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하하.”
이런 것을 마시려는 자신을 믿을 수 없었지만, 마치 병에 ‘Drink me!’라고 쓰인 듯 유혹적이기만 했다.
결국 에사디엔은 투명한 액체를 입 안으로 쏟아부었다.
물론 노파의 경고는 깡그리 무시한 채였다.
‘단, 한 방울보다 더 많이 마시면 부작용이 있으니 잊지 말고.’
미뉴엘에게 버림받은 이 상황보다 더 나빠질 수는 없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고는 단번에 삼켰더랬다.
설마하니 이런 부작용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한 채.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놓쳐버린 사랑에 미친 황자는 다시 한번 미뉴엘을 떠올렸다.
‘이 모습이라면 미뉴엘이 거부하지 않겠지.’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아무리 상처받아도 괜찮다던 말은 진심이었다. 그러니까 짐승의 모습으로라도 미뉴엘을 찾아가야 했다.
벌떡 일어선 에사디엔의 머리에는 이 저주, 혹은 부작용을 풀어야 한다는 생각은 한 톨도 없었다.
하지만 눈 감고도 찾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카르이넨 대공가로 가는 길은 험난하기만 했다.
우선 황성에서 빠져나가는 것부터 문제였다.
인간일 때도 높았던 성벽인데 짐승이 된 지금은 말해 무엇할까.
그렇게 한참 성벽을 따라 뱅뱅 돌다가 개구멍을 발견한 건 그야말로 천운이었다.
‘후우…….’
이제 겨우 황성 바깥으로 발을 내디뎠을 뿐인데 에사디엔은 지쳐버렸다.
허기진 탓에 쓰린 속까지 그를 괴롭혔지만 일 초라도 빨리 미뉴엘을 볼 생각뿐이었다.
‘이쪽은… 황성 북문 쪽인가.’
에사디엔은 방향을 가늠하고 힘껏 달려나갔다.
그런 그를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눈으로 지켜보는 존재들이 있었다.
* * *
에사디엔 로콰이트, 삼황자가 사라졌다!
흥미로운 소식이기는 했으나 라페슈는 급변하는 상황에 떠밀려가지 않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호구인 줄 알고 잡았던 셀레스테 자작은 호구는커녕 호인도 아니었다.
라페슈가 황실 시녀로 드나들게 되자 황태자에게 줄을 댈 테니 자리를 주선해 보라고 하지를 않나.
독극물 사건도 실은 자작이 시킨 일이었다.
‘다음에 황자와 함께 차를 마실 때는 네 잔에 이걸 넣으려무나.’
‘…….’
‘걱정하지 말아라. 가벼운 복통만 일으키고 말 테니.’
‘하지만, 그 정도라면 어째서…….’
‘너는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
그 순간 자작의 얼굴에서는 평소 알던 호인의 모습이 싹 지워져 있었다.
차가운 눈빛에 눌려 마지못해 일을 저질렀지만 라페슈는 원래 제 몸 아끼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이다.
그런 그녀에게 자작은 자해 공갈범, 아니 사주범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라페슈는 이를 갈았다.
‘성인식 때 일만 끝내면 동부 별장으로 보내주겠다고 해놓고 죽어버릴 게 뭐람.’
그래도 자해 사주범이 없어져서 숨통이 트이는가 했더니 이번에는 자작의 뒤를 이은 아들들이 라페슈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었다.
“대체 매달 드레스며 구두를 얼마나 사대는 게냐? 별장으로 보내줘? 생활비는 누구 주머니에서 나오는데? 네 옷 팔아서 가든지.”
한 놈은 구두쇠.
“아버지께 무안당할 때 네가 웃은 것, 기억하고 있다.”
한 놈은 좀생이.
“우리 막내, 애인 없으면 오빠랑 결혼할까? 넝담~”
한 놈은 역겨운 호색한이었다.
‘빨리 대마법사를 만나서 이 집안에서 빠져나가야만 해.’
그런데 그마저도 불발로 그쳤다.
“나는 이미 제자가 있어서 말일세.”
대마법사의 제자. 마땅히 라페슈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했던 자리에 떡하니 선객이 있었다. 그것도 미뉴엘이 후원한다는 아이였다.
