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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 영애 집착을 시작합니다 (55)화 (55/130)

55화

그건 투신이라고밖에 표현할 말이 없는 장면이었다. 고양이답게 우아하게 착지하는 것이 아니라 땅에 박치기를 했으니까.

“헉!”

나는 화들짝 놀라서 얼른 녀석을 들어 올렸다.

“살다 살다 발이 아니라 얼굴로 떨어지는 고양이는 처음 봐.”

피가 나는 곳은 없었지만 퉁 소리가 날 정도였다. 혹시 안쪽은 어떨지 모르니 아픈 데가 없는지 확인해 볼 셈으로 손을 살짝 올렸다.

“만져봐도 될까?”

하지만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내가 손을 대자마자, 녀석은 아프지도 않은지 얼굴을 마구 부비며 고릉고릉 목을 울렸다.

“가지 말라고 그러는 거야?”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녀석이 몸을 쭉 일으키며 뒷발로 단단히 섰다. 부드러운 앞발이 내 어깨와 얼굴에 하나씩 얹혔다.

“먀아…….”

터키석처럼 오묘한 푸른빛 눈이 일렁이는 것만 같았다.

‘뭔가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내가 고양이의 말을 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정령의 힘 찌꺼기 말고 그런 능력이 있어야 했는데.

하지만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이것뿐이었다.

“너, 눈이 참 예쁘구나.”

나는 홀린 듯 녀석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이 특이한 고양이는 이때도 고양이답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먀.”

고개를 홱 돌리기는커녕 저도 내 눈을 깊게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시선 이외에도 뭔가가 엮이는 것 같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을 때였다. 노크 소리와 함께 하녀가 들어왔다.

“아가씨, 말씀하셨던 삶은 계란입니다.”

“으, 응……. 거기 놔줘.”

꿈에서 깬 것처럼 얼떨떨하게 대답하고는 조그만 티스푼으로 으깬 노른자를 떠서 고양이의 입 앞으로 내밀었다.

“자, 맘마 먹자.”

겉의 상처는 포션으로 치료하더라도 밥을 먹어야 기력이 생기는 법이다.

고양이는 낯설었는지 고개를 뒤로 쭉 물렸지만, 착하다며 달래자 못 이긴 듯 합, 하고 노른자를 입에 넣었다. 그러더니 언제 피했냐는 듯 엄청난 기세로 삶은 계란을 몽땅 먹어 치웠다.

‘사흘은 굶은 줄 알았네.’

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내 무릎에서 내려갈 생각이 없어 보이는 녀석의 등을 길게 쓸었다. 배가 불렀는지 느리게 눈을 깜박거리며 작게 하품하는 모습이 귀여워서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였다.

아니, 정정.

‘이 귀여움은 심장을 부술 정도야…….’

하지만 그렇다고 계속 내가 어미 닭처럼 품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너, 집에 돌아가야 하지 않겠어?”

움찔움찔.

귀가 뒤로 젖혀지는 게 뻔히 보이는데도 녀석은 못 들은 척 눈을 감고만 있었다.

‘으음.’

정말 말 알아듣는 것 아냐? 반신반의하며 물었다.

“가기 싫어? 나랑 살까?”

그러자 당장 녀석이 몸을 일으키며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직시했다.

초롱초롱.

초롱초롱.

굴러떨어질 듯 촉촉하고 커다란 눈이 명백하게 무언가를 바라며 반짝거렸다.

이 모습을 직시하고도 버틸 인간은 이 세상에 없을 것이었다. 최소한 나는 그런 냉혈한이 될 수 없었다.

‘이게 바로 그건가? 간택, 그런 건가?’

사실 녀석이 외치던 ‘먀!’는 ‘날 키워라, 인간!’ 정도의 뜻이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전생, 아니지. 전전 생에 나라를 구했나 보다.

나는 감동에 휩싸인 채 말했다.

“좋아. 이제 나하고 사는 거야. 알았지?”

늘씬한 꿀빛 몸을 꼭 껴안고 촉촉한 코 위에 쪽 입을 맞췄다.

“먀!”

예민한 성격이었다면 당장 솜방망이를 날렸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녀석은 다시 어깨를 짚고 일어서서 내 뺨을 마구 핥았다.

‘이런 개냥이를 봤나……!’

뿐만 아니었다. 녀석은 거기에 더해 무릎냥에 애교냥이었다. 저녁때까지 녀석의 이름도 짓고 내내 함께 있으면서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리고 나를 너무 좋아하는데……? 치료해 줘서 그런가?’

