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 영애 집착을 시작합니다 (57)화 (57/130)

57화

에사디엔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나 뾰족한 귀를 잔뜩 눕힌 채 노려보는 시선을 받으면서도 라망드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말 알아듣는 것 다 압니다. 아까 그쪽이 말하는 것도 들었고.”

- 어떻게… 알았지?

에사디엔이 머뭇머뭇 물었다. 라망드는 한숨을 쉬며 의자를 거꾸로 놓고 앉았다.

“글쎄요. 그냥 보는 순간 알겠더군요.”

라망드는 생각을 정리하듯 의자 등받이를 손으로 툭툭 두들겼다. 손끝이 나무 장식 위에 닿을 때마다 신성력이 희미하게 빛났다.

“당신 몸에 걸린 그것, 뭡니까? 신성력으로도 사라지지 않더군요.”

도리어 빨려드는 것 같기도 하고.

라망드가 중얼거리는 말까지 모두 캐치해 낸 에사디엔의 꼬리가 펑 소리가 날 것처럼 빵빵하게 부풀었다.

- 사제여, 그대도 나를 되돌릴 수 없는 것인가?

“…왜 좋아하는 겁니까.”

눈앞에 있는 것이 보통 고양이였다면 라망드도 흐뭇하게 보았을 정도로 귀여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저것’의 알맹이는 망할 삼황자였다.

라망드의 입술이 비틀렸다.

“저택 앞에서 기다리고, 시도 때도 없이 미뉴엘 앞에 나타나는 것까지는 미련이 남아서라고 칩시다. 그런데 이번 방법은 소름이 끼친다고밖에 할 수 없군요.”

- 오, 오해다. 내가 원해서 변한 것이 아니란 말이다!

구제할 길 없는 변태를 보는 눈빛에 에사디엔은 필사적으로 항변했다.

‘사랑의 묘약’ 때문인 것 같다고 사정을 설명했지만 라망드의 눈빛은 변하지 않았다.

“아. 그렇습니까? 그러면 왜 황실 마법사를 찾아가지 않았죠?”

- 아무도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데 찾아가서 뭘 어쩌란 말이냐!

“시도조차 하지 않았잖습니까.”

에사디엔은 숨을 작게 들이켰다.

“최소한 황태자 전하라도 찾아가서 존재를 알리려 노력했다면 당신이 실종되었다고 황실이 뒤집히는 일은 없었겠지.”

- 그건…….

그런 생각은 애초에 떠올리지도 못했다.

‘미뉴엘이 누님께 암살자 이야기를 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황태자는 특히 걱정하고 있을 터였다. 에사디엔이 어디선가 당한 것은 아닌가, 생각하면서.

죄책감이 들었다.

기운 없이 푹 숙인 에사디엔의 정수리를 보면서도 라망드는 차갑게 말했다.

“내일 황성으로 데려다드리죠. 잠깐이라면 시간이 있을 테니까.”

- 나는…….

에사디엔도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라망드의 말대로 돌아가는 것이 맞았다.

황제도, 황태자도 믿게 하기 힘들겠지만 라망드가 일단 말을 해주면 증명할 방법은 많았다.

그렇더라도.

- …싫다.

에사디엔은 모두를 저버렸다.

그가 이렇게 나올 줄 몰랐던 라망드가 전에 없이 얼굴을 구기며 험악하게 물었다.

“뭐라고요? 당신 정말 미쳤습니까? 들키면 미련이고 뭐고 끝이라고요.”

- 걱정해 주는 건가? 그대도 역시 사제로군.

“헛소리 마시죠. 약혼은 깨졌지만, 최소한 미뉴엘이 처음으로 좋아했던 사람을 떠올리면서 토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니까.”

- 토라니.

상상을 초월하는 독설에 에사디엔은 머리가 띵해질 지경이었다. 그러나 라망드는 개의치 않고 싸늘한 얼굴로 이어 말할 뿐이다.

“라페슈 셀레스테가 당신 방에 화분 같은 거로 들어와서 24시간 지켜본다고 생각해 봐요. 좋겠습니까?”

좋을 리가!

바르르 떨며 온몸으로 대답하는 모습에 라망드는 코웃음을 쳤다.

“그게 지금 당신이 하는 짓입니다.”

