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 말본새하고는.
“그쪽이랑 상관없잖아. 그러게 존댓말로 부탁할 때 곱게 나와서 힘만 쏙 빼가지 그러셨어?”
- 그게 됐으면…….
“뭐?”
- …….
무슨 정령이 이렇게 파이팅이 없어?
사막에 눈을 내리고 날 10년이나 시달리게 했으니 뭐 엄청 무서울 줄 알았는데, 영락없이 학습지 밀린 어린애였다.
정령은 자리에 주저앉아 연신 한숨만 내쉬었다. 불길로 이루어진 입 속에서 수증기 같은 연기가 폴폴 솟구쳤다.
“여기는 현실이야? 아니면 꿈이야? 그것도 아니면…….”
- 당연히 현실이지. 아둔하기는.
“그렇게 아둔한 사람한테 한 방에 당한 정령은 무슨 정령인가? 물의 정령인가?”
- 못된 계집애. 감히 불의 지배자에게 못 하는 말이 없구나.
“이게 현실이면 난 영락없이 죽을 수도 있었잖아. 그런데 지배자면 뭐? 그런 게 눈에 들어오겠어?”
정령은 나와 똑같이 팔짱을 끼며 고개를 팩 돌렸다.
- 그대로 죽으면 그 몸을 내가 홀라당 쓸 생각이었지.
“남의 몸을 누구 마음대로?”
- 어차피 그건 원래 네 것이 아니잖아. 그냥 껍데기 아니냐?
이게 진짜.
눈이 뒤집힐 것 같았지만 꾹 참았다.
“…이건 내 몸이거든. 10년이나 살아온 내 몸.”
나는 절대 이 몸을 뺏길 수 없었다. 내 소중한 사람들을 잃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거짓말 작작 하시지? 아까, 그리고 지금. 이게 모두 현실일 리 없어. 똑같은 건물에 대화재가 두 번이나 발생할 리가.”
게다가 원하는 물건이 뿅뿅 나타나다니. 마법이라고 해도 정도가 심했다. 나도 꿈이라고 생각했기에 상상할 엄두를 냈던 것이고.
“하아. 됐고, 빨리 내 안에 있는 불의 힘이나 가져가도록 해.”
- 그건 좀 곤란해.
“왜? 정령은 힘이 엄청난 거 아니었어? 빨리 이거 가져가고 불의 교단 놈들을 쳐부수란 말이야.”
게으름 부리지 말고.
- 내가 힘을 제대로 쓰려면 계약자가 필요해.
“…….”
쪼그려 앉은 정령을 빤히 보던 나는 딱 잘라 말했다.
“난 안 해.”
- 뭐? 왜! 정령하고 계약하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데!
“그거야 네가 너무 재수 없으니까 그렇지.”
힘도 제대로 못 쓰는 주제에 사람을 농락해? 무릇 계약이란 서로가 조건을 조율하고 최고의 합의점을 찾아 체결하는 것이거늘.
10년 고생에, 몸을 빼앗으려는 시도에, 나타났을 때부터 삐딱한 태도까지. 대체 뭘 믿고 그러는지 모를 정도였다.
- 나하고 계약하지 않으면 그 교단 어쩌고가 설칠 거라고!
“불의 정령으로서 부끄럽지도 않아? 그놈들은 너를 반쯤 사칭하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네 힘까지 이용하는데.”
정령은 아예 몸을 모로 틀어 앉았다.
- 씨잉. 협박하면 된다고 했는데.
누가 가르쳤는지는 모르겠지만 완전히 헛짚었다, 이거야.
나는 코웃음과 함께 정령을 다그쳤다.
“웃기셔, 정말. 네가 힘을 제대로 쓰는 건 네 문제고. 나한테 남긴 거나 가져가, 냉큼!”
- 그, 그건…….
“말꼬리 늘이지 말고 빨리 말해라. 인간이 참아주는 데도 한계가 있어, 정령.”
불길 사이에서 떠올렸던 생각은 희한하게도 잘 맞아들어 가고 있었다.
정령은, 그렇게 힘이 세다는 정령은 기선을 제압당해 나를 한입에 삼키기는커녕 쪼그려 앉아서 쫑알대는 게 고작이었다.
- 실은 뺏겼어.
“뭐?”
- 10년 전에 뺏겼던 힘이 다 회수되지 않았어…….
“뭐어?”
그때부터 정령의 신세 한탄이 시작되었다.
10년 전. 정령의 힘은 세 조각으로 갈라져서 정령석을 탈취했던 자들에게, 정령석을 만진 내 몸에, 그리고 정령 본인에게 깃들었단다.
