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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 영애 집착을 시작합니다 (54)화 (54/130)

54화

하지만 치트룸이라니. 남부에서는 가난에 찌든 기억밖에 없어서 치트룸도 그렇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물론 오스틴이야 프레세리아의 황자이자 대사 신분으로 주재 중이니 편안한 생활을 누리겠지.

그러나 셀레스테 자작가의 삼 형제가 라페슈에게 지원을 해줄지는 미지수, 아니 거의 가망이 없었다.

“하지만 저는 치트룸에 기반이 없고……. 부끄럽지만 모은 돈도 없답니다.”

“아니, 영애. 나를 그런 파렴치한으로 보았나요?”

오스틴은 한참을 웃다가 말을 이었다.

“당연히 당신의 생활 전반은 내가 책임질 거예요. 내 수행원으로 올려 데려갈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황자님, 왜 제게 이렇게 잘 대해 주시는 건가요?”

“그야 타국에서 오래 살았지만 나도 프레세리아 사람이니까요.”

오스틴이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당신도. 당신이 강해지는 만큼 프레세리아도 강해집니다.”

타국에서도 나라를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는 황자다운 답이었다.

“…….”

라페슈는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지긋지긋한 자작가 삼 형제도, 미뉴엘 카르이넨도 없는 새로운 환경에서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오스틴의 손을 잡으며 라페슈는 똑똑히 말했다.

“황자님 말씀을 따를게요.”

오스틴은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당신의 마력이라면 대단한 결과가 나올 거예요, 분명히.”

* * *

“뭐 해?”

질문과 동시에 불쑥 라망드의 얼굴이 시야로 들어왔다.

“광합성하고 있었어.”

나는 정원에 앉아 따끈따끈한 가을 햇빛을 만끽하고 있었다.

북부에 올라가면 햇볕의 온도 자체가 달라진다. 눈처럼 창백한 햇빛도 물론 좋았지만 이처럼 바깥에서 즐길 수는 없었다.

“좀 걸을까?”

“그, 그럴까?”

나는 라망드가 내민 손을 어색하게 붙들었다.

지난번에 내 방 앞에서 대화를 나눈 이후로 어쩐지 라망드를 대하기가 서먹해졌다.

아니, 사실은 나 혼자서 안절부절못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조금만 삐끗하면 라망드가 자신을 수혈 팩이나 치료사로 여긴다고 생각할까 봐.

“왜 그래?”

“뭐, 뭐가?”

“그렇게 흔쾌히 승낙하다니.”

“…그러자고 해도 난리야.”

입술을 삐죽 내밀자 라망드가 픽 웃었다.

“좋아서 그러지.”

날 그렇게 운동시키고 싶었니?

“그, 흠. 삼황자님의 행방이 묘연하더라.”

“응. 나도 들었어.”

라망드는 가만히 나를 바라보다가 시선이 마주치자 아차 싶은 사람처럼 고개를 돌렸다.

“왜 내 눈치를 봐?”

“그거야……. 네가 많이 신경 쓰고 있을까 봐.”

“무슨 소리야? 다들 호들갑도 어지간히 떨어야지. 성인이 고작 이틀 안 보이는 거 갖고 난리를, 난리를……. 어휴.”

아닌 척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속으로는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라망드, 왜 이렇게 예리한 거야?’

사실 신경이 쓰였다. 너무 쓰여서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마지막에 그렇게나 못되게 굴고 헤어졌던 게 걸렸다. 아직도 그의 무너지는 표정이 문득 떠오를 때면 양심이 쿡쿡 찔렸다.

‘적당히 할 걸 그랬나.’

술독에 빠져 지낸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남들 다 겪는 실연이니까 그도 일어설 줄로만 알았지. 이렇게 대뜸 모습을 감출 줄은 몰랐다.

사람이 심란하면 잠적(혹은 가출)도 할 수 있다고 이성은 말했지만 이황자와 엮여서 고생한 과거가 떠올라 어쩔 수 없이 불안해지기도 했다.

‘다 큰 어른인데 설마 어디 팔려나가고 그런 일은 없겠지. 아마 없을 거야…….’

마야 폐황녀의 저택에 끌려갔을 때도 어떻게든 자력으로 탈출할 방법이 있는 것처럼 말하기도 했고.

“사제님!”

그때 저쪽에서 라망드를 찾는 하인이 나타났다.

