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나는 검지와 중지로 내 눈과 1호, 2호 부친들의 눈을 번갈아 가리켰다.
‘지켜본다.’
그다음으로 귀 옆에서 손가락을 빙글 돌리고.
‘혹시 돌아서 애 건들면.’
마지막으로 손날로 목을 슥 그었다.
‘다 죽는… 아니, 가만 안 둔다잉?’
내가 생각해도 유치찬란하지만, 이런 족속들한테는 권력으로 찍어 누르는 1차원적인 협박이 가장 잘 먹히는 법이었다.
그것을 증명하듯 부친들도 안색이 파리해진 채 빠릿빠릿하게 대답했다.
“주, 주의하겠습니다!”
나는 오른팔로 팔로스의 어깨를 감싸며 마지막으로 교장에게도 당부해 두었다.
“교장 선생님, 저는 선생님의 권한을 존중하고, 딱히 인사에 개입하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다만 제 사람을 건드리는 걸 두고 보지는 않을 거랍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대마법사님의 제자가 아닙니까.”
그래. 어느새 연회장에 자리한 사람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집중되어 있었다.
‘뒷배 광고는 제대로 했네.’
목적을 달성한 나는 다시 싱긋 웃어 보였다.
“교장 선생님 말씀이 맞아요. 그러니 감히 그럴 사람은 없겠지요, 이제.”
문득 시선을 내리자 팔로스가 멍하니 나를 보다가 움찔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응?’
그런데 그건 나와 눈이 마주쳐서가 아니라 내 뒤쪽에 있는 뭔가를 봐서였다. 의아해져서 흘긋 돌아보자 에사디엔이 헛기침을 내뱉었다.
“흠, 흠.”
“…하.”
황급히 아닌 척했지만, 팔로스를 노려보던 눈을 이미 본 후였다.
‘아니, 왜 우리 애 기를 죽이고 그래?!’
나는 보란 듯이 팔로스의 어깨를 더 바짝 끌어안았다.
그때 1, 2호의 무리가 꼬리를 말고 도망치며 훤히 트인 시야에 익숙한 남색 머리칼이 보였다.
“미뉴엘.”
“라망드! 너 이제 온 거야?”
어쩐지 안 보인다 했더니. 시간 약속을 정확하게 지키는 라망드도 늦을 만큼 바빴나 보다.
“미안. 조금 늦었지.”
사과하면서도 라망드는 감꼭지를 씹은 듯 떫은 표정이었다.
무슨 일인가 해서 봤더니 놀랍게도 라망드의 뒤에는 혹이 달려 있었다. 라페슈라는 혹이.
“괜찮아. 무슨 일 있었어?”
“아니. 그냥 마주친 것만으로도 기분 나빠서.”
그리고 라망드는 그 기색을 숨기지도 않은 채 피식 웃으며 에사디엔에게 인사했다.
“그런데 여기도 그런 사람이 있네. 잘 지내셨습니까? 황자님.”
“…오랜만이군, 사제.”
“카르이넨의 일원으로서 황자님께서 미뉴엘에게 자꾸 접근하시는 것이 참 불편하군요.”
에사디엔의 눈썹이 확 일그러졌다. 관자놀이 위쪽으로 혈관까지 도드라지는 걸 보며 나는 조금 감탄해 버렸다.
‘감정을 표현하려고 한다더니 정말 전보다 꽤…….’
아, 아니야. 무시하기로 했으니 그냥 보지를 말자.
“자네가 언제부터 카르이넨의 일원이었지.”
“어디 보자. 십 년 전부터죠. 전 어머님, 아버님께서 받아들인 사람이거든요. 누구와 다르게.”
나는 팔로스를 이끌고 두 사람에게서 슬금슬금 등을 돌렸다. 괜히 저 사이에 있다가 새우처럼 등 터질 필요는 없지.
팔로스가 내 소매를 살짝 당기며 물었다.
“누구예요?”
“금발 황자님은 나랑 파혼 진행 중인 약혼자. 남색 머리 사제는 내 소꿉친구.”
“으음.”
자꾸 둘을 돌아보는 걸 보니 뭔가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다.
“왜 그래?”
“아, 아니에요. 그런데… 저 누나도 아는 사람이에요?”
“응?”
팔로스가 가리킨 곳에서는 라페슈가 긴장한 얼굴로 브라시다스에게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대…마법사님?”
“호오? 안녕하신가.”
