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모처럼 가족들이 모두 모인 저녁, 식사가 마무리되고 후식이 서빙되는 중이었다.
요 며칠은 에사디엔도 찾아오지 않았고 별다른 사건도 없이 평온하게 흘러갔다. 이 평화를 깨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지만, 미루기만 할 수는 없었다.
“저, 조용히 드릴 말씀이 있어요.”
갑작스럽게 꺼낸 내 말에 가족들의 시선이 집중됐고, 하인들은 서둘러 접시를 내려놓은 후 집사와 함께 식당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라망드까지 자리에서 일어설 줄이야.
“넌 어디 가?”
“가족들한테만 말씀드릴 거 아니야?”
이미 자기도 가족이나 마찬가지면서 새삼스럽게.
나는 라망드를 꾹 붙들어 앉혔다.
“너도 들어야 해.”
“아, 알았어. 옷 그만 잡아당겨.”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다시 의자를 끌어당겨 착석한 라망드의 입가에는 은은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다 알고 있으면서 튕기기는.’
어머니 생각에도 그랬는지 조금 웃으며 물으셨다.
“그래. 무슨 일이냐.”
“저, 북부의 카르이넨 본성에 가려고 해요.”
쥬엘라 언니의 결혼식도, 내 성인식도 끝났다.
부모님과 엘가 언니가 수도에서 처리하기로 했던 일들도 끝났을 테니 이제 슬슬 영지로 돌아갈 준비가 시작될 참이었다.
“그리고 정령석 봉인지에 가보려고요.”
“으음…….”
아직도 정령석에 대한 기억이 좋지 않은 어머니는 신음과 함께 이마를 짚었다. 대신해서 아버지가 내게 물었다.
“플렌드나의 사도며 대마법사 브라시다스를 만났다는 이야기는 들었단다. 거기서 나온 결론이니?”
“네. 아무래도 이런 힘을 계속 품고 살기는 힘들 것 같기도 하고…….”
브라시다스와의 실험 탓인지 또다시 기운이 불안정해져서 이제는 심하게 화를 내지 않아도 불현듯 피를 토하고는 했다.
오늘도 식사 전에 한 번.
어제는 자기 전에 두 번.
몸 안에 있는 열기가 점점 더 시한폭탄처럼 변하고 있다는 생각이 강해지고 있었다.
“정령이 뺏긴 힘 대신에 제 거라도 돌려줘야 할 것 같기도 하고요.”
나는 최근 알아낸 것들을 전부 설명했다.
사도님을 만나던 중 강림한 플렌드나가 ‘정령의 마음에 달렸다.’라며 넌지시 암시를 준 일.
남부의 불의 교단이 정령의 힘을 멋대로 탈취해 쓰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이황자와도 연관이 있는 듯하다는 추측까지.
“하지만 왜 황자씩이나 되는 인물이 제국민들을 괴롭히는지 이유를 모르겠어요.”
“복잡한 이야기구나.”
아버지는 한숨과 함께 눈 사이를 문질렀다. 조금 전 이마를 짚던 어머니와 매우 비슷한 표정이었다.
“이황자는 황제 폐하를 오래전부터 원망했단다.”
황태자와 이황자는 어머니가 달랐다. 황태자의 모후가 승하한 후 새로 간택된 황후가 이황자를 낳았다.
그런데 불같은 연애를 거쳐 결혼에 골인했던 황태자의 모후와 달리 새 황후는 전적으로 전략적인 선택이었다. 하여 황제는 그녀에게 마음을 전혀 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분도 황후가 된 지 십 년 만에 승하하셨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마야 폐황녀가 죽고 에사디엔이 황성에 들어왔다.
문제는 황제가 너무나 슬퍼했다는 데 있었다.
아무리 후처라고 해도 황후의 장례식에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던 황제가 여동생의 죽음에는 식음을 전폐할 정도였다니.
“감히 드러내놓고 떠들 만큼 용기 있는 자는 없었으나 구설수가 꽤 돌았다.”
악연은 거기서부터였구나. 황실 가정사란 왜 이렇게 배배 꼬였을까.
‘그렇다고 왜 개인 감정에 관계없는 사람들을 이용하려 드느냔 말이야.’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이황자였지만 좋지 않은 이미지만 잔뜩 쌓인 상태였다.
“아무튼 정령석을 확인해 보려고요. 지금 생각할 수 있는 건 거기까지예요.”
“무섭지 않으냐, 미뉴엘?”
