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먼저 소공작님의 권위를 침범하려는 의도는 없다는 걸 밝혀둘게.”
“여기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그런 생각은 하지 않는다.”
“알아. 그래도.”
사람 일이야 모르는 거니까.
“언니, 나는 혼자 내려갈 거야.”
딱 잘라 말했지만 사방에서 동시에 반대가 튀어나왔다.
“안 된다.”
“미뉴엘! 이런 말은 하고 싶지 않은데, 너 제정신이야?”
“안 됩니다, 아가씨!”
“먀!!”
…엘까지. 그러나 이미 이런 반응은 예상한 바였다. 나는 좀 더 단호하게 거절했다.
“여기 있어. 아니… 다 같이 좀 멀리 떨어진 데서 기다려.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는데 어떻게 너를 혼자 보낸다는 말이냐.”
“언니, 나 있잖아. 마지막 마을을 떠난 뒤로 한 번도 피를 흘리지 않았어.”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저 안쪽에서 뭔가가 나를 끌어당긴다. 그리고 그것에 가까워질수록 내게는 활기가 흘렀다.
“살면서 이렇게 힘이 넘쳐본 적이 없는 것 같아.”
발돋움해 언니의 뺨을 짚었다. 얼어붙은 언니의 피부로는 뜨거울 정도로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을 것이다.
빙하가 늘어서 있는 땅이다. ‘추위에 강한 체질’이라고 해도 설명할 수 없는 체온이었다.
“이럴… 수가.”
“그렇지?”
나는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느껴져. 정령은 나한테 호의적이야. 잘 풀릴 거야.”
“하지만!”
“같이 갈 수 없는 건, 힘이 어디로 튈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야. 10년 전에도 사막에 눈이 올지 누가 알았겠어?”
“…….”
“언니, 날 믿어. 잘 풀릴 거야.”
나는 주문처럼 반복해서 말했다.
잘 풀릴 거야.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었으므로.
갑자기 찾아온 활력은 도리어 미끼같이 느껴졌다. 마치 향기에 홀려 식충 식물 안으로 걸어 들어가도록 만드는 것처럼.
애초에 혼자 갈 셈이었지만, 그런 느낌 때문에라도 더더욱 엘가 언니를 데리고 들어갈 수는 없었다. 언니를 포함해 그 누구도.
“엘이랑 라망드를 부탁해.”
마지막 말처럼 들리지 않도록 주의하며 말하곤 언니를 껴안았다.
다음으로는 엘을 라망드한테 안겨주었다. 라망드가 많이 추워하고 있으니까 엘하고 체온을 나누면 조금이나마 낫겠지 싶어서.
단언컨대 이게 지금까지의 여정 중에 가장 힘든 일이었다. 엘이 내 옷에 발톱을 박고는 떨어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으니까.
“먁!”
고양이 말은 몰랐지만 이건 싫다는 뜻이 분명했다.
“누나 금방 다녀올게. 착하지? 우리 엘.”
“뮹.”
“정말이야. 약속해. 진짜로 빨리 돌아올 테니까.”
“먀아, 냐…….”
엘의 눈에 눈물이 어리더니 뚝뚝 떨어졌다.
동물의 애정이란 맹목적이라더니 엘의 애정이 딱 그런 것 같았다. 한 번 다친 걸 치료해 줬을 뿐인데 이토록 나를 따르는 걸 보면.
그래서 더 마음이 아파진 나는 엘의 엉덩이를 토닥거리며 잔뜩 뽀뽀를 퍼부어 줬다.
“오구, 슬퍼쩌요……. 누나가 미안해. 금방 올게. 응? 우리 엘이 한 번만 봐주면 안 될까?”
“냐, 냐앙…….”
한참을 뭐라고 냥냥거리던 엘이 드디어 발톱을 집어넣었다.
“고마워라. 역시 우리 엘은 똑똑하고 귀엽고 착하고 최고야. 그렇지이?”
또 한바탕 칭찬 세례를 해준 뒤 라망드에게 엘을 건넸다.
“네 품에 넣어서 안아줘.”
그런데 라망드와 엘, 둘이서 동시에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뭐? 싫어. 징그럽게.”
“냐앗! 캭!”
“봐. 얘도 싫어하잖아.”
“둘 다 정말…….”
사이좋게 지내라는 말은 다 소용없었다.
“알아서 해. 내가 빨리 돌아오면 되지, 뭐. 갔다 올게.”