“쉴 틈이 없네, 라망드.”

아이돌이 따로 없을 정도로 바쁜데 대체 연애는 언제 하는 거야? 누굴 만나는 것 같지도 않은데.

‘아. 혹시 그 사람이 호위 기사 중에 있는 건가?’

라망드는 기사단 지원도 자주 나가는 편이고, 기사라면 그가 신전에 갈 때도 호위 삼아 만날 수 있을 테니까.

확인차 주변을 휘 둘러봤지만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비번인가?’

혼자 이리저리 추리해 보는 사이 라망드가 말했다.

“앉아 있던 데로 다시 데려다줄게.”

“누굴 백아흔 살 먹은 노인네 취급하고 그래?”

정원 하나가 축구장 크기만 하지만 엄연히 우리 집 안이다. 기사들도 주변을 지키고 서 있는데 걱정은.

“괜찮으니까 가봐.”

“그래. 이따 보자.”

라망드는 내 손을 한 번 꼬옥 잡았다가 놓고는 이내 몸을 돌렸다.

나는 그 뒷모습을 보다가 기지개를 쭉 켰다.

내일은 아버지와 나, 라망드가 북부로 떠나는 날이라 저택이 북적북적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얇은 옷가지들 같은 거야 다 두고 가지만 그래도 챙길 게 많은 모양이었다.

“북부……. 진짜 오랜만이네.”

지금 내가 칭한 ‘북부’는 카르이넨 본성을 말한다.

넓은 북부 지역 대부분이 카르이넨 가문의 영토라 북부로 통칭하지만 분명 지역이 나뉘어 있기는 했다.

그중 하나가 라망드와 내가 지내던 서멘더 지방이다.

프레세리아의 많은 플렌드나 신전 중에서도 가장 북쪽에 자리 잡은 것이 바로 서멘더의 대신전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카르이넨 본성보다는 한참 남쪽이지만.

‘대사제님을 다시 뵐 수 있겠지.’

정령을 찾으러 가기 전에 수호부 하나만 더 달라고 해볼까, 싶었다.

그렇지 않아도 종잇장 같은 몸, 불의 정령과 접촉하면 활활 타올라 버리는 건 아닌가 무섭기도 했으니까.

“으으.”

그걸 상상하고는 몸을 바르르 떨던 중, 나는 묘한 느낌에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응?”

저 앞쪽, 각이 반듯하게 잘린 쥐똥나무가 나와 같이 바르르 떠는 것처럼 느껴졌다.

‘정원에 뭐가 사나?’

귀족들의 취미 중 하나는 조경(을 자랑)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들 알다시피 풀에는 벌레가 꼬이고, 땅에는 쥐도 있고, 쥐가 있으면 고양이도 있고. 비 온 뒤에는 내 머리카락보다 긴 지렁이들이…….

‘윽. 그만 생각하자.’

아무튼 본성에서는 정원에 굴을 파고 새끼를 낳은 여우도 봤다. 정원사들이 노력하기는 하지만 사람의 힘이 미처 닿지 않는 부분도 있으니까.

나도 이제는 그런 환경에 꽤 적응해서 다음엔 또 뭐가 튀어나오려나 궁금하기까지 했다.

그런 호기심은 지금도 여전해서, 나는 천천히 쥐똥나무 쪽으로 다가갔다.

내 발소리를 들었는지 헉, 칵, 하는 소리가 나더니 잠시 후 바들바들 떨리는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먀…….”

“고양이…인가?”

그런데 굉장히 울음에 힘도 없고… 무엇보다 어색하게 들렸다. 마치 다른 동물이 고양이 흉내를 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다친 건가, 싶기도 했다. 내 기척을 느끼고 냉큼 도망가는 게 아니라 도리어 부르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고양이는 영역 동물이라고 했으니 다른 녀석과 싸우다 다쳐서 여기까지 들어온 것일지도 몰랐다.

“앗, 정말 고양이잖아.”

녀석은 가지가 뻗지 않은 공간을 용케도 찾아내서 그 안에 숨어 있었다.

그런데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다. 매끈한 꿀빛 털로 감싸인 몸이 얕고 깊게 팬 생채기로 가득했다.

나를 발견한 녀석은 안심한 것처럼 어색한 ‘먀’ 소리를 또 내고는 눈을 감았다.

“역시 날 부른 게… 헉, 잠깐만. 정신을 잃으면 안 되는 거 아닌가?”

