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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 영애 집착을 시작합니다 (50)화 (50/130)

50화

에사디엔이 주목했던 것은 라페슈 셀레스테가 마법가를 드나들며 사다 나르는 물건들이었다.

애초에 에사디엔은 자신의 한계를 잘 알았다.

변죽을 울리며 친해져서 뭘 알아내는 능력은 말 그대로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묵묵히 감시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그래서 낮에는 마치 시종처럼 라페슈의 뒤를 따라다니고 밤에는 자작가에 잠입해 단서를 잡으려 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자작은 에사디엔이 들었던 것보다 훨씬 철두철미했다. 읽은 편지는 그 자리에서 불태웠고 서랍마다 자물쇠를 채웠다.

안개 너머의 실체가 보일 듯 보이지 않는 것처럼 지난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보다도 더 이 임무를 힘들게 만드는 것은 그리움이었다.

‘미뉴엘.’

어느새 미뉴엘의 존재는 에사디엔에게 익숙한 안온함으로 자리매김해 있었다.

미뉴엘을 보고 싶어질 때면 에사디엔은 안주머니에 넣어둔 그녀의 편지 위를 가만히 눌렀다.

라페슈 셀레스테의 곁에서 미뉴엘이 생각나지 않는 현상은 고작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서 사라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갈증을 느끼듯 미뉴엘이 보고 싶었다.

‘기다려주겠지.’

그녀가 기다리겠다고 했으니까. 그 말을 그대로 믿었다. 지금은 함께하지 못해도 나중에 설명하면 이해해 줄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던 중 에사디엔의 귀가 번쩍 뜨이는 대화가 들려왔다.

“장갑을 벗지 않는다고?”

“대공저에 드나들면서 이상하다고 생각한 건 그것뿐이에요…….”

‘미뉴엘의 이야기다.’

에사디엔도 미뉴엘이 언제나 장갑을 끼는 것을 기묘하게 여긴 적이 있다.

장갑을 선물 받고 뛸 듯이 기뻐하면서도 그 앞에서 끼기를 거부한 일도 어딘지 걸렸다. 본래 미뉴엘의 성격이라면 당장 착용해 보았을 텐데.

“‘그분’의 말씀대로라면 그것과 접촉한 흔적이 분명 남아 있을 것이다.”

“흔적이요?”

“그래. 문양이든, 점이든!”

‘그분’은 누구이고 ‘그것’은 무엇인지.

답답함은 쌓여만 갔다. 마음 같아서는 마법가에서 그랬듯 기사단을 이끌고 자작의 집무실을 통째로 수색하고 싶었다.

“장갑을 벗고 내게 손을 보여주겠나.”

“그게, 너무 갑작스러워서. 나중에… 나중에요. 지금은…….”

자신을 찾아온 미뉴엘에게 요청한 것도 거부당했다.

자작이 말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야 하는 에사디엔으로서는 마음이 급했지만 당혹스러울 테니 이해하려 했다.

무엇보다도 흥분한 미뉴엘이 피를 철철 흘리는 상황이었다. 차마 더 물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마차 안에 떡하니 자리한 라망드를 본 순간 속에서 뭔가가 울컥 치솟았다.

‘저 사제는 뭐든 알고 있겠군. 장갑 아래 감춘 것까지도.’

그런 생각에 에사디엔은 자신이 느낀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감정적으로 대응했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엄청난 실수였다. 미뉴엘과의 관계와 라페슈에 대한 조사 모두 악화의 일로를 걸었다.

중구난방이던 라페슈의 구입품이 하나로 고정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언제 그랬냐는 듯 구매가 뚝 끊겼다.

더운 지방에서는 자라지 않는 식물, 요시초. 보편적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용도를 확인하는 데도 애를 먹었다.

‘자연의 힘을 복구하는 데 쓴다니.’

오래 경작한 땅의 지력이 떨어졌을 때 심는 식물이라고 했다. 하지만 라페슈가 샀던 것은 그것을 말린 가루.

상점 주인도 가게를 물려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용도는 잘 모르지만 재고를 처리했을 뿐이라는 말만 반복했다.

그런데 그 후로 라페슈는 언제 마법가 따위를 돌아다녔느냐는 듯 사교 모임에만 열심히 참여했다.

