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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 영애 집착을 시작합니다 (52)화 (52/130)

52화

“그대가 나를 길들였다. 이제 그대 없는 삶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그러니 나를 버리지 말고… 한 번만 다시 받아주면 안 되겠나.”

애절하게 일렁이는 눈빛에 순간 흔들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아냐! 미뉴엘 카르이넨.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다. 정신 차려!’

내가 안 먹는 것만 골라 차려놓은 정성을 봐서라도 이대로 넘어가서는 안 된다.

“마차 떠났거든요? 어이없어, 진짜!”

잊지 말자. 몇 번이나 매달리는 날 떼어낸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이 사람이었다.

“그동안 더러웠고, 부탁이니까 연락이고 뭐고 두 번 다시는 보지 맙시다.”

나는 그대로 일어나 떠나려고 했다. 에사디엔의 손에 드레스 끝자락이 붙들리지만 않았다면.

“미뉴엘… 제발.”

대체 이 황자의 무릎은 왜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땅에 닿는 건지.

돌아보며 내쉬려던 한숨이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목에서 턱 걸렸다.

‘우, 울어? 우는 거야?’

에사디엔의 눈에서 정말 유리구슬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차마 닭똥이라고는 하지 못할 만큼 투명하고 커다란 눈물방울이었다.

“일어나요. 닦으세요.”

손수건을 내밀었지만 에사디엔의 눈은 더 글썽거리기만 할 따름이었다.

“미뉴엘, 미뉴엘…….”

“으으, 진짜.”

구명줄을 잡듯 매달려오는 덩치를 밀어내기에는 내가 너무 힘이 없었다.

한숨을 푹 내쉬며 몸에서 힘을 빼자 에사디엔은 안심한 듯 내 어깨에 얼굴을 살짝 부볐다.

‘돌겠네. 내 드레스가 손수건이냐.’

에사디엔은 좀처럼 나를 놔줄 기색이 아니었다.

한때는 그가 호수처럼 차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다. 하지만 아니었다. 애써 누르고 있었을 뿐 그의 본성은 앞만 보는 경주마 같았다.

‘이걸 어쩐다.’

잠시 고민했지만 결국 답은 하나였다. 나는 또다시 악역이 되어야만 했다.

“에사디엔.”

오랜만에 불러보는 이름이 어색했다.

하지만 효과는 굉장해서 에사디엔은 눈물을 그치고 시선을 맞췄다.

“이대로 우리가 약혼을 유지할 수도 있겠죠. 그러다가 결혼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대만 괜찮다면 당장 내일 결혼해도 좋다.”

괜찮겠냐?

‘하여간 이 사람은…….’

나는 울컥하려는 걸 애써 참아내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 관계를 이어갈수록 당신은 보답받지 못하는 마음 때문에 상처받을 뿐이에요.”

인생이란 묘한 것이었다. 언젠가 에사디엔이 했던 말을 차례로 모두 그에게 돌려주게 되는 걸 보면.

“아니다. 나는 그대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바보 같은 소리. 내가 다 겪어봐서 하는 말인데.

결국 말로는 안 될 사람이었다.

나는 에사디엔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며 잡아당겼다. 입술 위로 많이 거칠어진 그의 입술이 느껴졌다.

움찔하며 굳은 것도 잠시. 에사디엔은 둑이 터지듯 열렬하게 반응해 왔다.

“미뉴엘. 하아, 미뉴엘.”

그리고 에사디엔이 나를 몸속에 집어넣으려는 것처럼 세게 껴안았을 때, 나는 그의 얼굴을 떼어내고 눈을 마주치며 똑똑히 말했다.

“역시 아무것도 안 느껴져요.”

“…….”

열기에 들떴던 푸른 눈동자는 무너지는 마음을 투명하게 드러냈다.

눈에서 시작된 아픔은 눈썹으로, 뺨으로, 파르르 떨리는 입술로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그래도 괜찮다. 나는 그래도 괜찮으니까…….”

에사디엔은 금방 표정을 수습하고 그렇게 말했지만 상처에서 피가 흐르듯 목소리에서 고통이 묻어 나오는 것까지는 막지 못했다.

‘정말, 바보 같으니라고…….’

성인식 연회에서 면박을 줬을 때는 속이 시원하기라도 했지.

이번에는 너무나… 마음이 좋지 않았다.

* * *

“내가 괜찮지 않아요. 그러니 이만 안녕히.”

마음을 다해 매달렸지만 결국 미뉴엘은 차갑게 떠나 버렸다.

