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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 영애 집착을 시작합니다 (56)화 (56/130)

56화

그리고 다음 날 이른 아침.

침대에 찾아온 낯선 무게감에 눈을 뜬 나는 옆구리에 붙은 따끈한 온기의 정체를 확인한 후 그만 풋 웃어버렸다.

“대체 어떻게 탈출해서 온 거야?”

암모나이트처럼 돌돌 말린 엘이었다.

“먀…….”

아주 살짝 뜬 엘의 눈이 마치 웃는 것처럼 가늘어지더니 다시 감겼다.

* * *

에사디엔은 이리저리 사방을 둘러보며 위치를 가늠했다. 작은 짐승의 몸으로 인간의 기억에 의지하자니 금방금방 길을 잃어버렸다.

‘대공저가 저쪽 방향…이었던가.’

지금 막 황성의 개구멍을 빠져나온 시점이었다.

도로를 지나다니는 말발굽이며 바퀴들을 보자 에사디엔은 인간이었을 때보다 확연히 눈높이가 낮아졌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체감했다.

‘이대로라면 눈먼 발굽에 치여 사망할 수도 있겠군.’

판단은 빨랐지만 아직 짐승의 몸에 적응하지 못한 상태라 담 위에 올라서는 것마저 힘겨웠다.

몇 번의 실패 끝에 겨우겨우 나지막한 담벼락 위로 올라섰을 때였다.

- 이봐. 거기!

‘음?’

인간의 말소리가 아닌 특이한 소리를 인식하고 에사디엔의 귀가 쫑긋 서더니 까딱까딱 움직였다.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몸이 제멋대로 반응하는 느낌은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았다.

에사디엔이 당황한 사이 그를 부른 목소리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 뭐야. 잡종인가?

- 희한하게 생겼네. 네 부모는 어디 있냐? 덜 자란 놈을 혼자 돌아다니게 두다니.

골목에서부터 에사디엔을 지켜보며 따라온 고양이 세 마리가 그를 둘러쌌다. 삼색, 회색 줄무늬, 그리고 새까만 고양이.

잡종이니 뭐니, 에사디엔은 모르는 일이었고 알 수도 없었으므로 묵묵히 그들을 지나쳐 가려 했다.

그렇지 않은가? 갑자기 몸이 변한 데다 원래 그는 인간인데 고양이들의 언어를 ‘말할’ 수 있을 리 없는 것이다.

하지만 다 자란 고양이들의 덩치는 의외로 커서 비껴갈 자리라고는 저 땅바닥밖에 없었다.

‘…….’

에사디엔은 침을 꿀꺽 삼켰다. 올라올 때도 힘들었는데 내려가려니 아까보다 두 배는 높아 보였다.

하지만 그는 일단 이 ‘고양이 비슷한’ 몸을 믿어보기로 했다. 고양이들은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완벽한 착지를 선보이고는 하니까.

- 어, 어어?

에사디엔이 뛰어내리려는 생각 중인 것을 양옆으로 씰룩거리는 그의 엉덩이가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에게 말을 건 고양이들은 굉장히 당황했다.

- 그냥 내빼려고?

뭐지, 이 신박한 놈은? 죄송합니다, 하고 꼬리 마는 것도 안 배운 건가?

고양이는 영역 동물이다. 처음 보는 녀석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는데도 참아준 건 오로지 어린것이기 때문이었다.

- 야, 인마!

따끔하게 훈계하려 부르는 순간 드디어 에사디엔이 뛰어내렸다.

‘완벽한 착지!’

아니, 그거야 네 생각이고.

에사디엔의 첫 착지가 어땠는지는 작게 쿵, 소리가 울린 후 괜히 제 얼굴이 아픈 것처럼 앞발로 문지르는 고양이들만 봐도 알 수 있었다.

- 살다 살다 저렇게 몸 못 쓰는 놈은 처음 보네.

- 갓 눈 뜬 어린것들도 저것보다는 낫겠다.

- 어떻게 저러고 돌아다닌 거지?

0점 점수판보다도 신랄한 평이었다.

- 그냥 쭐레쭐레 다니게 뒀다가는 정말 큰일 치르겠… 어어?

귀찮지만 에사디엔을 어미에게 데려다주려던 삼색 고양이가 눈을 크게 떴다.

기절한 듯 미동도 없던 에사디엔이 벌떡 몸을 일으켜 화살처럼 튀어나간 것이다.

함께 지켜보던 회색 줄무늬 고양이가 혀를 내두르며 중얼거렸다.