라페슈는 세상이 온통 미뉴엘의 이름이 쓰인 벽으로 가둬진 것 같았다.
에사디엔도, 테오도르도, 황제와 황태자도 모조리 미뉴엘 카르이넨에게 빠져들었다.
그런데 이제는 대마법사의 첫 제자라는 타이틀까지 자신의 사람에게 쥐여주었다.
무슨 수를 썼기에.
‘대체 그 계집애가 뭐라고!’
그래도 에사디엔의 실종으로 좋아진 점이 하나는 있었다. 사교계에서 라페슈에 대한 동정 여론이 생겼기 때문이다.
“황자님과 카르이넨 막내 공녀의 사랑싸움에 이용당한 거잖아요. 불쌍해요.”
“파혼한 것 아니었나요?”
“글쎄 황자님이 끝까지 파혼 동의서에 서명하지 않으셨다지 뭔가요.”
라페슈는 자존심이 상했지만 동정으로라도 평판이 조금 나아지면 그것으로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도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데오네 후작 부인을 위시한 귀부인층이나 갓 사교계에 데뷔한 영애들이 라페슈를 탐탁지 않게 여긴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오랜만에 프레세리아 제국 땅을 밟은 이황자의 등장이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미움을 받아 적국에서 자란 비운의 황자, 오스틴 로콰이트.
“그런데도 훌륭하게 자라셔서 이제는 프레세리아의 대사로 계시잖아요. 얼마나 대단한가요.”
멋모르는 사람들은 그렇게 칭송했지만 그가 얼마나 독종인지 조금이라도 안다면 쓴웃음만 베어 물었다.
문제는 멋모르는 사람이 훨씬 많다는 점이었다.
“그래. 황자는 또 있었어!”
라페슈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듣기로 이황자는 만나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라페슈에게도 아직 기회는 있다는 뜻이었다.
“보통 이런 사람에게 계약 결혼이라는 걸 제안하는 거겠지?”
라페슈가 봤던 계약 결혼 커플은 모두 행복해졌다.
게다가 이황자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니 계약으로 거리를 두는 건 참 좋은 생각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기회가 있다는 뜻이 곧 이황자를 만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오스틴이 참석한 연회는 언제나 인산인해였고 라페슈는 항상 면봉만 한 그의 모습을 바라보다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대체 그놈의 기회는 언제 잡을 수 있는 거냐? 우리 재산이 거덜 나면?”
“너는 네 얼굴을 너무 믿는 경향이 있어.”
“우리 막내, 그거 실패하면 오빠 둘째 부인으로 들어올래? 넝담~”
그때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오라비들의 구박을 한 몸에 받아야 했고.
그런 나날이 반복되던 어느 날.
라페슈는 그날도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이황자를 보고는 그냥 테라스로 들어가 버렸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이러고 사는 걸까?”
연회도, 면봉스틴도 이제 지긋지긋했다. 라페슈는 내일도 오라비들에게 욕을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 한숨을 쉬며 난간에 몸을 기댔다.
앞에는 어둠 너머로 멀리 보이는 불빛들, 등 뒤에서는 울리는 음악 소리.
복작거리는 연회장 안의 분위기와 한 걸음 떨어져 묘한 분위기에 감싸여 있자니 한탄과 함께 눈물이 절로 솟았다.
“나도… 나도! 잘살아 보고 싶었다고.”
로판에 빙의하면 다 잘 먹고 잘살던데. 왜 자신만 예외인지, 왜 이렇게 이리저리 치여 살아야 하는지 라페슈는 알 수가 없었다.
원래 세상이 훨씬 살기 좋았다. 돌아가고 싶었다.
점점 더 서럽게 우는 라페슈에게 손수건이 하나 내밀어졌다.
“나도 그랬어요. 삶이라는 게 참 복잡하지요?”
대체 언제부터 곁에 사람이 있었는지. 화들짝 놀란 라페슈는 부르르 떨며 고개를 돌렸고, 믿을 수 없는 인물을 발견했다.
“뭘… 어? 화, 황, 히끅, 자님? 끅!”
면봉, 아니 오스틴 황자가 눈앞에 서 있었다. 어찌나 놀랐는지 딸꾹질하는 라페슈를 보고 오스틴은 환히 웃으며 손가락을 세워 입술 앞에 댔다.
