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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 영애 집착을 시작합니다 (51)화 (51/130)

51화

“사랑.”

에사디엔은 그 말을 입 속으로 굴리며 다짐했다.

무릎을 꿇고 제대로 고백하겠다고. 미뉴엘이 전부 보여줬던 만큼 나도 내 마음을 다 보여주겠다고.

하지만 고백까지는 요원하기만 했다.

우선 그는 미뉴엘의 머리칼 한 올조차 볼 수 없었다. 카르이넨 대공저의 문이 굳게 닫혀 열리지 않았으므로.

“언제건 카르이넨의 문이 열려 있을 거라 하지 않았나.”

에사디엔이 대문 앞에 떡 버티고 서 있기를 하루,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대공의 부군은 미뉴엘과 똑 닮은 얼굴로 싸늘하게 말했다.

“그때는 미뉴엘의 마음이 황자님께 열려 있을 때였습니다.”

황태자의 도움을 받아 겨우겨우 미뉴엘을 만난 뒤에도 문제는 여전했다.

마음을 다 보여주겠다고 다짐했지만 평생 감정을 누르기만 했으니 드러내는 게 너무 힘들었다.

보일 필요가 없는 것은 너무 강하게 튀어 나가고, 정작 보여야 할 것을 보이지 못한 탓에 미뉴엘에게 미친 자 취급까지 받았다.

겨우 아니라고 해명한 뒤에도, 그녀를 도우며 분위기가 조금 부드러워졌을 때에도 사랑한다는 말만 골라서 마개로 틀어막힌 것처럼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그런 스스로가 점점 더 싫어졌다.

어떻게든 미뉴엘이 원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데 연기일 뿐이라는 꾸짖음만 따끔할 정도로 들었다.

“어떻게 해야…….”

세상에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기분은 오랜만이었다.

미뉴엘은 그에게 이것 또한 지나갈 것이라고 했지만 그는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이미 각인된 사랑은 절대로 흐려지지 않는다는 걸.

말라 죽을지언정 다른 애정으로 채울 수도 없는 지독한 감정이었다.

* * *

북쪽 경계 산맥에서 일어난 눈사태의 영향으로 몬스터들이 예년보다 빠르게 활동을 시작했다.

어머니와 엘가 언니는 먼저 영지로 돌아가 기사단을 지휘하기로 했고, 나와 라망드는 아버지가 남은 일을 처리한 뒤 함께 떠나기로 했다.

그리고 어머니는 내게 한 가지 부탁을 하셨다.

‘내 오랜 친우인 데오네 후작 부인이 이번에 손녀를 얻어 티 파티를 연다고 하더구나.’

거기에 참석해서 선물을 전해 달라는 지령이었다.

나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쥬엘라 언니는 너무 바쁘니까 내가 가는 게 당연했다.

어머니를 대신해 참석한 티 파티는 굉장히 차분했다. 이게 바로 고아한 귀부인들의 모임이구나, 싶은 분위기랄까.

게다가 후작 부인이 어머니와 친구라 다들 내게 우호적이어서 마음 편안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셀레스테 자작이 옥에서 목을 맸다지요?”

“어머, 저는 독을 먹었다고 들었는데요.”

“아들들이 상회를 하나씩 나눠 가지던데. 따로 운영하려 하나 봅니다.”

“과연 현명한 선택일지 모르겠군요. 저는 조만간 투자금을 빼려고 해요.”

옆 테이블에서 희미하게 들리는 소리가 조용히 차를 마시던 내 주의를 끌었다.

‘자작이 갑자기 죽었다고?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더군다나 ‘옥에서’라니.

눈에 뵈는 게 없는 것처럼 달려들던 라페슈가 떠올랐다. 양아버지가 구속되면서 집안에서 입지가 좁아져 그랬던 걸까.

그러나 라페슈에 대한 생각은 곧 후작 부인의 손녀가 모습을 드러내자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앙증맞은 아기 옷에 아기용 보닛까지 쓰고 작은 손을 꼬옥 야무지게 움켜쥔 채 입을 오물오물하는 모습이 천사나 다름없었다.

“너무 예뻐요…….”

감동해서 몸을 바르르 떠는 내 모습에 주변의 귀부인들이 기품 있는 웃음을 지었다.