오늘 처음 본 사이에 이래도 되나 싶고, 어쩐지 고양이보다 사람이 더 낯을 가리게 될 정도로.

게다가 말을 너무 잘 알아들었다.

“엘.”

“먀!”

새로 붙여준 이름을 부르면 바로 대답했고.

“자, 무슨 색으로 할까?”

목에 매줄 양으로 서랍에 남아 있던 실 팔찌 몇 개를 보여주니 당장 분홍색을 짚었다.

“이게 좋아?”

확인차 물으니 손에 머리를 부빈다.

“으구, 애교쟁이.”

이마에서부터 등을 따라 쭉 문지르며 엉덩이를 도닥도닥해 주자 기다란 꼬리가 살랑살랑 움직였다.

꼬리도 만져보고 싶은데 아무래도 싫어하려나. 고민하던 중 하녀가 들어와 알렸다.

“아가씨,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아……. 벌써 잘 시간이 다 되었구나.”

엘과 있으니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나는 엘이 고른 팔찌 가운데에 작게 달랑이는 펜던트 하나를 걸고 일단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자, 이제 갈까?”

“먀?”

자기 전에는 따뜻하게 씻어야지.

흥얼거리며 욕실에 들어서자 엘은 그제야 불길함을 느꼈는지 품 안에서 몸을 뻣뻣하게 굳혔다.

“아, 역시 고양이라 물을 싫어하나?”

혹시라도 물에 들어갔다가 또 이리 쿵 저리 쿵 부딪힐까 걱정스러워서 조심조심 엘의 발 한쪽을 따뜻한 물에 적셔봤지만, 별다른 반응 없이 계속 굳어 있기만 했다.

‘이 정도면 괜찮은… 건가?’

최소한 할퀸다거나 로켓처럼 튀어 나가지는 않았으므로 안심하고 바닥 깔개 위로 내려놓았다.

“여기서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기다리던 하녀들의 도움으로 옷을 벗은 뒤 엘을 안고 욕조로 들어갔다.

“므으으응.”

언제부턴가 앞발로 눈을 덮고 있던 엘은 물이 몸에 닿자 뒤늦게 몸을 비틀기 시작했다. 나는 녀석을 놓치기 전에 더욱 꼭 껴안으며 달래듯 속삭였다.

“쉬이, 이불에 들어가려면 깨끗이 씻어야지.”

그러자 움직임이 뚝 멎었다.

그런데 어째 살짝 벌린 입에서 색색 흘러나오는 숨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문득 불안해진 나는 필사적으로 눈을 가린 엘의 앞발을 살살 떼어냈다.

“엘, 눈 떠봐. 응?”

“으웅…….”

“눈이 아픈 거니?”

“끄으웅.”

앓는 소리만 내니까 더 불안했다.

“물 안 들어가게 조심할게.”

조심조심 눈곱도 떼주고 부드럽게 쓰다듬기를 몇 분. 슬며시 엘이 눈을 떴다.

하지만 파란 눈에 내 모습이 맺힌 순간.

꼬르륵…….

엘이 기절해 버리고 말았다!

잔뜩 놀란 나는 결국 라망드를 불러버렸다.

내 말을 따라 하는 라망드의 목소리가 어쩐지 이를 가는 것 같았다.

“같이 목욕을… 했다고……?”

“응. 그런데 잔뜩 긴장해 있더니 결국 기절한 거 있지…….”

서둘러서 씻는 둥 마는 둥, 대충 몸을 닦고 나와 설명하는 나를 보며 라망드는 뭐라 설명할 수 없는 표정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너어는, 진짜…….”

그리고 엘을 보자 더욱 깊은 한숨이 이어졌다.

“이걸 진짜…….”

마지막으로 사납게 머리를 쓸어 올리며 한 번 더.

“대체 이런 건 어디서 주워 온 거야?”

“왜? 엘한테 이상한 점이라도 있어?”

“엘?”

“얘 이름이야.”

기르기로 한 이상 우리 가족이니까, 우리 자매들의 이름에 공통으로 들어가는 글자를 붙였다.

“얼씨구. 이름까지.”

라망드의 말투에는 짜증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아무래도 뭔가 이상한데.’

데이트 도중에 불려 오기라도 했나?

하지만 라망드를 밤에 부른 게 처음도 아닌데. 지금껏 이런 반응을 보인 적은 없었다.

“라망드, 너는 얘가 싫어?”

“싫으냐고? 싫고 좋고는 둘째 치고 이거, 이건…….”

“왜 그러는데? 그냥 고양이잖아.”