- 역시 어리니까 회복이 빠르네.

- 시끄럽고, 얼른 따라와!

그러나 그들이 따라붙은 것을 깨달은 에사디엔은 더 속도를 높여 달아났다.

만약 그가 그대로 잘 갔다면 고양이들도 중간에 그만두고 비둘기나 잡으러 갔을 것이다.

그런데 이리 쿵, 저리 쿵 부딪히는 것은 물론이고 이 구역의 성격 더러운 놈들은 다 건드리니 도저히 그냥 둘 수가 없었다.

- 뭐야, 이 잡종은!

상인의 집에 사는 이 근방 최고 미묘(美猫)의 풍성한 꼬리를 밟고 제대로 할큄 당하질 않나.

재수 없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수염이 꺾인다고, 나무에서 발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눈이 돌아가면 답이 없는 사냥개의 등짝에 뚝 떨어지질 않나.

“월! 월월!”

- 미안해, 친구!

고양이들은 진땀을 흘리며 당장 에사디엔을 물어버리려는 사냥개를 진정시켜야 했다.

보다 못한 검은 고양이가 어딘가 고장 난 것 같은 어린것을 홱 잡아채려 했지만 옆구리만 길게 긁혔을 뿐 놓쳐버렸다.

- 아오, 짜증 나!

몸집이 작아서 그런 건지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기술만큼은 예술적이었다.

- 그만할까? 슬슬 배고픈데.

- 묘성 보소. 쟤는 어떻겠냐?

고양이들은 포기하고 싶었지만 어른의 묘격을 보여주자는 의지 하나만으로 사고뭉치 어린것의 뒤를 따랐다.

에사디엔은 위태위태하게 움직였다. 녀석도 배가 고플 거라는 예상이 적중한 것이다.

- 힘이 조금만 더 빠지면 확 물어 가자고.

그런데 그렇게 기회만 노리던 중, 녀석이 산울타리 안쪽으로 쏙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 어어?

검은 고양이가 기함했다.

에사디엔이 비집고 들어간 곳은 말이 좋아 산울타리지, 거센 가시가 잔뜩 돋은 식물로 세운 벽이었다.

- 저 녀석, 통각이 없는 거냐……?

삼색 고양이는 검은 고양이가 꼬리를 부르르 떠는 와중에도 침착했다.

- 다행이야. 그래도 이 집에는 말밖에 없거든.

그렇다면 괜히 마구간 쪽에만 기웃거리지 않으면 안전할 것이다.

안심한 고양이들은 솜씨 좋게 울타리를 피해 나무 위로 올라갔다. 그런데 웬걸, 안쪽은 정원이라 쪼끄마한 어린것의 모습을 좀처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때, 갑자기 저만치 앞쪽의 쥐똥나무가 움찔거렸다.

- 언제 저기까지 갔지?

하지만 그것을 본 것은 고양이들뿐만이 아니었다. 길고 구불구불한 털을 가진 인간이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왔다.

고양이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숨을 죽이며 자세를 낮췄다. 정말 재수가 없으면 쫓겨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경을 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쥐똥나무 사이에서 말라비틀어진 소리가 흘러나왔다.

- 미뉴엘…….

- 뭐야. 말할 줄 알잖아?

회색 줄무늬 고양이가 떨떠름하게 투덜거렸다.

- 그런데 울음소리 진짜 이상하다. 마치…….

끝으로 갈수록 검은색에 가깝게 짙어지는 줄무늬가 새겨진 꼬리가 물음표를 그리듯 살랑살랑 흔들렸다.

- 아! 어린 인간들이 우리 소리를 따라 하는 것 같아.

- 지금 그게 중요해? 저대로 둘 거야?

긴 털의 인간은 ‘어이구구구’ 하는 소리와 함께 에사디엔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 그냥 두자. 치료하려는 것 같으니까.

짧게 말한 삼색 고양이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어린것이 저 인간을 보자마자 흐리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으니까.

- 보고 싶었어.

…라고.

그리고 정신을 잃기 전에는 분명 그들 쪽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눈을 깜빡였다. 감사의 표시였다.

‘짜식, 행복해라.’

앞발로 코밑을 쓱 훑은 삼색 고양이가 돌아섰다. 다른 고양이들은 투덜거리면서도 그 뒤를 잽싸게 따라붙었다.

- 비둘기나 한 마리 하실?

- 받고 까마귀?

- 아? 까마귀는 좀 무서운데.