브라시다스가 뚜렷이 흥미를 내비치며 응했다.
순간 나는 긴장해서 팔로스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어떻게 또 여기서 만날 줄이야. 혹시 브라시다스가 라페슈까지 제자로 들이려나?’
“마력의 그릇이 큰 아가씨로군. 그런데 마법을 배운 것 같지는 않고……. 어릴 때부터 수련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구먼.”
“지, 지금이라도 배우고 싶습니다.”
“올해 입학 사정 기간은 끝났으니 내년에라도 지원해 보게나.”
휴.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긴장을 풀었다.
‘아무래도 팔로스의 잠재력이 라페슈보다 큰 모양이야.’
하지만 라페슈는 단번에 포기하지 않았다.
“저를 제자로 받아주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나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라페슈가… 원작에서도 브라시다스에게 직접 제자로 삼아달라고 요청했던가?’
가물가물하기는 해도 먼저 손을 내민 건 브라시다스였는데, 어쩐지 지금 상황은 정반대였다.
“글쎄. 나는 이미 제자가 있어서 말일세. 당분간… 녀석이 마법사 한 명 몫을 하게 될 때까지는 더 받을 생각이 없다네.”
저 ‘당분간’은 최소한 10년 이상이겠구나.
브라시다스는 이쪽에 있는 팔로스를 보며 미소를 날렸다. 대략 ‘오구오구, 우리 제자’ 하는 듯한 웃음이었다.
라페슈는 그제야 그의 제자가 팔로스임을 알게 된 듯했다. 눈을 부릅뜬 채 팔로스를 보던 라페슈는 뒤이어 나를 무시무시하게 노려보기 시작했다.
‘뭐, 뭐야?’
눈을 깜빡이는 사이 성큼성큼 이쪽으로 다가온 라페슈가 공격적으로 물었다.
“미뉴엘 님께서 이 애를 추천하셨나요?”
“추천요? 그럴 리가요. 우리 팔로스는 정정당당하게 시험을 치고 들어왔는걸요.”
“거짓말. 뭔가 수를 쓴 거죠? 나를 방해하려고?”
“아니… 잠시만요, 셀레스테 영애.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당신이 뭘 원하는지 알 정도로 우리는 친한 사이가 아니에요.”
“…….”
반박할 말이 없는지 라페슈는 입을 꾹 다물었지만, 노려보는 눈빛만은 여전했다.
“나한테 뭘 원하는 건지 알고 싶지도 않지만, 모르겠나요? 내가 지금 당신의 말에 대답해 주는 것 자체가 엄청나게 관용을 베푸는 거라는 사실.”
“뭐라고요? 내가 무슨 잘못을…….”
거기까지 말해 놓고 라페슈도 아차 싶었는지 말을 다 맺지 못하고 입술을 말아 물었다.
하지만 내가 그대로 넘어갈 거라 생각했다면, 천만에.
“다른 사람의 관계는 부숴놓고 참 당당하게 돌아다니는데. 글쎄, 그게 누구 덕일까요?”
“미뉴엘, 나는 분명 그 여자와 아무 관계도 아니라고 말했다.”
어느 틈엔가 다가온 에사디엔이 항의했지만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내가 당신을 매장하지 않아서라는 생각은 안 해봤나요? 셀레스테 영애.”
성인식 연회 때 라페슈를 밀어내던 사람들을 기억한다. 순식간에 권력의 추에 매달려 이동하던 사람들.
라페슈도 같은 장면을 떠올렸는지 눈에 띄게 발끈했다.
“매장? 대체 당신이 무슨 권리로 나를……!”
“권리라뇨. 이런 일에 권리가 웬 말인지?”
이 세상에 사람이 사람을 짓누를 수 있는 권리란 애초부터 없다. 힘이 있으니까 쓰는 것뿐이다.
피식 웃어주자 라페슈는 분을 참지 못하고 바들바들 떨었다.
“…집안 빼면 아무것도 없는 주제에.”
오. 꽤 맞는 말이었지만 이 세계에서는 집안을 잘 타고나는 것도 능력이었다.
‘하긴, 전생에서도 그렇게 다르지는 않았나?’
태어나자마자 다른 스타트 라인.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그건 어디나 같았다.
“그거참… 귀족답지 않은 말이네요. 셀레스테 자작은 당신의 그런 면이 좋아서 입양했나 보죠?”
자신들을 푸른 피라 칭하는 귀족들에게 가문이란 엄청난 의미를 지녔다.