“대공께도 얼른 예쁜 손주가 찾아와야 할 텐데요.”

“좋은 짝 만나길 바라요, 대공녀.”

“가, 감사합니다.”

덕담을 들으며 난감하게 웃던 중, 집사가 들어와 후작 부인에게 귓속말을 건네는 모습이 보였다. 그것을 들으며 내게 잠시 닿았던 후작 부인의 시선에는 당혹스러움이 묻어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관록 있는 귀부인답게 곧 수습하고 참석자들에게 간결히 사실을 전달했다.

“영광스럽게도 제 손녀를 위해 특별한 손님께서 오셨다고 합니다.”

특별한 손님? 티 파티 중간에 초대장도 없이 이런 식으로 찾아오는 건 난입이나 다름없었다.

훈훈했던 분위기에 작은 술렁임이 퍼졌다.

“이런 무례라니. 대체 누굴까요?”

귀부인들의 궁금증이 오래가지 않아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 무뢰한은 금방 모습을 드러냈다.

“세상에…….”

내가 입을 떡 벌린 사이 귀부인들은 놀란 속내를 감추고 인사를 했다.

“황자님을 뵙습니다.”

“…뵙습니다.”

나도 얼른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에사디엔은 생각보다 멀쩡히 후작 부인에게 선물을 건네고 그녀의 안내를 순순히 따랐다.

후작 부인은 날 배려해 내 시야에서 보이지 않는 뒤쪽 테이블에 에사디엔을 앉혀주었다.

‘무시하자, 무시. 알은척하면 지는 거야.’

지난번에 그랬듯이 최선을 다하면 무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무시무시할 정도로 집요한 시선이 내 뒤통수를 뚫을 듯 꽂히기 전까지는.

‘무시해야 하는데.’

자꾸만 신경이 뒤쪽으로 쏠렸다.

밝은색으로 치장한 귀부인들 사이에서 혼자 시커먼 정장을 입은 채, 다른 사람들보다 키가 커서 그의 머리만 불쑥 솟아 있을 모습이 안 봐도 눈앞에 훤했다.

게다가 에사디엔의 시선보다 문제인 건, 후작 부인과 손녀를 향한 관심이 흩어지고 그와 나 사이에 벌어질 일을 기대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이대로 자리를 지키는 게 더 민폐겠다.’

마른세수라도 하고 싶은 마음을 애써 누르고 후작 부인에게 양해를 구했다.

“아무래도 저는 먼저 일어서야겠습니다. 본의 아니게 분위기를 흐려 대단히 죄송합니다.”

“영애 잘못이 아니랍니다. 제대로 본때를 보여주세요.”

보, 본때? 나는 또 한 번 애매하게 웃었다. 대체 귀부인들 사이에 우리 일이 어떤 식으로 퍼져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당황스러웠지만 후의에 감사하며 자리를 떴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에사디엔도 나를 따라 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예상한 바였는데도 속이 부글부글 끓어 서둘러 포션 뚜껑을 따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비단 에사디엔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이런 상황까지 온 건, 그래. 솔직히 말해서 내가 그에게 흔들렸기 때문이니까. 밀어내고 외면하면서도 자꾸만 다시 돌아보았다.

‘황자님하고 다시 가까워진 것 같네.’

오죽하면 라망드도 그렇게 말했을까.

이래서는 안 됐다. 차라리 우리 아버지처럼 애초에 만나는 것부터 차단해 버릴 것을.

나는 몸을 확 돌리며 마차 앞까지 따라온 에사디엔을 노려봤다.

“저하고 얘기 좀 해요.”

어두웠던 에사디엔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그가 마치 아이처럼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황자궁으로 가겠나?”

“어디든 가요. 사람 없는 데로.”

오늘이야말로 못된 짓을 할 것 같으니까.

‘소리라도 지르려면 사람이 없는 게 낫지.’

나는 후, 하고 짧게 한숨을 쉬며 마음을 다잡았다. 에사디엔이 에스코트하려 손을 내밀었지만, 나는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재빨리 돌아섰다.

* * *

오랜만에 방문한 황자궁은 또다시 분위기가 바뀌어 있었다.

눈에 익은 가구들이 돌아왔고 시종들은 또다시 모르는 사람으로 교체된 상태였다.

그런데…….