내 몸에 남긴 것은 그렇다 치고, 빼앗겼던 힘이 세월이 흐름에 따라 조금씩 제자리로 돌아오고 있었으므로 안심했는데.
최근 들어서 그쪽의 힘이 급격히 커지며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지금 남은 힘도 빼앗길지 모르게 되었다고 한다.
- 그래서 씨앗을 심어놓은 네 몸을 차지하려고 했는데! 흐엉엉!
정령의 눈에서 작은 불씨들이 뭉쳐 땅으로 틱틱틱 떨어졌다.
나는 기겁하며 물러섰다.
- 도와줘, 인간.
“내가 왜? 정령의 일은 정령끼리 알아서 처리해.”
- 내가 힘을 되찾아야 자연스럽게 네 몸에 남긴 것도 나한테 넘어오는 거란 말이야.
“아니지. 내 몸부터 제대로 만들어줘야 할 마음이 생기지.”
- 지금 그 상태라면 너는 앞으로 3년도 못 살아!
머리칼을 꼬며 빈정거리던 내 동작이 뚝 멎었다.
‘이번에는 시한부냐…….’
‘공녀가 힘을 숨김’으로 바꿔달래도 그러네.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3년 남았다는 수명도, 지금 이 힘을 가져가지 못한다는 말도 반신반의였다.
“내 몸에 있는 것부터 뽑아가. 우리 영지가 엮인 일이라 어차피 나는 너를 도울 수밖에 없어.”
- …….
“진심이야.”
- 그러니까 못한대도…….
또 눈물처럼 불씨가 마구 흘러넘쳤다.
‘적어도 못한다는 말은 진짜인가.’
혹시 모르니 브라시다스와 연락해 뭔가 금제라도 걸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끝내 승낙했다.
“어쩔 수 없지. 계약이란 거, 하든가.”
- 정말?
“맘 바뀌기 전에.”
- 아냐! 아냐!
물속에서 돌연 한 아름도 넘을 크기의 바윗덩어리가 치솟아 올랐다.
“이게 그거야? 정령석?”
- 그래.
정령의 입가가 히죽 벌어지며 말했다.
- 이걸 삼켜. 그러면 돼.
정령석의 크기가 서서히 줄어들더니 알약 크기로 변해서는 내 눈앞에서 매력적인 빛을 내며 반짝거렸다.
별생각 없이 손을 뻗으려던 나는 잠시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원래 미뉴엘은 이것에 딱 한 번 손을 댄 것만으로도 사망했지.’
갑자기 정령석이 유통 기한 지난 불량 식품으로 보였다.
나는 한쪽 눈썹을 세우며 물었다.
“사기 치는 거 아니지?”
- 아, 아닌데!
“정령으로서 네 존재를 걸고 맹세해 봐.”
그러자 정령의 몸에서 불길이 확 치솟더니 머리를 울리는 목소리가 한층 커졌다.
- 정령에게 존재를 건다는 게 무슨 뜻인 줄 알고 감히!
‘오호라.’
딱 께름칙한 부분을 찔리고 그것을 숨기려 화를 내는 듯한 반응이었다.
나는 정령이 발끈하는 것을 무시하고 꿋꿋이 밀어붙였다.
“네가 네 존재 아니면 걸 만한 게 뭐가 있는데?”
- 그, 그건…….
푸슈슉, 불길이 작아지며 원래 크기로 돌아갔다.
아무래도 이 정령에게는 눈앞의 문제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는 듯했다. 고심하는 녀석에게 나는 애써 코웃음을 삼키며 험악하고 진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래서 뭘 걸겠다고? 나는 내 돈 모두하고 손모가지를 건다.”
와, 내가 이 대사를 쳐보는 날이 다 있네.
살짝 감개무량해진 내게 순진한 질문이 날아왔다.
- 손목은 왜?
“그, 그런 게 있어! 네가 뭘 걸지나 말하라니까!”
- 으으음…….
정말 탈탈 털어도 먼지밖에 안 나오는 정령이구나.
‘이런 거에 내가 십 년을 시달렸다니.’
나는 이제 한숨을 쉬는 대신 짝다리를 짚고 섰다.
“결국 사기 친 거 맞네.”
- 아, 아니라니까!
“아니긴? 이게 어디서 밑장빼기야? 내가 빙다리 핫바지로 보이냐?”
- 빙다리 핫바지는 또 뭐…….
“아, 넘어가, 좀!”
