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우리가 본성 현관에 도착했을 때쯤, 말발굽 소리에 땅이 울린다 싶더니 곧바로 정문이 열렸다.
“아……!”
누구라고 굳이 설명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시커먼 색의 뿔 달린 투구는 카르이넨 대공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맨 앞에서 그걸 쓴 채로 말을 모는 사람이 둘이나 있었으니 어머니와 엘가 언니임이 분명했다.
“마침 때가 잘 맞았구나.”
어머니는 가장 먼저 뛰어내리듯 박력 넘치게 말에서 내렸다. 투구를 벗으며 드러난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이런 몰골이라 민망하지만.”
망토며 갑옷까지 모두 검정 일색이라 멀리서는 몰랐지만 가까이서 보니 혈흔으로 엉망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개의치 않고 어머니를 껴안았다.
“몸이 더러워진다, 호시엘.”
“당신이 무사히 돌아왔는데 그런 것이 대수인가요. 고생하셨습니다.”
그 뒤로는… 부모님의 프라이버시를 위해 생략하겠다.
두 분의 애정 행각을 하인들이나 기사들 모두 신경 쓰지 않고 제각기 움직이는 걸 보니 하루 이틀 일이 아닌 듯했다.
라망드도 이미 부상자를 본다며 기사들 쪽으로 가 있었고, 엘가 언니와 나는 마주 보고 웃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언니도 고생 많았어.”
“고맙구나. 몬스터 소탕은 거의 끝났다. 특히 네가 갈 길은 아주 잘 청소해 두었지.”
어머니의 ‘때가 잘 맞았구나.’라는 말씀은 이런 뜻이었구나.
좋은 소식은 또 있었다.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던 사도님의 말을 증명하듯, 아직 요청을 넣지도 않았는데 서멘더의 플렌드나 신전에서 미리 보낸 수호부가 뒤따르듯 도착한 것이다.
‘왠지 이번 일, 잘 풀릴 것 같아.’
나는 싸늘한 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시며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모든 일이 톱니바퀴처럼 잘 맞물리니 든든함과 동시에 좋은 예감이 들었다.
준비가 매끄러웠으므로 출발일도 빠르게 잡혔다. 얼마나 빨랐느냐면, 본성에 도착한 바로 다음 날이었다.
겨울은 무서운 계절이라 언제 눈사태, 폭설, 혹은 몬스터들의 침공이 일어날지 모른다. 때가 왔을 때 빨리 떠나야 한다는 건 상식이라 나는 전혀 불만 없이 움직였다.
문제는 엘이었다.
“먀아아아아아!”
저를 두고 가려는 걸 어떻게 안 건지, 기사에게 안긴 엘이 전에 없이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하녀들이 자꾸 놓쳐서 기사에게 부탁했는데 그도 버거워하는 모습이었다.
“착하지, 엘. 금방 올게. 응?”
“가자, 미뉴엘. 차라리 눈앞에서 안 보이는 게 나아.”
“그, 그런가.”
라망드의 조언에 따라 도망치듯 돌아섰을 때였다.
“먀!”
고양이 액체설을 증명하는 것처럼 엘이 기사의 품에서 스르르 흐르듯 빠져나와 내게로 달려왔다.
코앞에서 펄쩍 뛰어오르는 엘을 반사적으로 받아 안으려 팔을 벌렸지만 녀석의 폭발하는 에너지를 간과한 것이 실책이었다.
쿵!
“크헉!”
배에 고양이 모양을 한 로켓이 날아와 박혔다.
“어휴. 하여간.”
라망드가 충격을 없애주는 동안 엘은 내 종아리 쪽에서 왔다 갔다 하며 몸을 비비기에 여념이 없었다.
“먀아아. 먀…….”
아까보다 확연히 힘이 없어진 소리에서 미안해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녀석이 얌전히 성에 남아 있을 것 같지 않다는 예감 또한 들었다.
“…이렇게 불안해할 줄은 몰랐는데.”
사용인들에게 맡겼다가는 눈 깜빡할 사이에 어디론가 튀어나갈 것 같았다. 그렇다고 바쁜 부모님께 맡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데리고 가는 것도 걱정이 안 되는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 싫어하는데 혼자 두기도 가엾었다.