“인사는 됐고, 잠시 옆자리 좀 빌려줄래요? 빈 테라스가 없어서 그만. 나도 좀 쉬고 싶거든요.”
그게 시작이었다.
그 뒤로 연회에 참석할 때마다 오스틴은 라페슈가 있는 테라스를 찾아왔다.
하지만 계약 결혼 이야기를 꺼내야지, 하고 생각할 때면 어떻게 아는 것인지 구렁이 담 넘어가듯 화제가 전환되어 있고는 했다.
오스틴이 주로 꺼내는 건 에사디엔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 애가 자주 만났던 사람이 셀레스테 영애라고 들었어요.”
라페슈는 지레 겁을 집어먹었다. 아는 것도 없는데 끌려가 몇 시간이고 조사를 받는 건 자작이 죽었을 때 겪은 것으로 충분했다.
“저, 저는 잠시 만났던 적은 있지만……. 그뿐이고 삼황자님은 사라지시기 전에 카르이넨 공녀를, 음…….”
“쫓아다녔다죠. 그 이야기는 들었어요.”
“네에. 그리고 미뉴엘 카르이넨 영애는 황자님이 사라지셨을 때쯤 북부 영지로 떠났다고 해요.”
“북부라…….”
입가를 쓰는 오스틴의 손가락 사이로 흐릿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앞마당에 숨겨둔 건가?”
“네?”
“아니에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사람을 앞에 두고 다른 생각이라니.
라페슈는 조금 뾰로통해졌지만 이황자의 외모를 생각하면 그 정도 오만함은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듯한 금발, 사막 국가에서 살며 가무잡잡해진 피부.
친절해 보이는 초록빛 눈동자는 미소 지을 때마다 묘한 요염함을 담고 빛났다. 게다가 잉크가 떨어진 듯 콕 찍힌 눈물점까지.
섬세하게 아름다우면서도 금욕적인 분위기를 두른 에사디엔과는 다소 다른 느낌의 미남이었다.
“저기, 황자님…….”
이제 타이밍이고 뭐고 모르겠다.
라페슈가 큰마음 먹고 이야기를 꺼내려던 순간, 또다시 오스틴이 말을 끊었다.
“아, 맞아. 셀레스테 영애, 어제 물어보려고 했는데 깜빡한 일이 있어요.”
“…뭔가요?”
라페슈의 목소리에 불쾌함이 실린 건 그야말로 찰나였다.
“혹시 영애는 자신에게 마법의 재능이 있다는 걸 알고 있나요?”
“그, 그걸 어떻게……?”
“역시 알고 있었군요.”
오스틴 황자도 마법사였던 것일까?
라페슈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지만 오스틴은 도구의 힘을 빌린 것이었다.
“마력을 확인할 수 있는 마도구가 있어요.”
그가 품에서 꺼낸 것은 여성용 펜던트. 잎사귀 모양이 어두운 가운데서도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어머, 예뻐라.”
“어머니의 유품이에요. 지금은 당신의 마력을 감지해서 빛나는 거고.”
“…….”
“이 정도로 빛난다는 건 마력이 꽤 많다는 뜻인데. 왜 마법을 배우지 않았죠?”
대마법사의 제자가 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으니 라페슈는 대충 적당한 핑계를 댔다.
“최근에야 알았어요. 대마법사님이 확인해 주셨는데……. 올해 마법 학교의 입학 사정이 끝났다고 하셔서 내년에 시험을 쳐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어요.”
“이 정도라면 대마법사의 제자도 노려봄 직한데.”
“마침 그분은 이번에 제자를 들이셨다고 하더라고요.”
“뭔가 시기가 잘 맞지 않았나 보군요……. 안타깝네요.”
오스틴은 팔짱을 낀 채 먼 곳을 바라보며 한동안 이것저것 고민하는 눈치였다.
한참이 지난 후, 드디어 마음을 정했는지 그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저, 셀레스테 영애.”
“아, 네.”
“치트룸에도 대단한 힘을 가진 분이 계세요. 오랫동안 전인을 찾지 못했는데……. 당신만 원한다면 내가 추천해 줄 수 있어요.”
라페슈는 미처 숨길 수 없을 정도로 솔깃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