엘가 언니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나는 솔직하게 답했다. 이런 건 숨길 수도 없는 성질의 것이니까.
“무서워.”
불의 정령이라니. 내 두려움의 결정체나 다름없다.
‘솔직히 도망칠 수 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어.’
남부에서 사람들이 많은 피해를 입고 있다지만, 그건 마치 비행기로 여덟, 아홉 시간은 가야 할 만큼 멀리 떨어진 나라에서 전쟁이 벌어진 것과 비슷하게 느껴질 뿐이다.
그런데도 내가 움직이려는 건.
부하들을 잃어서 괴로워하던 테오도르의 모습.
이제 막 마법사의 길에 발을 들인 팔로스.
…를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나 자신 때문이었다.
‘계속 도망 다닐 수만은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
만약 불의 교단의 세력이 로콰이트까지, 북부까지 올라온다면?
당연히 부모님과 언니들은 나를 지키려 할 것이다. 그러다 가족을 잃기라도 하면 나는 머뭇거리던 나 자신을 영영 용서할 수 없을 것이었다.
‘궁지에 몰리다 못해 피를 빨리느니 무서운 걸 마주하고 말지.’
Dead or alive.
“어차피 죽든 살든 둘 중 하나야. 그렇다면 우선 들이받아 봐야지.”
“하, 하하.”
언니들과 어머니가 웃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조용히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있었다.
“너도 영락없는 카르이넨이로구나.”
어째 요즘 이런 말을 자주 듣는 것 같은데요.
“꼭꼭 숨겨두고 예쁘고 부드러운 것만 보여주고 싶었는데, 언제 우리 아기가 이렇게 컸담.”
웃음 섞인 한숨을 내쉬며 쥬엘라 언니도 내게 질문을 던졌다.
“다 잘 풀린다고 치고. 그다음에는 뭐 하고 싶어?”
“음……. 서멘더에 저택이 한 채 있으니까 거기서 살까 해. 그 외에는 그때 가서 생각해 봐야지.”
“어머나. 여기가 아니라?”
“로콰이트는 너무 복잡해. 삼황자님하고도 자꾸 마주치고.”
“흐응.”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나 싶더니 그 사이를 여태 묵묵히 있던 라망드의 목소리가 갈랐다.
“미남 얘기는 왜 안 해?”
“미남?”
“미뉴엘이 이제 잘생긴 남자들을 모으겠다고 하더라고요.”
“야, 라망드!”
라망드, 이놈이! 나는 경악해서 벌떡 일어섰다.
“아, 아니… 그건 그냥, 그냥 장난인데! 농담 몰라?”
뒤늦게 덮으려고 했지만 이미 내 목소리는 뒷전이 된 상태였다. 그리고 우리 언니들은 팩트 폭격기들이었다.
“그래. 우리 막내가 얼굴을 좀 많이 보기는 하지.”
“솔직히 삼황자님 좋아했던 것도 얼굴 때문이었지, 아마?”
놀리는 기색도 없이 담백하게 퍼붓는 사실에 나는 순식간에 너덜너덜해졌다.
‘부, 부끄러워.’
더 견디지 못하고 양손으로 얼굴을 덮어버렸다.
플렌드나 신전에서 자랐으니 아름다운 걸 좋아하는 거야 다들 이해한다지만, 대놓고 ‘미남 수집가가 되겠어!’라고 선언하는 것까지 이해하기는 힘들지 않을까.
부모님이며 언니들, 게다가 작은 형부까지 있는 자리에서 예상치 못하게 폭로를 당하다니.
창피해서 온몸이 다 홧홧했다. 거짓말이 아니라 코끝까지 화끈거리는 것만 같았다.
‘잠깐. 코가?’
아니나 다를까. 심상치 않다고 생각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코피가 주르륵 흘렀다.
“휴. 미뉴엘, 고개 숙여봐.”
라망드가 재빨리 조치해 줬고, 덕분에 그 주제는 덮였지만 순식간에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어서 올라가 쉬어라, 미뉴엘.”
“아니에요. 저 괜찮아요. 아프지도 않고.”
“얼른.”
진짜 괜찮은데. 하지만 이렇게 부모님이 완고하게 말씀하시면 이길 수 없다. 입술을 삐죽이며 일어나는 수밖에.
“언니가 우리 아기의 꿈을 팍팍 지원해 줄게?”
그래도 쥬엘라 언니가 건네는 농담에 웃음이 흘렀다.
“그런데 라망드 사제, 자네는 그래도 괜찮겠나?”
