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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 영애 집착을 시작합니다 (62)화 (62/130)

62화

여전히 부루퉁한 얼굴의 나를 보며 언니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널 구하지 못하고 끝난다면 내 능력이 거기까지라는 거겠지. 다행히 쥬엘라가 있으니 가문을 잇는 데도 문제없을 테고.”

“언니! 그게 지금 말이야, 팻말이야!”

엄청 사랑하는 남편도 있으면서!

나는 끝내 화를 내고야 말았다. 그러나 언니는 전에 없이 정색하며 받아쳤다.

“언제고 위험한 상황에 뛰어들려거든 지금부터 내가 할 말을 떠올려라.”

“뭐?”

“네가 무사히 돌아온 건 정령과 무언가 합의를 했다는 뜻이겠지.”

언니는 무슨 광고에 나오는 사람 같았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너는 그토록 약하면서도 무모한 기질을 가졌지. 그런 네 손에 힘이 들어왔다. 그것도 무르익지 않은 힘이.”

“엘가 언니, 난…….”

“어머니도 말씀하셨겠지만 우리는 널 가둘 생각이 없다. 다만 네가 우리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면.”

잠시 말을 멈춘 언니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악문 이 탓에 턱선이 도드라졌다. 무언가를 참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카르이넨의 그 누구도 더는 가문을 지킬 생각 따위 하지 않을 것이다.”

어마어마한 선언에 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그대로 굳어버렸다.

‘원작에서도 미뉴엘 때문에 몰락했는데.’

이제는 아예 명맥도 잇지 않겠다니! 그것도 나 때문에!

“쉬어라.”

언니는 희게 질려버린 나의 머리를 한 차례 쓰다듬고는 자리를 떴다.

나는 거기에 답하는 것도, 엘을 쓰다듬는 것도 잊고 한동안 뻣뻣하게 앉아 있었다. 보다 못한 라망드가 토닥여줄 때까지.

“뭘 새삼스럽게 놀라고 그래. 누님들도, 아버님과 어머님도 너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잖아. 너도 그러면서.”

“그건 그렇지만…….”

문제는 위험한 일에 휩쓸리지 않을 자신이 없다는 거였다. 언젠가는 불의 교단과 정면으로 맞붙게 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예감마저 드는 판국이었으므로.

“왜? 설마 정령이 네 목숨이라도 요구한 거야?”

순식간에 라망드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그러자 지금까지 있는 듯 없는 듯 얌전히 안겨 있던 엘이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먀?!”

“아, 아니야.”

목숨을 요구했다기보다는 홀라당 먹힐 뻔했지.

서둘러 손을 내저었지만 미진한 기색이 묻어 있었나 보다. 라망드도 엘도 의심을 거두지 않은 채 계속해서 추궁했다.

“정말 아니야? 당장 불러내. 내 신성력을 다 소진해서라도 봉인해 버리게!”

“미야! 먀먕!”

이럴 때는 뭐니 뭐니 해도 오리발이 최고다.

“아니래도! 얘들이 정말.”

그런데 라망드가 워낙 내 속을 투명하게 들여다보는 녀석이다 보니 자칫하면 구구절절 안에서 있었던 일을 읊겠다 싶어진 나는 냅다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라망드, 언제부터 언니들을 누님이라고 부른 거야?”

문득 돌아볼 때마다 라망드는 카르이넨 일족과 눈에 띄게 가까워져 있었다.

“그러게.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네.”

대답 끝에 작은 코웃음이 묻어 나왔다. 일단은 넘어가 준다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나는 모른 척 싱글벙글 웃으며 라망드의 손을 답삭 잡았다.

“잘했…어?!”

사실 내가 이어 하려던 말은 이거였다.

‘잘했어. 진짜 남매가 된 것 같아서 너무 좋다.’

하지만 따끔할 정도로 차가운 라망드의 체온이 모든 것을 얼려버렸다.

“피곤할 텐데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네. 나갈 테니까 쉬도록 해.”

라망드는 내가 움찔한 것을 깨닫고 드물게도 어색하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나는 그의 손을 놓지 않고 확 잡아당겼다.

“미, 미뉴엘?”

“가만히 있어, 라망드.”

모닥불처럼 불그스름한 빛 옆이었으면 몰랐겠지만 밝은 마법 등 아래에서 가만히 들여다보니 라망드의 눈 아래에 푸른 그늘이 져 있었다.