동물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지만 이렇게 많이 다친 애를 그냥 두고 갈 수는 없었다.

나는 두르고 있던 얇은 숄을 펼쳐 서둘러 그 고양이를 안아 들었다.

“어이구구구.”

생각 외로 묵직한 무게감에 끙 소리가 절로 나왔다.

“내 팔뚝만 한 녀석이 뭐가 이렇게 무거워?”

당장 기사를 불러 라망드가 어디로 갔는지 물으려고 했지만 그 애도 바쁘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짬이 나면 데이트라도 해야 할 텐데.’

몰랐을 때야 그렇다 쳐도 눈치챘으니 방해하면 안 되지.

재빨리 마음을 접은 나는 고양이를 내 방으로 데려가 테이블 위에 숄째로 눕혔다.

“많이도 다쳤네.”

포션 병을 열자 민트처럼 시원한 향이 퍼졌다. 나는 그 익숙한 향기를 맡으며 장갑을 벗고 상처 하나하나에 꼼꼼히 포션을 발랐다.

잠시 그것이 스며들기를 기다리는 동안 하녀가 따뜻한 물과 수건을 가져다주었다.

“아차차.”

문이 닫히자마자 고양이가 일어나면 뭘 좀 먹어야 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뭘 줘야 하나?

“동물을 키워본 적이 없으니 원.”

예전, 그러니까 전생에. 우유나 날생선은 좋지 않다는 글을 본 것 같기도 했다.

만화나 영화에서는 고양이가 좋아하는 거로 나오는데 의외라는 생각을 해서 아직도 어렴풋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으음.”

그래도 굶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문을 열고 하녀를 다시 불러 말했다.

“삶은 계란 몇 알만 으깨서 갖다줘. 소금 간은 절대로 하지 말고.”

“알겠습니다.”

그때 안쪽에서 또 어색한 울음소리가 울렸다.

“먀!”

벌써 깨어났나?

서둘러 문을 닫고 가보니 녀석이 고개를 들고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귀며 꼬리가 천장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채로.

“먀……!”

날 보고 안심한 듯 우는 걸 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피어올랐다.

“배고프지? 달걀 삶아달라고 했어. 자, 이제 몸 닦자.”

따끈한 수건을 집어 올리자 잠시 내려갔던 녀석의 꼬리가 다시 치솟았다. 이번에는 펑 소리가 났나 싶을 정도로 털까지 선 상태였다.

“얌전히 있어야지.”

금방이라도 도망갈까 말까 고민하는 것 같았지만 녀석은 곧 다시 주저앉았다. 마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아이고, 착하네.”

슥슥, 가볍게 수건이 스칠 때마다 움찔거리기는 해도 도망가지는 않았다. 심지어 다리를 닦으려고 하자 자리에서 일어서 주기까지 했다.

“오구, 착하다.”

연신 칭찬을 반복하던 나는 엉덩이를 닦아줄 차례가 되어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호오, 이게 땅콩이라는 거구나. 과연.”

왜 땅콩이라고 부르는지 알겠다고 납득했을 때였다.

여태껏 눈을 꽉 감고 굳은 듯 있던 고양이가 말 그대로 펄쩍 튀어 올랐다.

“먀, 먀, 먀악!”

“왜, 왜 그래?”

“하악! 먀……!”

녀석은 어쩔 줄 모르는 것처럼 숄 위를 이리저리 콱콱 밟으며 움직였다.

“혹시 기분 나빴니?”

그런데 땅콩이라는 말을 알아듣는 건가? 하지만 억울하게도 나는 땅콩에 손도 안 댔다.

조금 고민하던 나는 수건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어차피 거의 다 닦은 상태이기도 했고, 저렇게 불쾌해하는데 더 건드리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쉬고 있도록 해. 밥만 먹고 나면 돌려보내 줄게.”

분명 말이 안 통하는 걸 알지만 행동이 묘해서인지 자꾸만 설명하게 됐다.

‘앞에서 사람이 얼쩡거리는 것보다 혼자 있는 쪽이 마음을 안정시키는 데 낫겠지.’

야생 동물이니까. 아까 불렀던 거야 뭐, 생존 본능 때문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 내가 몸을 돌려 나가려던 순간이었다.

“먀!”

어쩐지 절박하게 느껴지는 소리를 빽 외친 녀석이 테이블 밑으로… 투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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