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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 영애 집착을 시작합니다 (63)화 (63/130)

63화

몇 시에 자든 아침은 칼같이 찾아왔다. 어슴푸레하게 밝은 빛에 눈을 뜨자 맞은편에 누운 라망드의 모습이 곧바로 보였다.

“먀.”

잠이 덜 깨 멍한 채로 곱게 감긴 남색 속눈썹을 바라보던 내게 엘이 인사하듯 입을 맞췄다.

‘어제 혼을 냈는데 삐지지도 않고.’

대견한 마음에 배시시 웃자 엘의 입꼬리도 슬며시 올라가는 것 같았다.

녀석의 부드러운 털을 쓰다듬자 다시 졸음이 몰려왔지만 애써 떨쳐내고 몸을 일으켰다.

라망드가 한 번도 늦잠 자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데 내가 일어난 뒤에도 눈을 뜨지 못하니 걱정이 된 탓이다.

“열은 없는데.”

이마를 짚어봤지만 나와 그다지 차이 나지 않는 체온이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온기를 전해 준 후 라망드가 깨지 않도록 조심해서 엘을 안고 밖으로 나왔다.

기사들도 마침 활동을 시작한 모양이었다.

“다들 좋은 아침.”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공녀님.”

모든 것을 얼려버릴 듯한 칼바람도 내게는 시원하게 느껴질 뿐이다.

그 바람을 맞으며 상쾌하게 기지개를 쭉 켜는 순간, 주머니가 뜨끈해지더니 뭔가 빨간 것이 아침 식사를 조리할 참으로 불씨를 키우던 모닥불 안에 휙 뛰어들었다.

“으악?!”

아차, 하는 순간 정령이 나타난 것이다.

모닥불 앞에 있던 기사가 기겁해서 엉덩방아를 찧고, 나는 창피해져서 이마를 텁 짚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정령 녀석은 불씨 사이에 대자로 드러누워서 흥얼거렸다.

- 어, 조오타.

“야…….”

모닥불이… 너한테는 찜질방이니?

- 역시 뜨끈하게 등을 지져야 제맛이지.

몸도 없는 게 지지기는 뭘 지져. 지짐이야?

“아가씨, 저게, 아니 저분이 혹시…….”

소란을 눈치챈 기사들이 삼삼오오 근처로 모여들었다. 나는 은근히 달려드는 초롱초롱한 눈빛들을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정령이야.”

“오오…….”

“짐작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당분간은 정령을 만난 걸 비밀로 할 생각이야.”

나는 한숨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여기까지 함께해 준 경들을 믿고 보인 것이니까 경들도 우리만의 비밀로 지켜주길 바랄게.”

말을 마치고 고개를 기울이며 환하게 웃었다.

카르이넨의 기사단은 충성하는 것을 넘어 어머니며 언니를 존경하는 집단이지만 만약이라는 것도 있으니까 단단히 말해 둔 것이다.

“물론입니다!”

“명예를 걸고 지키겠습니다.”

예상대로 모두들 굳게 다짐했다.

그렇게 내가 기사들을 단속하는 와중에도 정령은 모닥불의 숯 위를 해맑게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있었다.

‘저게 정령인지 주책바가지인지.’

한참 전에 타올랐어야 할 불인데 녀석이 삼키는 건지 아직도 아까보다 아주 조금 불길이 커졌을 뿐이다.

“정령아, 그만 놀고 비키자?”

- 싫어.

그래도 사람들 앞이라고 상냥하게 말을 건넸는데 정령은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콧방귀만 뀌었다.

“너 때문에 준비가 지체되고 있잖아.”

얼른 밥 먹고 돌아가야 하는데.

식사 담당인지 아까 엉덩방아를 찧었던 기사가 나를 간절하게 올려다보았다.

“아가씨…….”

“응. 금방 빼내 줄게.”

호언장담은 했는데 이제 정령은 숫제 팔다리를 버둥거리며 떼를 쓰고 있었다.

- 불 속이 좋단 말이야!

그럼 정령이는 여기서 살아. 엄마, 아니 계약자는 집에 가련다.

목구멍까지 올라온 마음의 소리를 삼켜내고 다시 설득했다.