“너, 무리했구나.”

많지 않은 인원이었지만 이 추운 곳에서 모두의 체온을 유지하느라 얼마나 많은 신성력을 소모했을까.

‘그렇지 않아도 추위에 약한 애가.’

“미안해. 이제야 알아채서.”

“무슨 소리야. 나 멀쩡하거든?”

이번에 코웃음을 치는 사람은 나였다. 여전히 라망드의 손은 차디찼고 이제는 미세한 떨림마저 느껴졌으니까.

나는 라망드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의 팔을 조금 더 세게 당겼다.

“이리 와.”

조금 버티는 것 같던 팔에서 힘이 쭉 빠졌다. 뭐에 홀린 것처럼 순순히 내 옆에 붙어 앉은 라망드에게 나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이제 이 누님한테 맡겨!”

금세 따뜻하게 해줄 테니까.

하지만 두어 번 눈을 깜빡인 라망드는 허탈한 웃음과 함께 핀잔만 내뱉을 뿐이었다.

“누님은 무슨.”

“멋있으면 누님이지!”

내가, 마! 정령이랑 계약도 하고, 으이? 정령도 울려보고. 다 했어!

“자, 멋진 누님한테 안겨봐.”

나는 활짝 웃으며 양팔을 벌렸다.

라망드가 열에 들뜬 나를 온몸으로 감쌌던 것처럼 나도 추워 떠는 그를 안고 따뜻하게 해주고 싶었다.

물론 효율의 문제도 있었다. 넓은 면적으로 데우는 편이 훨씬 빠를 테지. 라망드처럼 손만 대서 치료하기를 시도하기에는 내가 너무 초보였다.

‘괜히 고생한 애 화상 입힐라.’

그렇게 요모조모 배려했건만 라망드는 삼 년 묵은 때라도 미는 것처럼 얼굴을 벅벅 문지르더니 내 팔을 착착 내렸다.

“됐다. 잠이나 자.”

마구 문질렀던 탓인지, 아니면 추위 때문인지 라망드의 뺨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목소리는 또 어떻고? 이대로 나가서 자면 바로 몸살을 앓을 것처럼 칼칼하게 가라앉은 주제에.

‘얘가 왜 이러지?’

우리는 며칠 전만 해도 서로 기대고 위로해 준 사이 아니냔 말이다.

눈을 가늘게 뜨고 라망드를 바라보다 문득 어떤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라망드, 너 혹시 그분하고 잘된 거야?”

“그분?”

“네가 좋아하는 사람 말이야. 떠나오기 전에 고백한 거야?”

“이 상황에 그 얘기가 왜… 아.”

어리둥절한 듯 커졌던 보랏빛 눈이 점점 말을 이을수록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너는 진짜.”

쯧, 짧게 혀 차는 소리가 나나 싶더니 다음 순간 나는 라망드의 팔 안에 갇히며 그의 어깨에 이마를 부딪혔다.

“으억!”

봉변을 당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다가오지 말라는 것처럼 반쯤 일어서서 라망드에게 솜방망이 날리는 시늉을 하던 엘도 우리 사이에 끼어 비명을 질렀다.

“미약!”

그리고 뭐가 번뜩, 하더니 라망드의 입술 바로 옆에 붉은 선이 짙게 그어졌다. 거기에 송골송골 핏방울이 맺히기 시작하자 나는 다급하게 손수건을 꺼내 상처 위를 눌렀다.

“라망드, 피 나!”

하지만 나와 달리 언제 인상을 썼냐는 듯 라망드는 침착하기만 했다. 그의 손이 내 손을 사이에 둔 채 손수건을 더 지그시 압박했다.

“괜찮아.”

“괜찮기는! 엘, 너 이 녀석!”

신성력의 잔인한 점은 본인에게 사용하면 효율이 매우 떨어진다는 것이다. 아마 이틀간 기사들의 체온을 유지한 만큼의 신성력을 써야 이 상처가 아물 것이다.

화가 잔뜩 났지만 엘은 그걸 모르는 것인지, 모르는 척하는 것인지 으르렁거리며 손수건을 쥔 쪽의 팔을 머리로 마구 밀었다.

‘떨어지라는 건가?’

물론 들어줄 생각은 없었다.

내가 없는 동안 라망드의 품에서 지낸 것 같은데 갑자기 왜 이러는 건지 몰라도, 한 번 두 번 가볍게 받아주다 보면 나중에는 하녀들마저 내게 손을 댔다는 이유로 공격받을지 모른다.