나는 그대로 뒤돌아 미끄러지지 않도록 얼음 위를 조심조심 걸었다. 그리고 입구 앞에 손을 짚었을 때였다.
“미뉴엘!”
다급히 부르는 소리에 나는 라망드를 돌아보곤 피식 웃었다.
‘이럴 줄 알았지, 라 첨지.’
라망드는 옷 안에 엘을 꽁꽁 싸매듯 넣고 앞발 한쪽을 쥐어 인사하듯 흔들고 있었다.
“조심해서 다녀와.”
“냐아!”
하여간 둘 다 귀엽기 짝이 없다. 나는 활짝 웃으며 모두에게 손을 크게 흔들어 보였다.
그 뒤로는 다시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곧장 푸르스름한 동굴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얼음 동굴 안에는 광원이 없는데도 얼음들이 어슴푸레한 빛을 뿜고 있었다.
‘예쁘긴 정말 예쁘다…….’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신비한 광경을 둘러보며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갔다. 하지만 동굴이라면 갈림길이나 막다른 길이 있을 법도 한데 이상하게도 길이 하나뿐이라는 생각을 하던 찰나, 굉장한 난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참이나 걸어 들어왔는데 막다른 길목에 다다랐기 때문은 아니었다.
어느 틈을 따라서인지 미세한 물줄기가 흘러 고인 호수의 밑바닥. 얼마나 깊은지 황제의 비원에 있던 호수처럼 남빛으로 보이는 물 색깔에 소름이 끼쳤다.
그런데 아무래도 말이지.
“…이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건가?”
내 안에 자리한 힘은 거기라고 단호하게 가리키고 있었다.
‘가장 차가운 것의 안’이라더니 과연 그랬다.
“좀 봐주시면 안 될까요, 정령님?”
억지로 줬으면 가져가는 것 정도는 셀프로 해야 할 것 아니야. 인간적으로든 정령적으로든!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수면은 잠잠했다. 보통 뭘 돌려줄 때는 금도끼 은도끼의 신령님처럼 펑 하고 나타나서 상이라도 주는 게 정석 아닌가?
“저기, 그냥 기운만 빼내 가셔도 되는데…요.”
그만큼 깊은 물에 들어가는 건 싫었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건 욕탕의 물 정도라고!
직접 방법도 제시해 줬는데 울화가 사라지기는커녕 정령의 모습이 드러날 기미조차 없었다.
“거참 가혹하시네.”
잠시, 아니 솔직히 말해 한참 투덜거린 나는 심청이가 인당수에 뛰어들듯 치맛자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입수했다.
풍덩!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수영과 거리가 먼 사람이다.
뽀그르르르 소리가 난 후에는 암전이었다.
* * *
“분명 물에 빠졌는데.”
그런데 지금 나는 검은 연기에 둘러싸여 있었다.
옥상으로 통하는 비상구 계단 끝의 바로 아래층까지 불길이 넘실거리며 올라온 상태였다.
“이건…….”
익숙하기 짝이 없는 장소였다.
왜냐하면 내가 마지막을 맞았던 장소, 10년 동안 잊을 만하면 꿈에 나와 나를 괴롭혔던 장소니까.
“이게 무슨, 콜록!”
나는 기침이 나오자마자 몸을 숙이며 주저앉았다.
의미 없는 몸짓이었지만 지금은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어……?”
그런데 연기가 가득한 와중에도 불빛에 비쳐 어렴풋이 눈에 들어온 옷차림은 절대로 죽기 직전 입고 있던 옷이 아니었다.
‘정령석을 찾느라고 중무장한 차림 그대로잖아?’
잠시 멍하니 있던 나는 자다 깬 사람처럼 놀라며 길게 땋은 머리카락을 잡아당겨 확인했다.
“머리도…….”
분홍색이다.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당연히 튀어나온 가설도 믿을 수 없는 것뿐이었다.
1. 미뉴엘의 몸으로 이 세계에 차원 이동 당했다.
2. 꿈이다.
평소라면 당연히 2번이겠지만, 자욱한 연기 때문에 눈 코 입이 죄다 매운 고통이 지독하리만치 느껴지고 있었다.
‘정령의 장난인가?’
한참 기침하던 나는 3번 보기를 생각해 냈다.
이곳은 마침 화재가 발생한 곳. 당연히 불이 있었고 그렇다면 불의 정령이 힘을 미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꿈속의 불에도 손을 댈 수 있다면 말이지만.’
그런데 묘하게도, 무기력하게 기억을 반복해서 보여주기만 했던 그간의 꿈과 달리 지금은 내 생각대로 움직일 수가 있었다.
