“이사장님?!”
다들 군무라도 추듯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나?’
교장이 보는 건 나뿐인데.
나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그제야 선심 쓰듯 이름을 밝혔다.
“그래요. 신임 이사장 미뉴엘 카르이넨입니다.”
“카, 카르이넨?!”
“카르이넨 대공녀?”
그래. 아무리 사치품을 못 알아보는 안목 낮은 자들이라도 카르이넨의 이름은 알았다.
‘돈지랄이든 후원이든 지원이든, 할 거면 제대로 해야지.’
언젠가 한 번은 필요할 날이 올 것 같아 기부금을 쏟아붓고 이사장 자리를 가져왔는데, 입학 첫날부터 유용할 줄은 몰랐다.
내가 가진 것 중 가장 큰 장원의 반년 치 수익이 한 방에 날아갔지만 아깝지 않았다.
“미뉴엘.”
게다가 타이밍 좋게 ‘내가 모른 척할 그 사람’마저 다가왔다.
아니, 내내 나를 지켜보고 있었을 테니 극적인 순간을 노린 것이 분명했다.
‘이걸 반길 수도 없고, 안 반길 수도 없고.’
솔직히 이번에는 좀 칭찬하고 싶을 정도였다. 에사디엔은 반짝거리는 머리카락 자체가 신분증이니까.
“황자님을 뵙습니다.”
다들 절하며 인사를 올렸지만 에사디엔은 받아주지도 않은 채 짐짓 불쾌한 듯 물었다.
“내 약혼녀에게 무슨 볼일이라도?”
확인 사살에 그렇지 않아도 핼쑥해졌던 얼굴들이 더 딱딱하게 굳었다.
나는 거기에 대고 싱글싱글 웃으며 확인하듯 물었다.
“내 드레스가 뭐?”
“…….”
“취직을 시켜줘?”
“…….”
다들 입에 드라이아이스를 물었는지 딱딱하게 얼은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마음 같아서는 ‘새파랗게 어린 짜식들이! 라떼는 말이야!’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연장자들이 둘러서 있으니 참는다.
“신입생 친구들, 팔로스는 카르이넨 대공가에서 눈여겨보고 있다는 걸 잊으면 곤란해질 거야.”
“…….”
“대답.”
“예, 옙!”
“혹시 팔로스가 말하지 않는다고 내 귀에 안 들어올 거란 얄팍한 생각을 하고 있다면…….”
정말 하고 있었는지 눈이 마주친 몇 명이 황급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나는 입매를 비틀며 비아냥거렸다.
“그 생각 당장 접어. 뭐, 무슨 일이 일어날지 궁금하다면 직접 체험해 보든가.”
“…….”
“체험 학습은 참 좋은 거야. 목숨이 하나라 체험도 한 번뿐이겠지만. 그렇지?”
“그, 그렇습니다!”
그래도 애들이라 순한 맛으로 끝냈다. 어른들을 향하는 협박은 좀 더 직접적이었다.
“거기 부친들께서는 아들 관리 잘하시길. 지금 하는 일이라도 붙들어 놓고 싶다면.”
직접적이라고 한 것 치고 점잖다고? 설마 그럴 리가. 신체 언어로 표현해 줬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