“삼황자가 너와 다니는 걸 보면 아예 가망이 없는 건 아니다. 카르이넨과 사이가 멀어지면 이쪽으로 끌어들이자꾸나. ‘그분’은 탐탁지 않아 하셨다만…….”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지만 자작이 라페슈에게 지시하는 것을 들으니 그간의 고생이 헛되지만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숨을 돌린 것도 잠시, 그 때문에 미뉴엘과 또다시 마주쳐 대거리를 해야 했다.

‘기다려준다면 다 이야기할 것을.’

앞으로 조금만 더 견디면 되는데.

기다린다고 약속해 놓고 미뉴엘은 그것을 까맣게 잊은 듯 행동했다. 이래서야 그녀가 말한 사랑 또한… 믿을 수 없는 것은 아닌지.

“나를 좋아했잖아요. 아니, 최소한 호감은 있었잖아요. 아닌가요?”

“모르겠군.”

때문에 그는 미뉴엘의 물음에 명확히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물음에 대해 오래 고민할 짬은 없었다. 성인식 전날, 셀레스테 자작이 요시초밭을 매수했다는 정보가 들어왔기 때문에.

셀레스테 자작은 장원이 없는 수도 귀족이다. 상회만 굴리는 그가 요시초를 밭 단위로 사들이다니.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더는 상황을 지켜보며 몸을 낮추고 있을 수 없었다. 틈을 줬다간 ‘그분’이라는 존재의 지령을 받을 테고, 그 후 흔적이 지워지는 건 순식간이다.

그날 에사디엔은 셀레스테 자작 체포 작전을 세우며 밤을 새웠다.

‘드디어 쓰게 되는군.’

라페슈가 자신이 마실 차에 약을 탄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한참 망설이다 손을 덜덜 떨며 넣는데 눈이 달려 있다면 모를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에사디엔은 자작이 라페슈에게 약을 건네며 지시하는 것을 직접 들었으니까.

‘황자가 빨리 넘어오게 하려면 무슨 수라도 써야지.’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새로 들어온 시종들은 대부분 자작과 끈이 닿았다는 사실도 조사한 뒤였다.

‘더 큰 것이 낚일 줄 알았건만.’

아쉬웠지만 이 건을 더 끌 수는 없었다. 쓸 수 있을 때 내지 못한 패는 결국 버려지는 법.

날이 밝고 기사단에 체포 지시를 내린 에사디엔은 성인식에 참석해 라페슈를 맡기로 했다.

성인식 행사는 남녀가 나뉘어 진행되므로 행사가 끝나자마자 라페슈를 따라잡아 붙들었다.

“자작이 그간 무슨 명령을 내렸지?”

“무슨 말씀이신지…….”

“자작은 조금 전 구금됐다.”

“…….”

“모르겠나? 너는 끈 떨어진 연이나 다름없다. 양녀라는 명목으로 이용당한 사실을 알고 있으니 수사에 도움을 준다면 선처하겠다.”

라페슈는 어두운 표정으로 말할 듯 말 듯 망설이다가 결국 손을 들었다.

“이 바로 위층이 제 대기실입니다. 한 시간 뒤에 그리로 오세요. 아는 건 전부 말씀드리겠습니다.”

한 시간 뒤라. 묘하게 구체적인 시간이 거슬렸지만 입구마다 기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젊은 영애가 나가면 보고하라고 이르면 될 거라 생각한 에사디엔은 승낙했다.

그리고 한 시간 뒤.

에사디엔은 라페슈의 모습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오셨군요. 끈 좀 조여주시겠어요? 하녀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네요.”

그녀는 속옷 위에 코르셋만 덜렁 걸친 차림이었다.

“지금…….”

“거부하시면 말씀드리지 않겠어요.”

“감히 황족을 우롱하는군. 선처를 바라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지.”

희롱하려는 것이 뻔해 나가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이리 온, 나의 디엔.”

발걸음이 뚝 멈췄다. 에사디엔의 눈이 더 이상 커지지 않을 정도로 벌어졌다.

그건 죽은 마야 폐황녀의 말투였다.

“라페슈 셀레스테, 네가 어떻게?”

어머니와 똑같이 생긴 얼굴이 새삼스럽게 눈에 박혔다.

돌아올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는 표정은 한순간에 당황을 분노로 뒤바꾸었다.

“말해라. 누가 사주했는지. 당장!”

라페슈가 코르셋 차림이든, 아무것도 입지 않았든 상관없어졌다. 한 줌밖에 되지 않는 목을 쥐고 추궁했지만 라페슈는 입을 열지 않았다.

