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이봐, 정령.”
- 이번엔 또 왜!
“어째서 계약서에 내 의무만 있는 건지 설명해 보시지.”
정령이 원래의 힘을 회복하도록 최선을 다한다.
뭐 그 정도야 당연한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편안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한다.’라는 끔찍하게도 애매한 조항이나 ‘한 달에 한 번 화산에 방문해야 한다.’ 등의 터무니없는 조항을 대체 어떻게 지키라고?
무엇보다도 나한테 돌아오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점이 최악이었다.
“나도 힘을 쓰게 해준다든가, 유사시에 내 가족을 보호한다든가, 내 건강을 회복시킨다든가! 왜 이런 조항은 하나도 없는 건데?”
- 그, 그건 계약하면 당연히 수행하는 거잖아. 나 제법 양심 있는 정령이야!
“양시임? 티끌만도 못한 네 양심을 믿으라고? 두 번이나 나를 홀라당 삼키려고 했으면서?”
- 아, 그때는 그때고. 좋게 좋게 갑시다, 좀.
나는 어느새 까끌해진 입 안을 혀끝으로 훑었다. 이 정령, 내 태도를 학습하는 게 분명했다.
‘그럼 더 세게 나가 주지.’
계약서에 서명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니까.
“하하. 좋게 좋게? 좋게 좋게 밑장 빼시려고?”
- 그거 사기 친다는 말이지? 나도 이제 알아! 사기 안 친다고!
이게 어디서 눈 또옥바로 뜨고 대들어?
“그럼 조항 추가하시면 되겠네. 아니야?”
- 인간과 정령 사이에 믿음이 있어야…….
“아, 됐고. 쫄리면 뒈지시든가.”
- 뭐, 뭐라고?
“싫어? 그럼 나 이 계약 안 해. 그냥 끝내! 불의 교단인지 뭔지, 사이비놈들이 다 가지라고 해. 난 몰라!”
- 그, 그러면 다 죽는 거야. 너도 알잖아!
“어차피 인간은 다 죽어. 게다가 나는 3년밖에 안 남았다면서? 그 뒤는 알게 뭐람?”
흥! 커다랗게 콧방귀를 날려주고 휙 돌아섰지만 정령은 의외로 입만 딱 벌린 채 더 반응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에사디엔에게 학습된 몸이다.
‘이럴 땐 아예 박차고 나가는 것까지 보여줘야지.’
아니나 다를까 박차고 나가기는커녕 딱 두 걸음 떼자마자 반응이 왔다.
- 아, 알았어!
“…….”
- 알았다고…….
나는 돌아보지 않은 채 물었다.
“내가 원하는 조항은 다 넣는 거지?”
- …그래.
“내가 빼고 싶은 조항들도 빼는 거지?”
- …았어.
“왜 대답이 안 들리지? 내 귀가 막혔나?”
- 알았다고 했잖아! 계약서 고쳐! 고치라고!
“진작 그럴 것이지.”
나는 그제야 회심의 미소와 함께 돌아섰다.
-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이 정령 밑천 다 가져가네! 아이고오!
조항이 하나씩 빠지고 수정되고 추가될 때마다 정령이 곡소리를 냈지만 전부 무시했다.
지금은 이 녀석이 이렇게 어리숙해도 금방금방 내 태도를 따라 하는 걸 보면 인간 세상으로 나갔을 때 금세 능구렁이가 될 게 뻔했으니까.
게다가 힘을 되찾고 나면 어마어마한 힘에 노회함까지 갖춘 진짜 불의 주인이 될 텐데. 나는 정말 최소한의 안전장치만 거는 거였다.
“뭐, 이 정도로 할까.”
힘을 모두 되찾은 후에도 미뉴엘 카르이넨 및 그의 혈족과 관계자들에게 손대지 않는다.
그 조항을 마지막으로 거의 누더기가 된 계약서에 이만 서명을 해 넣었다.
슈우욱.
마지막 선을 긋는 순간 열기 어린 바람이 일며 계약서의 글자들이 흩날렸다.
그 사이를 가르듯 정령의 목소리가 다시 머리를 울렸다.
- 나, 정령 ―는 미뉴엘 카르이넨을 내 존재의 파트너로 인정하는 바이다.