사자가 크왕, 하듯이 째려보자 정령의 어깨가 움찔하며 한층 더 좁아졌다.
- 말해 주면 어디가 덧나나……. 나는 여기서 갇혀 살기만 해서 인간 세상에서 유행하는 건 잘 모른단 말이야…….
시무룩해진 목소리. 쪼그려 앉는 폼이 조금만 더 있으면 땅도 팔 것 같은 분위기였다.
쯧.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기죽은 어린애처럼 굴면 마음이 약해진단 말이다.’
“꼭 정령석을 먹어야 해?”
- 그래야 내가 계속 곁에 머무르지.
“뭐, 그런 거라면 간단히 세공해서 내가 항상 지니고 다니면 되는 거잖아.”
- 이 답답한 인간아!
정령이 발딱 일어나 바닥에다 대고 탕탕! 발을 굴렀다.
답답하게 여기는 것도 알겠고 내가 인간인 것도 맞는데 묘하게 욕 같네.
- 너하고 ‘동화’가 되어야 한다고!
“동화?”
- 그래. 언제든 너와 힘을 나누고 네게 스며들 수 있도록 하는 게 정령석이야. 내 집이나 다름없는 거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등줄기가 오싹했다.
불행 회로를 돌려보자면 즉, 재수 없으면 정령에게 몸을 뺏길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물론 지금 당장은 괜찮겠지. 하지만 내가 의식을 잃거나 해서 이 몸의 주도권을 놓치면?
‘저 녀석, 분명 얼씨구나 하고 전면에 나서서 휘젓고 다니겠지.’
당연히 아닐 수도 있지만, 지금껏 등장인물이 몸에 다른 인격을 품고도 멀쩡했던 소설을 본 적이 없다고!
게다가 내게는 내 가족들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있지만 정령은 아니었다.
자신의 힘을 찾으려 수단 방법 가리지 않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내 가족이 갈려나간다고 생각하니 싸늘해진 몸에서 저절로 열이 뻗쳤다.
“이 정령 놈이!”
나는 득달같이 정령의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었다. 눈치를 살피다 날벼락을 맞은 정령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 악! 조용히 있더니 갑자기 뭐야! 정령 살려!
또다시 정령의 눈에서 작은 불씨들이 틱틱틱 뿜어졌다.
“으악.”
피해야지,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둔한 몸은 따라주지 못해서 절반 이상이 내 팔로 떨어졌다.
반사적으로 뜨거움을 예상하며 눈을 감으려던 찰나, 불꽃이 옷을 태우기는커녕 팔을 통해 슥 스며드는 모습이 보였다.
‘아…….’
그러고 보니 마력이 섞이지만 않으면 내가 흡수할 수 있는 거였지. 분명 알고 있는데도 겁나는 것이 앞섰다.
- 이것 놔, 인간아.
또 생각해 보면, 정령도 불로 이루어진 놈인데 멱살을 잡은 손도 전혀 뜨겁지 않았다.
새삼스럽게 깨달은 사실에 내가 멍하니 눈만 깜빡거리고 있자 정령은 다 포기한 것처럼 몸을 축 늘어뜨렸다.
- 인간 주제에 왜 도통 걸려들지를 않는 거야.
“…….”
- 사기꾼은 내가 아니라 다른 정령들이야. 다들 끔뻑 넘어갈 거라고 해놓고선 이럴 때는 코빼기도 안 비추네.
“인간은 인간인데 플렌드나의 은총을 입은 인간이지.”
너 잘못 걸린 거야.
말하는 걸 보아하니 정령치고는 어린 축에 드는 것 같다. 하기야 그러니까 인간들한테 치이고 집도 뺏기고 하는 거겠지.
- 플렌드나라……. 확실히.
정령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칫, 하고 혀 차는 소리를 흘렸다.
“남의 집 탐나는 소 보듯 하지 말아줄래?”
- …이제 편하게 네 몸 뺏을 생각은 안 할 테니까 이거 놓고 계약이나 해.
말이 끝나자마자 허공에 붉은 글씨들이 서서히 아로새겨졌다.
맨 위에 적힌 글자는.
[계약서]
‘과연.’
정식으로 계약을 할 수도 있는 거구나. 어째서 그간 뒤진 책에 이런 말이 없었던 것인지 의문이었다.
- 맨 밑에 서명하면 돼.
“기다려.”
현대에도 계약서에 대충 사인했다가 피 보는 사람이 얼마나 많던가.
나는 정령이 재촉을 하든 곡을 하든 개의치 않고 한 글자 한 글자 꼼꼼히 읽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