‘어쩔 수 없네…….’
어쩌면 엘을 거두는 순간부터 예견된 일일지도 몰랐다. 반려동물이 생기면 여행을 가는 것부터 만만찮다고들 하니까.
나는 몰래 한숨을 삼키며 엘을 안아 들었다. 신기하게도 녀석이 내 품에 들어오자마자 골골, 하고 기분 좋게 목을 울리는 걸 듣자 걱정이 다 날아가는 듯했다.
‘뭐, 어차피 중요한 순간에는 나 혼자 들어갈 생각이었으니까.’
라망드도 언니도 다 두고 나 혼자서.
그러니까 그때만 둘에게 엘을 맡기면 될 것이다. 엘은 말을 알아들으니까 그때는 정말 잘 타일러볼 생각이었다.
* * *
우리는 북부에서도 최북단이라는 마을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우리 일행이 여관을 통째로 빌린 거라 나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거리낌 없이 식당으로 내려갔다.
아직 내려온 사람이 몇 없는 와중에 익숙한 얼굴이 눈에 띄었다.
“일찍 일어나셨군요. 소공작님은 바깥에서 수련 중이십니다.”
어머니는 엘가 언니로도 모자라 이번에도 부관을 내게 붙여주셨다.
“오랜만이야, 경. 어머니를 도와야 할 텐데 자꾸 내 뒤치다꺼리를 시키는 것 같네.”
“별말씀을요. 주군의 뜻을 따르는 것이 기사입니다.”
정석적인 답변에 웃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엘가 언니는 무릎까지 쌓인 눈을 직접 치우고는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눈사태 때문에 몬스터들이 빨리 내려왔다고 들었는데 생각보다 일찍 길을 떠나게 됐네.”
“이번 소탕이 빨리 끝난 건 대공께서도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원래 같이 가시는 거 아니었어?”
“엘가 아가씨께서 소공작으로 인정받으신 후로 대공께서는 거의 출정하지 않으십니다. 누군가는 대비하여 성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시거든요.”
그런데도 이번에 어머니가 함께하신 이유는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나를 위해서…….’
내가 서멘더에 있든, 로콰이트에 있든. 진짜 우리 집, 우리의 뿌리가 시작된 곳은 카르이넨 본성이니까.
내가 돌아올 곳을 지켜주시려는 마음이 손에 잡힐 듯 느껴졌다. 숨 쉬듯 익숙해진 사랑이지만 가끔은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데서 묵직하게 치고 들어왔다.
나는 엘의 이마를 간지럽히며 무거워진 숨을 가늘게 뽑아냈다.
“하지만 이번에 참여한 건, 제가 주군께 개인적으로 요청드렸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언니가 나왔는데 경까지…….”
그럴 확률은 낮겠지만 우리가 나와 있는 사이에 다시 한번 몬스터 웨이브가 시작되면 어머니나 이 부관이 병력을 지휘해야 할 텐데.
“왜냐하면.”
잠깐 컵을 만지작거리며 망설이던 부관이 다시 입을 열었다.
“10년 전, 저도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자리?
‘아.’
반문할 필요도 없이 그의 눈을 보는 순간 깨달을 수 있었다.
‘어머니의 부관도 정령석 주변을 지키던 기사 중 한 명이었구나.’
하지만 그게 뭐? 의아해하는 내게 부관은 긴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 정령석은… 10년 전에 잠시 탈취당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집에 있었던 거구나.”
“예. 되찾아 와서 새로운 봉인지로 옮기기 직전이었습니다.”
그때는 남부 지방에 유례없는 추위가 몰아쳤다고 했다.
황제의 빠른 판단으로 어머니를 비롯해 우리 기사들이 신속하게 움직일 수 있었고 주변 영주들도 최대한 도왔기에 금방 되돌아왔다.
하지만 그 짧은 기간에도 목숨을 잃은 사람은 엄청나게 많았다.
‘많이 힘들었겠어.’
지친 상태였을 테니 조그만 어린애를 놓칠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 착한 기사는 그렇게 넘기지 않았다.
조금만 더 눈을 부릅떴다면, 조금만 더 정신을 차렸다면 주군의 아이가 평생을 시달리지 않아도 됐을 거라 자책했다.