길고 복잡한 이름이 순식간에 지나가고, 곧 날아가 사라질 줄 알았던 글자들은 끈 형태를 이루어 정령과 나를 칭칭 엮었다.
“오오…….”
신기해하는 나에게 정령이 한껏 예민해진 목소리로 경고했다.
- 입 벌리지 마! 아까운 기운 빠져나가니까!
“넵.”
지금은 한 톨의 힘도 아까울 테지.
정령의 경고대로 입을 딱 다물자마자 열기가 점점 몸 안으로 밀려들어 오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가기를 반복하며 내 정신을 쏙 빼놓았다.
“읏…….”
손끝, 발끝부터 시작된 불길이 모세 혈관을 타고 올라오는 듯한 느낌.
오랜 시간 나를 괴롭히던 울화가 그 불길에 합세하는 것도 금방이었다.
마치 횃불 같던 두 기운이 만나 커다란 불기둥을 낳고, 그것은 거칠 것 없이 내 온몸을 누비기 시작했다.
막히는 부분이 있다고 해도 돌아서는 것이 아니라 쾅쾅 깨부수고 뚫으며 기어이 불의 기운이 내 몸을 일주했을 때.
“커흡, 헉.”
나는 시커먼 피를 한 바가지나 토해 냈다.
“아니, 무슨 피 색깔이 이래?”
각혈 전문가인 나지만 이런 색은 처음이었다. 아무리 죽은 피라고 해도 그렇지.
또다시 정령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려던 찰나, 녀석이 혀를 쯧쯧 차며 손가락을 튕겼다. 동시에 살짝 탄 냄새가 스치며 토해 낸 피가 재로 변해 흩날렸다.
- 대체 어떻게 살면 몸에 노폐물이 이렇게 쌓이는 것이냐? 운동이란 걸 해라, 이 인간아.
“너 자꾸 나한테 욕하는 거… 어라?”
‘인간아’의 찜찜함을 더 넘기지 못하고 따지려던 순간이었다. 손가락질하려던 팔이 이상하게 가벼웠다.
“어어?”
온몸이 다 가벼웠다. 어깨며 정수리에 쇠로 된 추를 매단 것 같던 느낌이 싹 사라졌다. 항상 속이 얹혀서 답답하게 느껴지던 감각도.
말 그대로 새로 태어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따뜻해.”
떨리는 손을 가슴 위에 올리자 명확하게 느껴졌다. 심장이 뛰는 박자에 맞추어 따뜻한 기운이 회전하고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것의 정체를 깨달았다.
‘불의 정수…….’
이제 이건 울화 따위가 아니었다. 약간의 감격과 함께 정령을 바라보자 녀석은 한껏 의기양양한 몸짓을 보였다.
- 내가 이 정도거든? 계약서에 안 넣었어도 해줬을 거야. 이 정령을 믿어주시라니까요?
그 말을 들으니 살짝 생기려던 신뢰가 파스스 흩어졌다. 나는 눈썹을 구기며 물었다.
“아까 느꼈던 것보다 기운이 좀 줄어들었는데. 어떻게 된 일이야?”
그런데 움찔할 줄 알았던 정령이 이번에는 물러서지 않고 바락바락 대들었다.
- 어디서 밑장 빼기야! 원래는 내가 더 많이 갖고 있어야 하는데 네가 고쳐서 계약 유지 중에는 5:5로 하기로 했잖아!
정령의 입에서 ‘밑장 빼기’라는 말이 나오다니. ‘밑장’이 뭔지는 아나, 싶어져서 헛웃음을 뿜을 뻔했지만 겨우 참았다.
“아, 그랬지. 그러면 나는 내 몸에 있는 힘을 전부 쓸 수 있는 건가?”
- 아직은.
떼잉, 쯧. 이번에는 내가 정령의 대답을 듣고 시무룩해졌다.
‘역시 먼치킨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닌가.’
아무리 그래도 불을 다루는 존재와 계약했으니 레벨 2에서 60으로 오를 정도는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 너무 그렇게 실망하지 마. 힘의 크기도 크기지만, 일단은 지금 가진 걸 쓸 수 있도록 숙련하는 게 우선이니까.
“예이, 예이.”
- 흘려듣지 말란 말이다, 이 인간아!
…성에 돌아가자마자 호칭 정리부터 해야겠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싫다고 떼쓰는 정령을 어르고 달래 정령석 안으로 들여보냈다.