“정령석이 네 집이라며? 집에 얌전히 있어. 괜한 불씨 잡아먹지 말고.”

- 집은 집이고! 십 년이나 얼음 속에 갇혔는데 이러기냐, 잔인한 인간아?

역시 저 ‘인간아’라는 말, 욕이지?

이제는 내 인내심도 한계였다. 나는 상냥한 척 침착하게 말하던 것을 냅다 걷어치우고 버럭 외쳤다.

“성에 도착하면 아예 벽난로에 처박아 줄 테니까 불 피우고 나와, 냉큼!”

옆에서 기사가 놀라 숨을 들이마시는 것과 달리 정령은 반짝 눈을 빛내며 일어나 앉았다.

- 정말?

“정말.”

대답과 동시에 내 몸에서 힘이 쭉 빨려나갔다. 그리고.

쿠콰콰콰!!

모닥불이 있던 자리에 불기둥이 치솟았다.

“…….”

정령이 왜 지금껏 힘을 모으지 못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살짝 보게 된 느낌이었다.

* * *

정령이 그 소란을 피우는데도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던 엘가 언니는 마차가 출발하자마자 안으로 들어왔다.

“어서 들어와, 언니.”

미처 앉기도 전에 얼굴을 더듬으며 체온을 확인하는 내 모습에 언니가 입꼬리를 스윽 올렸다.

“덕분에 다들 따뜻하게 가고 있다, 미뉴엘.”

“그런 모양이네. 생각했던 대로 적용이 되어서 다행이야.”

나는 그제야 안심하고 자세를 고쳤다.

대부분 북부인들이지만 추운 곳에서 오래 있으면 움직임이 더뎌지는 게 당연하다. 게다가 사람도 살지 않을 만큼 추운 곳에서 이틀이나 야영을 했으니.

더군다나 라망드를 더 무리시키고 싶지도 않았던 나는 방법이 없을까 고심하다가 온풍기를 떠올렸다.

정령의 힘으로 불을 피울 뿐만 아니라 온도를 바꾸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은 어제의 일로 확인한 바였다.

‘그렇다면 조금 더 넓은 범위로 적용해 보는 거야.’

구상, 실험, 성공적.

나는 정말 온풍기나 난로처럼 마차를 중심으로 일정 거리 안에 온기를 뿜어냈다. 때문에 일행들의 얼굴에서는 지친 기색이 확연히 약해져 있었다.

“물을 것이 있어서 왔다.”

어쩐지 경계를 해야 한다며 바깥에서 말만 타던 언니가 웬일로 들어왔다 싶더라니.

나는 바깥의 온도를 유지하는 데 신경을 기울이면서도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라면 뭐든 물어봐도 돼.”

“그 정령의 힘은 어느 정도지?”

그런데 이 질문에는 좀 놀랐다.

동굴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정령이 내 옆에서 노닥거리며 다리를 흔들고 있는지.

이런 것이 아니라 곧장 정령의 전력을 묻다니.

하지만 이유는 곧 알 수 있었다.

“불기둥이 치솟았을 때, 조금이지만 네 뺨이 창백해졌다, 미뉴엘.”

“어… 그랬어?”

나도 몰랐던 걸 또 어떻게 봤대.

나는 머쓱해져서 엘의 앞발을 쥐고 조물조물 주물렀다.

‘피 냄새도 안 나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언니가 보기엔 아니었나 보다.

“그래. 그 정도였으니까 지금도 무리하는 것인가 싶어서 묻는 거다.”

“에이, 아냐.”

힘이 소모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정령의 힘은 자연에 기반하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복구되는 것이 굉장한 장점이었다.

“지금 힘 상태는… 음. 아까하고 비슷한 불기둥을 한 번에 대여섯 개 정도 만들면 끝날 거 같기는 해.”

“생각보다…….”

살짝 실망한 낯으로 입을 열었던 라망드는 뒷말을 꿀꺽 삼켰다.

그러면 뭘 하나. 이미 눈빛으로 정령을 깔아뭉개고 있는걸.