그녀가 눈앞에 없는데도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미뉴엘, 나는 도무지 어떻게 해야…….”

홀로 남은 에사디엔은 미뉴엘이 내던진 장갑에 입술을 묻고 울었다.

이제 그녀의 체향이 남은 것이라고는 이것뿐이다.

얼마나 애용했던지 천이 조금 얇아진 손가락 끝부분이며 아주 살짝 튀어나온 실밥을 보자 눈물이 더욱 솟구쳤다.

그리고 그 밑에 가려졌을 화상 자국을 생각하니 더욱더.

“…….”

소리도 내지 않고 우는 모습은 서럽기 그지없었다.

언제나 단정하게 올리고 다니던 머리는 엉망으로 흐트러진 상태였지만 에사디엔은 전혀 깨닫지 못했다.

‘이제는 만나지 못하겠지. 이제는…….’

두 번 다시 보지 못할 거라면 차라리 이별 선물로 심장을 꺼내주고 싶었다. 그러면 영원히 이런 아픔은 느끼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겠지.

그러나 차마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먼 발치에서나마 다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실낱같은 희망 때문이었다.

그 희망에 매달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런 자신을 비웃으며 에사디엔은 짧게 종을 흔들었다.

“술을 가져와라.”

흔한 도피였다.

삼황자가 폐인이 되었다는 소문은 빨리도 퍼졌다. 에사디엔은 머리 색을 감출 생각도 없이 신사 클럽이며 술집을 드나들었다.

그렇다고 누구와 대화를 하는 것도 아니고 자신을 망가뜨리려고 작정한 사람처럼 술만 퍼마시고 있었다.

“파혼당해서 제정신이 아니라더군.”

“고작 여자 때문에 저 난리란 말인가?”

“미모 하나는 끝내주더군.”

“어린애 같아서 나는 썩 동하지 않던데. 자고로 여자란 풍만해야… 커헉!”

헛소리를 지껄이던 무리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거칠게 내동댕이쳐졌다.

“자고로… 쓸모없이 낭비하는 혀는 자르는 게 낫지.”

“으, 으아아악!”

에사디엔이 내지른 발길질 한 번에 헛소리를 지껄이던 놈의 정강이뼈가 부러졌다.

지금만큼은 주위에서 말을 걸어도 무시하고 술만 마시던 썩은 동태눈의 황자가 아니었다.

광인처럼 번들거리는 눈빛에 겁을 먹고 덜덜 떠는 그들을 구한 건 황실 기사단 로열 가드의 기사들이었다.

“이만 돌아가시지요, 황자님.”

“또 누님께서 보내셨나.”

지금껏 뭐 하나 바라는 것 없이 살던 에사디엔이 뒤늦게 큰 열병을 앓는 것을 아는 탓에 황제와 황태자는 그저 침묵했다.

방황이 끝나고 언젠가는 돌아오려니, 그렇게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사디엔은 그들의 기다림을 배반하고 감쪽같이 사라졌다.

“황자님께서 어딜 가셨지? 황자님, 황자님!”

에사디엔은 짜증스럽게 눈을 떴다.

어젯밤에는 황자궁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진탕 마셔댔다. 때문에 머리가 깨질 듯이 지끈거리고 있었는데 시종이 떠드는 소리에 두통은 더욱 심해지기만 했다.

‘일부러 저러는 것인가.’

이제는 시종에게마저 괄시받는 신세가 된 것인가, 싶었다.

그야 이렇게 코앞에서 외치고 있으면서 그를 발견하지 못하는 건 말이 안 되니까.

“망할…….”

두통과 짜증이 뒤섞여 평소에는 쓰지 않는 욕설이 절로 흘러나왔다.

아니, 그러니까 그 말을 내뱉으려고 했다.

정작 튀어나온 것은 ‘하악’ 하는 날카로운 숨소리였지만.

“……?!”

그나마도 사람의 숨소리도 아니고 짐승의 것에 가까웠다. 가물가물하던 눈이 번쩍 뜨였다.

동시에 몸이 움찔한 탓에 에사디엔의 전신을 덮고 있던 이불이 바스락거렸다. 바로 앞에 있던 시종이 그것을 놓칠 리 없었다.

“어……?”

이불을 확 걷어내는 서슬에 에사디엔은 더더욱 불쾌해졌다.

‘감히.’

대거리를 하려던 그가 멈칫한 것은 과도하게 놀라는 시종의 모습 때문이었다.