- 난… 난 그녀와는 다르다.

“뭐가 다릅니까? 아, 화분은 같이 욕조에 들어가는 짓은 못 하겠습니다마는. 그럼 화분 쪽이 더 낫지 않습니까?”

- 나, 나는 안 들어가려고 했다! 보, 볼 생각도 없었단 말이다!

“변명은. 같은 남자로서 창피하기 짝이 없군요.”

빈정거리는 말투에 에사디엔은 끝내 뻗어버렸다. 라망드가 그의 목덜미를 잡고 무섭게 얼렀다.

“내일 황성으로 돌아갑니다. 알겠습니까?”

- …….

그런데도 에사디엔은 고집스럽게 외면했다. 라망드는 모든 논리가 이쪽에 있음에도 버티는 그가 의아해졌다.

“일단 황성에 가야 인간으로 돌아가든 말든 할 것 아닙니까? 폐하께서는 다른 신전이든 대마법사든 동원해서 부작용을 풀어주실 텐데.”

그래도 말이 없는 에사디엔을 보며 라망드는 무언가를 직감했다.

“설마 인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겁니까?”

그제야 에사디엔의 꼬리가 반응했다. 경악한 라망드는 그만 그를 책상 위로 툭 떨어뜨리고 말았다.

사뿐히(?) 엉덩이로 착지한 에사디엔은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 미뉴엘은 인간이 아니라 짐승인 나를 좋아한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 그녀를 사랑해.

라망드의 입술이 뚝 굳었다. 창백하게 핏기가 가시는 얼굴을 보며 에사디엔은 진심을 내보였다.

- 하지만 사람인 나를 받아들여 주지 않지. 나는 그녀의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어떤… 형태든지 상관없다는 거군요.”

에사디엔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주치면 마주칠수록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이 라망드라는 사제는 순수한 친구로서 미뉴엘의 곁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아닌 척해도 커다란 마음은 언뜻언뜻 드러나는 법이었다.

‘그래서 질투했지.’

같은 처지가 된 지금은 그의 마음이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등받이 위로 이마를 기댄 라망드가 자조적으로 피식 웃었다.

“미뉴엘에게 꼬이는 건 왜 하나같이 이런 놈들뿐인지.”

- 그러니 부디 이대로 있게 해다오, 사제여.

그는 간절하게 부탁하는 에사디엔을 뚫어지게 보다가 문득 물었다.

“그런데 너무 쉽게 생각하시는 것 아닙니까, 황자님?”

- 무엇을?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만족한다. 지켜보기만 해도 행복하다……. 지금은 그런 마음이겠지만 말입니다.”

-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거다.

“글쎄요. 미뉴엘이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다면 어떻겠습니까?”

에사디엔의 동공이 크게 벌어졌다. 머리 위로 커다란 바위가 떨어진 듯한 충격이었다.

-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그가 충격받은 것을 알면서도 라망드는 잔인할 정도로 담담하게 이어 물었다.

“미뉴엘이 결혼한다면? 아이를 낳는다면? 당신이 아닌 다른 사람과 가정을 이루고 행복해하는 모습도 받아들일 수 있단 말입니까?”

그 질문 하나하나가 에사디엔에게는 마치 주먹질과도 같았다.

미처 그런 가정들을 고려할 겨를도 없이 미뉴엘에게 달려온 것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꼭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들이었다.

라망드는 얼이 빠진 에사디엔을 개킨 담요 위에 올려주며 말했다.

“천천히 생각해 보시죠. 시간은 많은 것 같으니 말입니다.”

그건 그의 정체를 묵인해 주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시간이 꽤 흐른 뒤에도 라망드는 자신이 그렇게 행동했던 이유를 정확히 골라내지 못했다.

동병상련 때문인지, 그 잔인한 가정들에도 ‘예’를 택한 사람으로서의 여유였는지, 혹은 자신이 짐승의 정체를 까발려도 미뉴엘이 믿을 거라는 확신이 없어서인지.

* * *

동식물 애호가답게 아버지는 엘을 보자마자 흐뭇한 미소를 지으셨다.

“그 애가 엘이니?”

“네. 귀엽죠?”

“흠, 그래.”

발을 들어 검은 젤리를 살핀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꽤 덩치가 커지겠구나. 눈 위도 잘 걸을 것 같고.”