돌연 엘가 언니가 라망드에게 물었다.
나는 무슨 뜻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하는 반면에, 라망드는 찰떡같이 알아들었는지 단호하게 답했다.
“물론입니다.”
* * *
“미뉴엘.”
라망드가 불렀지만 나는 듣지 못한 척 앞만 보며 걸었다.
이 층으로 올라올 때까지 내내 이랬다. 아까 엘가 언니가 던졌던 말의 의미를 알고 싶은데, 그냥 물어보면 라망드는 왠지 답해 줄 것 같지 않았다.
“화났어?”
물론 그 이유도 반 정도는 있었다. 난 정말 창피했다고.
“미안해. 어차피 다들 알게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일렀나 보다.”
“장난이었거든?”
“넌 미인이라면 언제든 진심이잖아.”
“…….”
반박하고 싶은데 사실이라 그럴 수가 없었다.
“덕분에 장난으로 끝내지 말고 꼭 이뤄야겠다고 결심했어. 참 고오맙다.”
마침 방 앞에 도달한 참이었다. 문을 벌컥 열려 했는데 문손잡이를 잡자마자 라망드가 그 위에 손을 얹으며 저지했다.
“화 많이 났네. 사과로 안 풀리면… 내가 어떻게 하면 될까?”
‘이 정도면 됐나.’
나는 웃음기 없는 얼굴로 라망드를 돌아보며 물었다.
“아까 엘가 언니가 한 말, 무슨 뜻이야?”
“응?”
“언니가 너한테 ‘그래도’ 괜찮겠냐고 물어봤잖아. 그거 무슨 뜻이냐고.”
“아…….”
라망드는 잠시 시선을 떨어뜨리며 피식 웃었다.
“그것 때문이었어?”
“그래. 내가 모르는 얘기였잖아.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 아닌가 했다고.”
라망드가 나에 대해 속속들이 아는 것처럼 나도 그에 대해서는 뭐든 알았다.
그런데 몇 달 수도에 와서 함께 있는 시간이 줄었다고 내가 모르는 일이 생겼다는 게 조금 불안했다.
하지만 라망드는 내 코끝을 툭 치며 가벼운 말투로 꾸짖었다.
“혼자 심각하게 굴기는. 난 북부로 다시 돌아가도 괜찮겠냐고 물어보신 줄 알았지.”
“정말?”
“내가 추운 걸 싫어하잖아. 영지 본성은 서멘더보다도 더 위쪽에 있고.”
“…….”
“안 믿어?”
“…믿어.”
뭔가 개운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라망드를 안 믿으면 누굴 믿을까.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라망드는 붙잡았던 손을 놓으며 상체를 숙였다.
“잠시만 이렇게 있자.”
툭, 라망드의 이마가 내 어깨에 닿았다.
‘역시 힘든 일이 있기는 한가 본데.’
내가 라망드에게 의지해 십 년을 보냈듯 그도 마음이 불안할 때면 내게 기대는 게 당연했다.
나는 익숙하게 팔을 들어 라망드의 등을 토닥이며 살살 쓸어내렸다.
“요즘 일이 너무 많았지?”
“내가 능력이 좋은 걸 어쩌겠어.”
“맞아. 우리 라망드, 보양식이라도 해 먹여야 하는데.”
“나 잠 못 자는 꼴 보고 싶어?”
쿡쿡 웃는 소리가 어깨를 통해서 머리로, 가슴으로 울려 퍼졌다.
잠시 그렇게 웃던 라망드는 곧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뉴엘, 모든 일이 끝나서 네가 건강해지면… 나는 필요 없어지는 거지.”
‘이것 때문이었나?’
아무리 친하고 남매처럼 지냈다고 해도 라망드 본인이 생각하는 존재 의의는 전속 치료사였을지도 모른다.
“보모 졸업시켜 달라고 노래를 불러놓고는.”
솔직히 조금 충격받았지만 나는 최대한 그것을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말했잖아. 넌 항상 내 옆에 있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그리고 내가 아프지 않으면 라망드도 좋아하는 사람과 더 편하게 맺어질 수 있겠지.
아무런 걱정 없이.
“라망드.”
“응.”
“너를 위해서라도 힘낼게.”
나는 네게 십 년을 빚진 거나 마찬가지니까.
하지만 착해 빠진 라망드는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바보야… 너를 위해서 해.”
그의 웃음과 한숨이 동시에 가슴께를 간지럽혔다.
“나는 그거면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