만약 이게 꿈이 아니라면 정령은 내 기억을 바탕으로 이 공간을 만들어낸 것일지도 모른다.
나를 위해 특별히.
- 부숴버릴까?
문득 성인식 날 분노에 휩싸인 내게 들렸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때는 이성을 붙잡고 있느라 고개를 저었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나를 위해 만든 무대라면 부숴주는 게 인지상정이지.”
그리고 또 다른 생각도 들었다.
이 공간이 정령이 나를 시험하기 위해 만든 것이라면, 기선을 제압하지 못할 경우 곱게 힘 찌꺼기를 돌려주고 끝내려던 계획이 틀어질 수도 있다.
‘그러니 최대한 건드릴 엄두도 나지 않도록 날뛰어야만 해.’
나는 맨 먼저 눈앞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 철문을 노려보았다.
소방 시설법 제10조에 따라 비상구 폐쇄와 차단은 불법이었지만! 굳게 잠겨 결국 나를 죽였던 철문.
‘이번에야말로 열어서 남은 한을 풀어야겠다.’
하지만 이렇게 밀폐된 공간에서 불길이 스멀거리고 올라오는데 아무런 대비 없이 문을 여는 건 안 될 일이었다.
갑자기 밀려드는 산소 때문에 갑자기 모조리 폭발해 버리면 그대로 끝일 테니까.
‘호흡기! 방화복!’
상상하며 마음속으로 부르짖자 잠시 후 호흡이 편안해졌다.
‘생각대로야.’
어느새 나는 방화복을 입고 호흡기 마스크를 낀 상태였다.
“이것도 되려나?”
공기의 흐름을 떠올리며 연기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그건 실패였다.
어쩔 수 없이 나는 한 장소를 강하게 상상하며, 동시에 앞을 가로막은 문짝이 뜯겨나가는 것 또한 상상했다.
우그극!
벽과 문 사이에 틈이 생기며 공기가 강하게 빨려드는 것이 느껴졌다.
반박의 여지 없이 엄청나게 위험한 상황이었다.
나는 제발 한 번만이라도 이 종잇장 같은 몸이 제대로 뛰어주기를 바라며 문 앞에 바짝 붙어 온몸을 잔뜩 긴장시켰다.
그리고 다음 순간. 어디 한번 해보라는 듯 앞이 뻥 뚫렸다.
나는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앞으로 뛰쳐나갔다.
콰아앙!
어마어마한 소리와 함께 충격이 내 등을 때렸다. 방화복을 입고 있는데도 온몸이 불타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의 열기마저 따라왔다.
하지만 일단…….
“사, 살았다.”
그 문이 열렸다. 영영 닫혀 있던 그 문이!
“살았다!”
나는 앞으로 엎어진 자세 그대로 데굴데굴 굴렀다.
“살았어. 살았다고……. 흐엉……. 엄마, 아빠, 언니!”
안 열리면 어쩌나.
어떻게든 그 공포를 누르고 상상에 집중했는데 살았다고 생각하니 뒤늦게 눈물이 막 나려고 했다.
- 못됐다, 못됐어! 떼잉, 쯧.
잔뜩 연기를 마신 것처럼 칼칼한 목소리가 머리를 찌르르 울렸다.
- 못된 계집애야, 하필이면 이어진 곳으로 여기를 생각하니?
문 안쪽에서 날름거리는 불길을 헤치고 어떤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전신이 불길로 이루어진 사람. 내 무릎에나 닿을 정도로 작은 사람의 형체였다.
나는 헹, 코웃음 쳤다.
“당연히 여기니까 선택했지.”
내가 빠져나온 곳은 바로 정령의 봉인지였다. 사방에 얼음과 물뿐인 그곳.
불은 연료가 없으면 더는 탈 수 없으니까.
‘가장 차가운 것 안에 가장 뜨거운 것이 있는 법이라지.’
물론 엘가 언니가 의도한 건 아니었겠지만 명백한 힌트가 되어주었다.
처음에는 소화전이나 소화기 같은 걸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만약 바깥의 건물들도 구현되어 있다면… 불길은 그것들을 잡아먹고 더 커질 테지.
그렇게 된다면 내가 이길 가능성은 더 작아진다고 판단했기에, 정령이 가장 약해질 법한 장소를 선택한 것이다.
나는 허리를 턱 짚으며 물었다.
“네가 정령이냐?”
못된 계집애 운운하니 내 입에서도 말이 삐딱하게 나갈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