‘윽. 단내.’

테이블 위에 가득 차려진 디저트를 보자 얼굴이 굳었다.

그러나 에사디엔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설렘이 드러난 표정 그대로 내게 자리를 권하고는 은근슬쩍 옆에 앉으려 했다.

“저쪽으로 가시죠?”

그제야 조금 시무룩해진 에사디엔이 맞은편에 앉아 입을 열었다.

“북부로 갈 거라 들었다, 미뉴엘.”

“그걸 어디서…….”

반문하려다 그만두었다. 물어 무엇하겠나? 답이야 정해져 있는걸.

‘테오도르!’

이 배신자. 얼마 전 테오도르와 르네 모두 로콰이트를 떠날 시기가 맞물려 함께 자리를 가진 적이 있다.

딱 한 번, 거기서만 말했을 뿐인데……. 그걸 바로 에사디엔한테 알려줘?

“나도 함께 가겠다. 그대를 지키는 검으로써.”

이 양반이 지금 뭐라는 거야. 이황자도 불의 교단하고 얽힌 게 유력한 마당에.

“파혼한 사이에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그리고 저는 가문의 기사들을 믿어요. 다른 검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파혼하지 않았다, 미뉴엘.”

그거야 본인이 계속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 나온 김에 잘됐네요. 이제 질질 끄는 것 그만두고 오늘이야말로 마무리해야겠어요.”

“미뉴엘.”

“죄송한데요, 황자님. 저희가 서로 이름 부를 사이는 아니잖아요. 불쾌하니까 자제해 주시죠.”

“파혼하지 않은 이상… 그대는 내 사람이다.”

뭔가를 억누르는 듯한 목소리가 절절했다.

하지만 우리는 달라도 너무 다른 유형의 사람들이었다. 외모가 마음에 든다고 내 입맛대로 사람을 바꾸는 것도 못 할 짓이다.

파혼을 결심한 후에야 그 간단한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껏 몇 번이고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한 것도 헛수고였다고 생각하니 정말이지 분노가 차올랐다.

“아, 정말!”

테이블을 쾅 내리치자 디저트 플레이트들이 덜그럭거렸다.

“무르자고요. 황자님 같은 분하고는 결혼이고 뭐고, 지금 얼굴을 맞대고 있는 이 순간도 싫다고요. 파혼해요! 파혼! 파! 혼!”

“거절한다.”

소리만 지르지 않았다 뿐이지, 에사디엔도 나만큼이나 단호한 태도였다. 하지만 옆으로 흘러내린 내 머리카락을 넘겨주는 그의 손끝은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간극이 나를 더 열받게 했다.

‘아, 혈압.’

“저, 황태자 전하께 이황자님이 벌인 일에 대해서 말씀드렸어요.”

“그걸 말했다고?”

“그래요. 아직도 암살자를 보낸다고 말씀드렸어요.”

비밀로 두기로 한 일이었다.

그것마저 깨버렸으니 나는 에사디엔이 화를 낼 줄 알았다. 더불어 남은 정도 떨어지면 금상첨화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 예상과는 반응이 매우 달랐다.

“날… 많이 걱정해 줬군.”

‘왜 감격하는 건데!’

나는 헛숨을 토해 내며 말했다.

“전혀 아니니까 이제 놓으시라고요. 어차피 우리 가문을 방패로 쓰려고 한 거잖아요.”

“그런 게 아니다.”

“그럼 대체 뭔데요!”

“…….”

나불나불 잘만 대답하던 에사디엔이 불현듯 시선을 내리깔았다.

‘아, 내 혈압!’

목덜미를 잡으며 잠시 눈을 감았다.

‘이너 피스, 이너 피스…….’

가까스로 마음을 안정시키고 눈을 떴을 때는 에사디엔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플렌드나의 찬란한 역작.

그런 수식어가 아깝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미인의 박력에 잠시 멈칫한 사이, 아래위 비율마저 완벽한 입술이 열리며 폭탄을 투하했다.

“좋아해.”

…넹?

“그대를 사랑한다. 내가 너무 늦게 깨달았어.”

어안이 벙벙했다.

한때는 바라 마지않았던 말을 들은 충격에 말문이 막힌 사이 에사디엔은 참았던 것을 모두 쏟아붓듯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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