그의 시선이 내 장갑에 붙박였다.
“이제는 아가씨께서도 편해지셨으면 좋겠습니다.”
“꼭 그렇게 될 거야. 그러니까 경도 이제는 마음 편하게 가지도록 해.”
나는 그 장갑 낀 손으로 부관의 손등을 토닥였다.
“재앙은 돌고 돌아 축복이 된다는 말도 있잖아? 나는 지금까지 잘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예, 아가씨.”
부관은 잘 자란 아이를 보는 것처럼 대견해하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는 동안에 위층에서 라망드가 내려왔고, 엘가 언니도 눈 묻은 부츠를 털며 안으로 들어왔다.
“미뉴엘, 일찍 일어났네.”
맞은편에는 10년 전에 꼬맹이가 아파하던 것을 아직도 안타까워하는 착한 기사가 앉아 있고 품 안에는 따끈따끈한 엘이 있다.
그러니 이 세상은 아름다웠다.
나는 다시 한번 결의를 다졌다.
‘어떻게든 정령의 힘을 돌려주고 돌아오자.’
‘나’는 잘 살 것이다. 이 아름다운 세상에서.
* * *
마지막 마을까지는 눈이 잔뜩 쌓여 있었지만, 거기에서 나와 반나절 정도가 지나자 의외로 눈이 보이질 않았다.
낮은 풀이 가득 메운 땅 위로 차가운 바람만 가득했다.
바람은 풀이 사라지고 바위 위를 몇백 년이나 된 이끼들이 메운 지대에 들어서자 얼음 알갱이처럼 날카로워졌다.
“괜찮아, 미뉴엘?”
“괜찮아.”
그런데도 엘가 언니는 마차 안에 있는 나를 걱정했다.
‘지금 내 안에 있는 열기를 바깥에서 말을 달리는 사람들에게 전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끼 지대를 넘어가면서 바람이 다소 잦아들었다는 점이었다.
“여기는…….”
다만 땅 위에는 붉은 흙만 보일 뿐 아무것도 없었고 공기는 조금 눅눅했다.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는 사이 땅이 우릉, 울리며 저 앞에서 엄청난 물기둥이 솟구쳤다.
“간헐천이다.”
“멋지다…….”
물로 된 용이 승천하는 광경을 지켜보는 것 같았다. 동시에 정령에게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이 와닿았다.
하지만 황무지 지대도 여정의 끝은 아니었다.
땅 위에 드문드문 얼음이 보이나 했더니 곧 마차보다도 큰 얼음덩어리, 아니 빙하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길도 좁고 미끄러워졌다.
더는 마차를 탈 수 없는 상태.
나와 라망드는 밑창에 뾰족한 징이 달린 신발을 신은 뒤 내렸고, 마차는 기사 몇 명이 남아서 지키기로 했다.
“괜찮아, 미뉴엘?”
“괜찮아.”
라망드도 엘가 언니와 똑같았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드러난 피부가 빨갛게 얼고 속눈썹에 올올이 얼음이 맺히고 있었는데도 내 걱정을 먼저 했다.
나에게도, 모두에게도 다행히 그리 오래 걷지 않고 엘가 언니가 멈춰 섰다.
“여기다.”
동굴 입구가 거대한 빙하들 사이에 몸을 숨긴 것처럼 자리해 있었다.
“동굴 안에 정령을 봉인해 둔 돌이 안치되어 있다고 들었다.”
“나는 뭐… 불의 정령이니까 화산 안에라도 있을 줄 알았는데.”
한참 추운 지역을 거슬러 올라와 놓고는 뒤늦게 내뱉은 감상에 엘가 언니가 조금 웃었다.
“가장 차가운 것 안에 가장 뜨거운 것이 있는 법이라지.”
그건 오래된 주술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라고 했다.
내게 짧은 설명을 끝낸 엘가 언니는 곧바로 기사들에게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여기서부터는 미뉴엘과 나, 둘만 내려가도록 하겠다. 라망드 사제는 기사들과 함께 남아 비상 상황을 대비하도록 하고…….”
“아니, 언니. 잠시만.”
나는 서둘러 엘가 언니의 팔을 잡고 모두를 둘러보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