“어어어어? 고양이?”

처음에는 여기 어디에 고양이가 있나 싶었다.

그러나 시종은 정확히 에사디엔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친 것인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귀가 쫑긋 서는 것이 느껴졌다.

‘쫑…긋?’

사람의 귀는 짐승처럼 쫑긋거리지 않는다.

더듬더듬 귀를 만져보려 했지만 손은 얼굴 옆이 아니라 머리 귀퉁이 부분으로 올라갔다.

더군다나 손을 올렸다기보다는 뭉툭한 것을 텁 갖다 댄 느낌에 가까웠다. 그제야 손바닥을 들여다보자 검고 둥근 발바닥이 눈에 들어왔다.

“……!”

혼자 놀라 귀며 꼬리를 바짝 세우는 짐승을 보며 시종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고양이가 맞나?”

딱히 고양이 애호가는 아니었지만 이 녀석은 보통 보던 고양이들과는 어딘가 달랐다.

그건 에사디엔의 생각과도 같았다.

전에 고양이는 무슨 색을 못 본다고 들었는데, 지금 그는 평소와 똑같이 세상을 보고 있었다.

…조금 시야가 넓어진 것 같기는 했지만.

“읏차. 너, 황자님께서 데려오신 거니? 황자님은 어디 계셔?”

하지만 현실을 더 부정할 수도 없었다.

시종은 에사디엔을 양손으로 번쩍 들어 올렸고, 그의 눈 안에 비친 것은 영락없이 고양잇과 짐승의 모습이었으니까.

‘이것 놓아라!’

분명 그냥 팔, 아니 앞발을 휘저어 빠져나오려고 했을 뿐인데 날카로운 발톱이 튀어나왔다.

엇, 하고 놀랄 겨를도 없이 예리한 발톱은 시종의 팔을 깊게 긁고 지나갔다.

“아악!”

시종은 깜짝 놀라 에사디엔을 떨어뜨렸다. 놀라운 반사 신경으로 착지한 에사디엔은 그의 팔에서 피가 흐르는 것을 보고 놀란 동시에 미안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너, 이리 와!”

이불 채로 붙잡아 가둬두려는 시종의 행태에 괘씸해진 에사디엔은 또 하나의 상처를 선물한 후 냅다 도망쳤다.

‘하아.’

이게 대체 무슨 일인고?

연못의 물을 찹찹 마신 에사디엔은 잠시 후 파동이 잦아든 수면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처음에는 네 발을 쓰는 것도 어색해서 도망치면서도 몇 번이나 굴렀는지 모른다.

가까스로 자연스러운 걸음걸이를 터득한 후에는 목이 마르지만 연못 물을 마셔야 한다는 데 대한 거부감을 다스리느라 고생했고.

‘저주라도 받은 것인가?’

문득 그런 생각이 스치는 것과 동시에 어젯밤의 기억이 떠올랐다.

불쾌하기 짝이 없는 선물이 도착했던 날. 선물의 발신인은 이황자였다.

[네가 요즘 술을 즐긴다 하여 보낸다. 조만간 제국으로 들어갈 테니 함께 마셔보자꾸나.]

짧은 편지와 함께 보내온 것은 치트룸의 독주로 유명한 술이었다.

“하.”

에사디엔이 아무리 폐인이 되었을지언정 이황자가 보낸 것을 마실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당장 그 술병을 벽에 내던져 박살 냈다. 피처럼 섬뜩한 색깔의 술이 벽지를 물들이는 모습을 지켜보며 또 물처럼 술을 마시기를 얼마간.

“하……. 또 떨어졌나.”

진열장을 열었지만 비틀거린 탓에 남은 술병들이 모두 떨어져 깨져버렸다.

남은 것이라고는 한 손에 잡히는 작은 유리병뿐.

그게 무엇인지 에사디엔은 기억했다.

“여기에 뒀던가?”

북쪽 마법가에서 정체 모를 할멈이 주었던… ‘사랑의 묘약’.

‘백 일 동안 하루에 한 방울씩 마시면 사랑이 이루어질 테니까.’

코웃음 치면서도 에사디엔은 그 병의 뚜껑을 땄다.

이걸 가져온 후 왕실 마법사에게도 보였지만 별다른 마법적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다. 도리어 마법 약이 맞느냐고 묻기까지 했다.

‘그때는 그럼 그렇지, 하고 잊었지만…….’

다시 이렇게 그의 손에 들어왔다. 하필이면 이런 때에, 노린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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