‘고양이보다 한참 크게 자랄 것 같다는데. 훈련을 잘 시키지 않으면 함께 지낼 수 없겠어.’

그런데 엘은 밀어내는 것이 통하지 않자 급기야.

“므웅……!”

내 팔을 물어버렸다.

물론 두꺼운 옷을 몇 겹이나 겹쳐 입은 상태라 송곳니가 살을 파고들지는 않았다. 그래도 나는 서늘하게 뇌까렸다.

“너도 아파봐야 알지.”

아직 어린 상태로 어미며 형제와 떨어졌을 테니 물고 할퀴는 게 얼마나 아픈지 배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엘에게 몸소 알려주기로 했다.

“와앙!”

목덜미를 꽉 깨물자 엘은 정지 버튼을 누른 것처럼 얼어붙었다.

“……!”

“그것 봐. 아프지? 그러니까 막 깨물고 할퀴면 안 돼… 에취! 에퉤퉤.”

입이며 코로 잔뜩 들어오는 털 때문에 두 번은 못 하겠다.

설교하다 말고 재채기를 연발하는 내 옆구리를 비집고 엘이 들어왔다. 어쩐지 아까보다 기분이 좋아진 듯한 표정에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녀석은 골골 목을 울렸다.

그러는 와중 잠시 잊혔던 라망드가 힘없이 상체를 휘청거렸다.

“아… 미뉴엘, 나 갑자기 현기증 나는 것 같아.”

라망드가 약한 소리를 하는 건 정말 드문 일이었다. 나는 깜짝 놀라서 엘을 밀어내고 그를 답삭 껴안았다.

“헉, 미안해. 너부터 살폈어야 했는데!”

“아니야……. 그냥… 피가 나서 그런가. 갑자기 더 춥네.”

라망드는 나를 마주 안지도 못하고 축 늘어지듯 기대기만 했다.

이건 진짜로 비상 상황이다. 나는 다른 생각할 겨를 없이 눈을 꾹 감은 채 온기를 전달하는 데만 오롯이 집중했다.

배우지 않았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신기하게도 ‘알고’ 있었다. 정령과 계약한 효과인 걸까.

내게서 뻗어나간 온기의 덩굴이 라망드를 칭칭 감았다가 그의 몸 안으로 녹아드는 것이 느껴졌다.

“하아…….”

나른하게 풀어진 라망드의 숨결이 귀 옆에서 느껴졌다.

“이제 좀 나아?”

“응……. 고마워, 미뉴엘. 따뜻하고 기분 좋다.”

무슨 온천에 몸을 담그기라도 한 듯 노곤한 목소리를 듣자 뿌듯함과 동시에 목 아래가 간질거리는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이 몰려들었다.

‘라 첨지가 이렇게 솔직하게 굴다니.’

아파도 여간 아픈 게 아니었다.

“자, 여기 좀 누워.”

자리를 비켜주려고 했지만 라망드는 기댄 몸을 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너는 안 자고?”

“난 맞은편에서 자면 되지.”

“아직 추운데.”

“헉, 그래?”

라망드의 체온은 이미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지만 오래 추위에 노출되었던 탓인 것 같아서 나는 군소리 없이 다시 한번 그를 온기로 감싸주었다.

“이제 괜찮아? 누울래?”

“응.”

언제나 날 보살펴줬던 사람을 내 손으로 챙기게 되다니. 조금 들떠서 모포까지 꼼꼼히 덮어주는 나를 보며 라망드가 살짝 웃었다.

반면 엘은 뭐가 못마땅한지 귀를 뒤로 눕힌 채 꼬리로 바닥을 탁탁 치고 있었다.

“엘, 또 공격하면 정말 혼난다?”

슬쩍 어르자 엘은 대답도 없이 고개를 휙 돌렸다. 바닥을 치는 꼬리도 여전했지만 녀석이 움직일 기미는 없어 보여 안심한 나는 웃으며 불을 껐다.

“잘 자, 다들.”

“너도 잘… 으븝.”

당연하게 건네던 라망드의 대답 끝이 뭉개졌다. 화들짝 놀라 다시 불을 켠 나는 참지 못하고 박장대소했다.

“푸하하핫!”

“먀.”

라망드의 얼굴을 방석처럼 깔고 앉은 엘이 태연하게 앞발로 세수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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