언젠가는 불의 교단에서도 정령과 내가 손을 잡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테지만 이쪽의 수는 감출수록 좋은 법이다.
* * *
정령을 집어넣고 동굴 밖으로 나왔더니 사방이 깜깜했다.
‘벌써 해가 진 건가?’
안에서는 정령하고 입씨름하느라 시간의 흐름을 미처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가로막는 것 하나 없이 탁 트인 남빛 하늘에 빼곡히 박힌 별이 경이로웠다.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이윽고 정신을 차리고 발걸음을 옮겼다.
“다들 어디… 아, 저쪽이구나!”
일행들의 위치는 금세 찾을 수 있었다. 저 멀리 은근한 숯불처럼 작고 붉은 빛이 점처럼 보였다.
인가 하나 없는 곳에서 불을 피우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우리 일행들이겠지.
그쪽을 똑바로 바라보며 걷기를 얼마간. 간이 텐트와 모닥불 주변에서 불침번을 서던 기사들이 내 접근을 알아챘는지 조용히 가라앉았던 일행의 분위기가 소란스럽게 튀었다.
“미뉴엘!”
물론 엘가 언니와 라망드는 가장 먼저 내게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을 보자 정령의 환상을 깨부수고 나오며 느꼈던 벅참이 다시 한번 찡하게 차올랐다.
나는 괜히 코밑을 쓱 쓸며 웃고는 장난스럽게 경례하며 외쳤다.
“미뉴엘 카르이넨, 복귀합… 으악!”
“우리 막내!”
하지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도착한 엘가 언니가 나를 안아 들더니 빙글빙글 돌렸다. 처음에는 나도 웃었지만, 어쩐지 점점 가속도가 붙는 탓에 결국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아악! 언니! 언니! 무서워! 언니!”
그제야 언니는 나를 놓아주었지만, 겨우 땅에 발이 닿기가 무섭게 뒤이어 도착한 라망드가 나를 으스러트릴 듯 껴안았다.
“금방 온댔으면서.”
“먀먕!”
라망드의 품에서 머리를 쏙 내민 엘도 함께 항의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마에 쪽쪽 뽀뽀해 주자 언제 그랬냐는 듯 턱을 핥아왔다.
“다친 데는?”
“배고프지 않아?”
격한 포옹도 잠시. 곧 나를 마차에 태운 언니와 라망드가 번갈아서 물었다.
“괜찮대도.”
나는 멍하니 엘을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조금 피곤하기는 했지만 지금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정말 내가 들어간 지 하루가 지났다고?”
“그래. 얼마나 걱정했는데.”
북쪽이니 해가 빨리 지는 것을 고려해 단 몇 시간이 지났을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 추운 곳에서 야영이라니. 다들 몸 상하려고 작정했어?”
“라망드 사제가 모두의 체온을 유지해 주었다. 덕분에 동상에 걸린 사람도 없고.”
그래도 그렇지.
게다가 언니는 하룻밤이 지나도 내가 나오지 않자 동굴에 들어가려고 했단다.
하지만 내가 들어갔을 때는 아무렇지 않게 통과했던 입구에 다른 사람의 접근을 거부하듯 보이지 않는 벽이 생겨서 실패했다고.
그걸 내리치느라 검마저 부러졌다는 소리에 나는 끝내 목덜미를 붙잡았다.
“언니! 그, 그거 우리 가문 상징……!”
카르이넨 가문의 문장과 똑같은 엘가 언니의 검. 내 펜던트와는 달리 소가주가 되면 받는 찐! 가보였다.
하지만 언니는 담담하기만 했다.
“검은 또 만들면 된다.”
“또 만든다고 그게 그거랑 같아?”
“가주가 가보라고 하면 그게 가보다. 어머님이라도 그러셨을 거다, 미뉴엘. 사람 나고 검 생겼지, 검 생기고 사람 났느냐.”
“그, 그렇기는 한데.”
우리 언니가 원래 이렇게 달변이었나?
“한데?”
“그래도 언니는 가문을 이을 사람이잖아. 무턱대고 그렇게 뛰어들려고 하면 어떡해?”
“나는 강하다, 미뉴엘.”
물론 엘가 언니는 정말, 매우, 엄청나게 뛰어난 기사지만 그 검이 정령마저 가를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