가문을 지킨다는 명목하에 일어나는 일만 해도 어마어마한 이 세계에서 라페슈의 말은 정말로 이질적이었다.
“아니면 셀레스테 자작가의 가풍인가?”
“…억측이 심하네요. 더 할 말이 없군요.”
그제야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은 듯 라페슈는 인사도 하지 않은 채 자리를 떴다. 영락없이 꼬리를 말고 도망치는 모양새에 나는 흥, 하고 코를 울렸다.
‘그러게 가만히 있는 악역한테 왜 덤벼, 덤비길.’
라페슈는 제 무덤을 팠다. 앞으로 사교계에서 그녀의 입지는 더 좁아질 것이다.
“재미있는 구경을 했구먼. 허허허.”
콧김을 뿜고 있는데 브라시다스가 웃는 소리에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 중간쯤부터는 거의 팔로스가 있다는 것도 잊고 전투(?)에만 몰입해 버렸다.
“미안해, 팔로스. 어른으로서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네.”
“아니에요. 멋있었어요.”
“…멋있어?”
다 큰 어른 둘이 쨍알쨍알 말싸움하는 게 멋있어?
“지는 것보다는 이기는 게 멋지잖아요.”
순수하기 짝이 없는 대답에 양심이 푹푹 찔렸다.
“아하하……. 배고프지? 어서 식사하자. 너무 늦어져서 어떡하니.”
부끄러운 건 부끄러운 거고, 갈 때는 가더라도 애 밥은 먹여야지. 얼른 빈 테이블에 자리를 잡자 라망드며 에사디엔도 따라 앉는다.
‘괜히 모른 척한다고 했나?’
따라오지 말라고도 못 하잖아. 에사디엔은 그 맹점을 파악한 게 분명했다.
분해서 마음의 눈으로 그쪽을 한껏 노려보는데 팔로스가 망설이며 말을 걸었다.
“있잖아요.”
“응?”
“이모 말고… 누나라고 해도 돼요?”
이건 또 의외였다.
‘음, 싸우는 모습을 보고 귀족이나 평민이나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느꼈나?’
팔로스는 똑똑하니까.
‘역시 후원하길 잘했지.’
나는 한층 더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팔로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상관없지만, 난 너보다 여섯 살이나 많은걸.”
“누나는 엄청 예쁘니까 괜찮아요.”
예쁜 이모도 이 세상에 많지만 일단 지금은 넘어가자. 기분이 너무 좋아서 광대가 승천하려는 걸 잡아 누르기에도 벅차니까.
예쁘다는 말은 언제 들어도 새로워. 늘 짜릿해!
팔로스가 내 쪽으로 몸을 더 기울이며 속삭였다.
“저 정말 열심히 할게요. 누나가 내 사람이라고 해줬으니까. 누나한테 자랑스러운 사람이 되고 싶어요.”
“팔로스…….”
오늘 느꼈던 것 중에 가장 커다란 감동이 몰아쳤다.
‘아, 이게 동생의 매력인가? 다들 동생한테서 이런 감동을 받는 건가?’
뿌듯함을 이기지 못하고 벅찬 한숨을 내뱉을 때였다.
“쯧.”
“쯧.”
맞은편과 옆자리에서 동시에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당장 도끼눈을 뜨며 추궁했다.
“누가 우리 애 말하는데 혀를 차? 라망드, 너야? 너겠지.”
“왜 나만…….”
‘왜긴. 에사디엔 무시하는 거 보면 모르니?’
입 다물라는 뜻으로 테이블 아래에서 라망드의 다리를 콱 차버렸다.
“윽.”
그런데 라망드가 아니라 에사디엔이 움찔하는 게 아닌가.
‘앗. 조준 실패!’
원래 나는 사과를 회피하는 사람이 아니다. 절대로, 완전.
그런데 하필이면 지금 에사디엔이 ‘알은척하면 안 되는 사람’이라서 참… 거참 곤란해 죽겠네?
나는 아픔을 삭이는 에사디엔을 즐겁게 외면하며 옆으로 발을 휘둘렀다.
“악.”
이번에는 명중. 라망드가 확 째려봤지만 나는 자연스럽게 외면하며 팔로스에게 음식을 권했다.
“흠흠. 자, 팔로스. 이것도 먹어봐.”
“감사합니다.”
아래에서는 발길질이 오갈지언정 테이블 위에서는 평온하기 그지없는 시간이 흐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