그리고 그대로 악수하듯 발을 잡아 흔들었다. 당부는 덤이었다.

“우리 미뉴엘을 잘 지켜줘야 한다.”

엘은 그것 또한 알아들은 듯 고개를 아래위로 끄덕거렸다.

엘은 나를 부를 때 ‘먀’ 소리를 내는 것 이외에는 거의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게 은근히 걱정스러워서 말을 꺼내자 아버지는 별일 아니라는 듯 웃으셨다.

“원래 고양잇과 동물은 사람이 듣지 못하는 소리로 말한다고 하더구나.”

“그래요?”

“그래. 그러니까 엘이 소리를 내는 건 순전히 네 주의를 끌기 위해서라는 뜻이겠지.”

“엘이 절 많이 좋아해요. 그렇지, 엘?”

“먀아.”

딱 부러지게 대답한 엘이 내 목에 얼굴을 부볐다.

“아유, 똑똑해.”

나는 엘의 따뜻한 몸을 쓸어내리며 흡족한 마음으로 중얼거렸다.

“결혼은 무슨……. 그냥 혼자 고양이나 키우면서 살까.”

그런데 이상한 일이지. 그 말이 끝나자마자 곁에 앉은 라망드와 품 안의 엘이 동시에 굳었다.

“진심이야, 미뉴엘?”

“먀?”

호들갑들은. 돈도 많은데 혼자 살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나는 뾰로통하게 입술을 내밀며 투덜거렸다.

“몰라. 그런 선택지도 있는 거잖아.”

“너 미남 모은다며.”

“아, 진짜! 언제까지 그거 가지고 놀릴 생각이야?”

아버지는 아웅다웅하는 우리를 말리지도, 응원하지도 않았다. 그저 웃으며 지켜볼 따름이었다.

우리가 그런 식으로 시간을 죽이는 동안 준비를 마친 마법사가 보고했다.

“게이트 준비가 끝났습니다.”

짐은 육로로 올 거고, 우리는 게이트를 통해 바로 카르이넨 본성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나는 엘을 겉옷 안에 잘 품고 꼭 껴안았다.

“눈 잘 감고 있어. 알았지, 엘?”

당부하는 동안 라망드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미뉴엘.”

든든한 친구의 손을 잡고 나는 눈을 꼭 감았다.

마법사가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셋, 둘, 하나. 출발합니다.”

번쩍, 감은 눈 밖이 환해지며 몸이 둥실 떠오르는 느낌이 덮쳤다.

“열한 시 이십구 분. 도착 확인했습니다.”

아까와 다른 마법사의 목소리, 그리고 확연히 싸늘해진 공기가 우리를 맞았다.

북부에 도착한 것이다.

“괜찮아, 미뉴엘? 춥지 않아?”

머리를 한 번 흔들어 부유감을 털어낸 라망드가 물었다.

“나 추위 잘 안 타는 거 알잖아. 너는 괜찮아?”

“견딜 만해.”

그러고 보면 내가 추위에 강한 건 북부인이라서일까, 아니면 정령의 영향일까.

가벼운 호기심을 흘려보내며 놀라지도 않고 얌전히 안겨 있는 엘의 엉덩이를 토닥였다.

“오구오구, 우리 엘, 얌전히 잘 있었쩌요. 번쩍했는데 안 놀랐쩌요. 아구, 이뻐. 아구우.”

혀 짧은 소리를 남발하자 라망드가 혀를 찼다.

“그런 건 또 어디서 배웠어?”

“배우긴. 이런 걸 어디서 배워. 귀여우니까 절로 나오는 거지.”

“귀엽……. 그래. 차암 귀엽다, 응?”

라망드는 갯과 동물이 더 취향이었던 걸까?

나는 슬그머니 몸을 돌리며 라망드의 시선에서 엘을 가려주려 했다.

“아, 왜. 칭찬 많이 해줘야 좋댔어.”

“으음. 그래. 칭찬…….”

라망드는 미묘한 눈빛으로 엘을 쳐다보았다.

엘은 한참 전부터 내 어깨에 턱을 올리고는 다른 곳만 보고 있었다.

‘라망드보다 엘이 더 침착한 것 같다니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