도리어 원하는 대로 하라는 듯 몸에 힘을 빼며 내맡기는 행태에 에사디엔은 눈이 돌아갈 것만 같았다.

목을 쥔 손에 점점 더 세게 힘이 들어가는데도 나온 말이라고는…….

“미뉴엘 님!”

뭐?

뜬금없이 튀어나온 이름에, 처음에는 미뉴엘이 시켰다는 줄 알고 가슴이 다시 한번 철렁했다.

하지만 어느새 뜨인 라페슈의 눈은 명백히 에사디엔의 등 뒤에 박혀 있었다.

“미뉴엘이라고?”

돌아본 그 순간부터 시간이 천천히 흐르기 시작했다.

커다래진 하늘빛 눈망울이 쏟아질 듯 일렁거리다가 차갑게 굳어가는 모습.

눈이 얼어붙은 그대로 입꼬리만 살벌하게 올라가는 모습.

그리고 그가 선물한 장갑을 벗어 마치 결투를 신청하듯 내던지는 모습.

모든 것이 낱낱이 뇌리에 박혔다.

“응. 너 아웃.”

뜻을 알 수 없는 말보다, 장갑으로 뺨을 맞은 충격보다 스치듯 보였던 미뉴엘의 흉터가 더 아팠다.

손바닥 아래의 아주 오래된 화상 자국.

그녀가 장갑을 고집했던 건 저것을 가리기 위해서였으리라. 그런데 자신은…….

뭔가가 우르르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주변을 둘러보니 환청이었다.

정신을 수습해 보니 어느새 미뉴엘은 사라진 뒤였고 라페슈는 주저앉은 채 지친 얼굴로 그를 비웃고 있었다.

“그러게 노선을 확실히 하셨어야죠, 황자님.”

그 말에 확실한 마음을 묻던 미뉴엘의 목소리가 겹치듯이 떠올랐다.

“나는…….”

에사디엔은 아직도 충격을 떨치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단 하나, 미뉴엘을 이대로 보내면 안 된다는 생각만큼은 선명했다.

그 생각 하나만으로 일어서 마음을 다잡았건만, 연회장에서 다시 만난 미뉴엘은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내게… 사랑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랬죠.”

“변하지 않을 거라고 하지 않았던가?”

“와인도 코르크가 열린 채 두면 변하는 법이랍니다.”

그 말에 에사디엔은 명백하게 배신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 사실에 그는 굉장한 충격을 받았다.

‘미뉴엘은 나를 기다릴 것이다. 사랑한다고 했으니까.’

은연중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즉… 그는 믿지 않는다고 발버둥 치던 감정에 저도 모르는 사이에 물들어 의지하고 있었다.

시종들마저 연행되어 휑뎅그렁해진 궁에서 홀로 자괴감에 빠져 있던 그를 건진 것은 카르이넨 가문에서 날아온 파혼장이었다.

현실이 종이 한 장의 형태로 눈앞에 날아들었다.

‘미뉴엘이, 정말로 나를.’

놓아버렸다.

마침내 에사디엔은 인정해야만 했다.

은혜를 갚기 위해 감내한 약혼? 약하고 작은 사람이 안겨드는 걸 차마 거부할 수 없었다?

전부 스스로의 감정을 외면한 변명이었다.

“잃고 싶지 않아.”

억지로 만나는 약혼녀에게 그렇게 끌릴 리가 없지 않은가. 그토록 그리울 리 없지 않은가.

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고 재채기하던 모습도 사랑스럽다고 느낀 주제에.

미뉴엘의 곁에 붙은 사제를 질투하는 주제에!

한때는 부담스럽게만 여겼던 미뉴엘의 ‘좋아한다’는 말은 메마른 땅을 적시듯 그의 안에 스며들어 있었다.

“사랑…….”

에사디엔은 침대 대신 진녹색의 긴 의자에 누워 미뉴엘이 마음을 담아 선물했던 태피스트리를 매만지며 읊조렸다.

이 의자는 미뉴엘이 날아들었던 날들의 증거였다.

라페슈가 드나들게 되면서 미뉴엘의 자리에 앉는 것이 묘하게 불쾌해 침실로 들인 지 오래.

파혼장을 받은 후로는 침대보다 이 의자에서 자는 날이 더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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