“그냥 고양이? 이게 무슨 고양이야. 고양이 발이 이렇게 큰 거 봤어?”

라망드는 정신을 잃고 축 늘어진 엘의 발을 들어 올렸다.

“다리도 새끼 고양이라고 생각하기엔 너무 굵고. 귀 끝에 검은 털 송이까지. 스라소니하고 비슷하기는 한데…….”

뭐라 정의할 수가 없는지 복잡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몸에 반점이 하나도 없고. 볼수염도 없고. 꼬리는 엄청 길고.”

“라망드 너… 고양이에 대해 잘 아는구나?”

“옛날에 네가 키우고 싶다고 난리였으니까 그렇지.”

“옛날에?”

아. 그러고 보니 신전에서 지냈을 때도 이런 적이 있었다.

몰래 들어온 도둑고양이에게 반해서 고양이 얘기만 주야장천하고 다녔을 때가.

“그걸 아직도 기억하네?”

날이 갈수록 라망드의 기억력에 감탄하게 된다고 생각할 때쯤, 엘의 수염이 파르르 떨린다 싶더니 파란 눈이 천천히 드러났다.

“먀……?”

“엘, 괜찮아?”

쓰다듬는 손에 익숙하게 머리를 부빈 엘은 라망드를 보자마자 ‘킷’도 ‘칫’도 아닌 이상한 소리를 냈다.

“엘?”

재채기라도 하는 건가 했는데 갑자기 라망드가 벌어져 있던 내 가운 깃을 단단히 여몄다.

“왜 그래?”

“…찬 바람 들어.”

“괜찮은데.”

하지만 라망드가 정색하고 매서운 기세로 째려보는 데에는 버틸 재간이 없었다.

흠흠. 나는 괜히 목을 울리며 말했다.

“에, 엘도 괜찮은 거 같으니까 이만 자야겠다.”

어구구. 묵직한 몸을 들어 꼭 안아주자 엘은 기다렸다는 듯 내 가슴팍으로 폭 고개를 묻었다.

“설마.”

라망드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살벌하게 물었다.

“같이 자겠다고?”

“응.”

“안 돼. 그게 뭔 줄 알고 같이 자겠대?”

“그냥 혼종일 수도 있잖아. 게다가 이렇게 작은걸.”

“작…….”

풉. 내내 기분이 좋지 않던 라망드가 이상하게도 그 말에는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안 돼. 침대에 벌레 물고 들어올라.”

“하악!”

엘이 항의하듯 입술을 당기며 날카로운 소리를 내자 라망드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지적했다.

“봐. 송곳니도 엄청 길잖아. 맹수가 분명하다니까.”

“…….”

엘이 입을 딱 닫았다.

“그러면 안 돼, 엘. 라망드가 네 상태를 봐줬는걸.”

나는 엘과 눈을 마주치며 단호하게 말했다.

안 그래도 라망드가 미심쩍어하는데 공격하기라도 하면 굉장히 곤란했다.

“사이좋게 지내야 해. 알겠니?”

물론 라망드에게도 부탁했다.

“엘은 엄청 똑똑하단 말이야. 얘 앞에서 안 좋은 말 하면 안 돼. 알았지?”

“과연. 똑똑하단 말이지?”

“그럼.”

“그… 녀석을 북부에도 데려갈 거고?”

“아무래도 그래야겠지.”

팔짱을 낀 채 손가락으로 팔뚝 위를 툭툭 두들기던 라망드가 문득 후우, 하며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나하고도 친해져야겠네.”

“정말?”

“정말이지. 네가 기어이 키우겠다면 내가 어떻게 이기겠어.”

라망드는 줄곧 심각했던 표정을 지우고 평소처럼 내 머리를 헝클듯 쓰다듬었다.

“와아! 들었지, 엘? 앞으로 라망드도 좋아해 줘야 해.”

하지만 기뻐하기에는 아직 일렀다.

“그러니까 잠은 나랑 자는 거로.”

“뭐?”

라망드는 앗 하는 사이에 내게서 엘을 빼앗아 달랑 옆구리에 끼었다.

“먀?! 먀!”

“그럼 좋은 꿈 꿔, 미뉴엘.”

그리고 미처 잡을 틈도 없이 후다닥 나가 버렸다.

닫히는 문 사이로 라망드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하고 얘기 좀…….”

그걸 듣자 긴장이 풀리며 웃음이 실실 새어 나왔다. 역시 라망드도 말을 잘 알아듣는 엘이 신기했던 거였다.

“그냥 솔직히 말하지. 바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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