* * *

에사디엔은 이 상황이 꿈만 같았다.

허기와 탈진으로 정신을 잃었다가 일어나 보니 미뉴엘이 다친 몸을 싹 치료해 준 상태였다.

뿐만 아니라 그가 얼굴을 부비고 뺨을 핥는데도 싫은 표정을 짓기는커녕 웃으며 안아주었다. 눈이 예쁘다고 말해 주었고 스스럼없이 이름을 지어주었다.

- 미뉴엘.

이름을 부르면 입에서 ‘먀’ 하고 이상한 소리만 흘러나갔지만 그때마다 미뉴엘이 신기해하며 눈을 맞춰주었으므로 그것도 좋았다.

“좋아. 이제 나하고 사는 거야. 알았지?”

미뉴엘이 그렇게 선언했을 때는 그냥 평생 이대로 살고 싶었다.

짐승의 몸이면 어떤가? 그녀의 곁에서 사랑받으며 살 수 있는데. 인간의 몸으로 조금만 방심하면 형인 척하는 놈에게 목숨을 위협당하느니 이쪽이 훨씬 좋았다.

그러나 그런 에사디엔도 미뉴엘이 욕실로 데리고 들어갔을 때는 정말로 곤혹스러웠다.

- 아니, 미뉴엘. 이러면 안 되는…….

“쉬이, 이불에 들어가려면 깨끗이 씻어야지.”

- …….

그, 그건 맞는 말인데.

여차여차(?)해서 머리가 어지러워진 에사디엔은 다시 기절해 버렸다.

깨어났을 때는 라망드가 미뉴엘의 곁에서 잔뜩 언짢은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미뉴엘……?

“엘, 괜찮아?”

미뉴엘이 반가운 한편으로 걱정을 듬뿍 담아 물었다.

그런 그녀의 뒤에서 오묘하게 변하는 라망드의 표정이 에사디엔의 눈에 들어왔다. 사제라서 뭔가를 알고 있는 것인가. 제 발이 저린 에사디엔은 애써 그의 시선을 피하며 미뉴엘에게 모른 척 안겼다.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그와 함께 잔다는 미뉴엘의 말에 라망드는 결사반대했다.

“안 돼. 침대에 벌레 물고 들어올라.”

무슨 종인지 모른다는 이유는 그냥 넘겼지만 이것만은 에사디엔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 나를 뭐로 보고!

그러나 다음 순간, 그 도발에 반응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걸 깨달았다.

라망드가 그러면 자신도 친해져 보겠다면서 에사디엔을 짐짝처럼 옆구리에 끼고 자리를 뜬 것이다.

“잠은 나랑 자는 거로.”

“뭐?”

- 뭐라고?! 당장 이것 놓아라!

미뉴엘과 에사디엔이 동시에 깜짝 놀라 반문했지만 라망드는 들리지 않는 것처럼 자연스럽기 그지없는 인사를 남기고 휙 돌아섰다.

“그럼 좋은 꿈 꿔, 미뉴엘.”

그리고 그녀의 침실에서 빠져나온 순간, 장난스럽던 태도는 어디론가 사라진 라망드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하고 얘기 좀 하죠.”

순식간에 뒤바뀐 태도에 에사디엔은 자신도 모르게 긴장해 침을 삼켰다.

‘설마…….’

시종도, 미뉴엘도, 심지어 짐승들도 그가 인간이라는 것을 몰랐는데 라망드는 처음부터 그를 보는 눈 자체가 달랐다.

지금도 그렇지 않은가. 에사디엔이 대답하지 않는데도 어련히 알아들었을 거라고 확신하는 것이 느껴졌다.

‘도망쳐야 하는 건가.’

그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하지만… 하지만.’

미련이 에사디엔을 붙들었다.

이제야 겨우 미뉴엘을 다시 만났는데.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는 배웠다. 보기만 해도 좋다는 심정이 이런 거구나, 하고.

애초에 사제가 그를 인간으로 되돌릴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상태다.

짐승을 눈앞에 들이밀며 ‘사실은 이게 사람입니다.’라고 했을 때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물론 모습을 되돌려버릴 가능성도 있었지만 에사디엔은 최대한 희망적인 쪽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래서 라망드가 그의 책상 위에 에사디엔을 털썩 내려주며 노려볼 때도 크게 당황하지 않을 수 있었다.

“이보세요, 황자님. 변태 같은 짓은 작작 하시죠.”

다짜고짜 사람 대하듯 말을 거는 데는 조금 움찔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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