“좋게 생각하세나, 라망드 사제. 그 정도라 미뉴엘이 무사한 것일지도 모르니.”

언니까지 합세했다.

그 말이 맞는 반면에 불의 교단 측에서 얼마나 정령의 힘을 빼앗았는지 생각하면 오싹하기도 했다.

분명 10년 전에는 어린아이가 손을 대자마자 죽일 만큼의 힘이 있었는데 지금은 고작 한 아름쯤 되는 불기둥 대여섯 개가 한계라니.

- 이 인간들이 지금 나를 능멸하는 것이냐, 인간아?

한가롭게 다리를 흔들며 창밖만 구경하는 것 같더니 대화는 다 들었나 보다.

“능멸이라니. 현재 상황을 정확히 점검하는 거지.”

당장 부정했지만 그래도 오래 살았다고 눈치는 있어서 먹히지 않았다. 정령은 흥, 콧방귀를 뀌고는 음산하게 협박했다.

- 나를 능멸하면 뼈도 안 남게 태워버릴 테다.

거기에 움츠러들 내가 아니었다.

“내 가족 건드리면 불의 교단에 보내버리는 수가 있어. 너 죽고 나 죽고 다 죽는 거야. 알았냐?”

- 이 인간이!

“이 정령 자식이!”

크르렁, 캬아악.

당장 멱살이라도 잡을 듯한 우리를 다독인 건 라망드와 엘가 언니였다.

“둘 다 진정해. 여길 불태울 셈이야?”

“너무 흥분하는 건 좋지 않다.”

“먀, 먀!”

엘도 합세해서 내 뺨에 얼굴을 부볐다. 그제야 문득 마차 안이 후끈할 정도로 더워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흠. 미안해.”

- 사과를 받아들이겠다, 건방진 인간아.

“너한테 한 거 아니거든!”

아이고, 내 혈압!

목덜미를 잡은 나 대신 엘가 언니가 차분하게 물었다.

“그런데 정령이여, 우리는 당신을 그저 정령이라고만 부르면 됩니까?”

- 그러든가.

정령은 팔짱을 끼며 몸을 휙 돌려버렸다. 그러더니 작은 어깨 너머로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넘어왔다.

- 원래는 계약자가 부르기 편한 대로 붙여주는 거야. 계약이란 서로 이름을 교환하는 거라고. 그런데 저 인간은 그것도 모르고…….

언니도, 라망드도, 심지어 엘마저 ‘저런’ 하는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아니, 뭐, 그럼 나 때문이라고? 계약서에 그런 말은 없었잖아!”

- 그걸 계약서에 써둬야 아냐!

“참 나. 너야말로 내 이름 알면서 ‘인간아’라고 하는 주제에!”

언니가 쯧쯧 혀를 찼다.

“또 싸운다.”

“아, 아니이…….”

- 나는 가만히 있는데 저 인간이…….

마치 약속한 것처럼 변명하던 정령과 나는 또 서로를 노려보았다. 보다 못한 엘이 내 눈을 앞발로 턱 덮어버렸다.

“으아?!”

“잘했다, 엘. 미뉴엘, 너는 어서 정령에게 이름을 드리도록 해.”

순간 ‘란차피암메’나 ‘플라멘베르퍼’ 같은 옛날 화염 방사기의 이름들이 머리를 스쳤지만 그만두었다.

‘굳이 무기 이름을 붙이고 싶지는 않아.’

너무 대놓고 ‘너를 이용하겠다’고 선언하는 것 같지 않은가. 물론 여기 사람들은 저 단어의 뜻이 뭔지 모를 테지만.

게다가 팔자가 이름 따라간다는 말도 있으니 더 꺼려졌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곧 결정을 내렸다.

“‘개비’라고 하자.”

- 개비? 그게 무슨 뜻인데?

성냥개비의 ‘개비’였다. 어린아이 특유의 머리 큰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지금은 이렇지만 빨리 힘을 되찾아서 큰불이 되라는 바람도 조금 담은, 성냥개비.

뜻을 들으면 하찮네, 어쩌네 하며 방방 뛸 것이 뻔해서 이렇게만 대답했지만.

“응. 그냥 친근한 이름을 주고 싶었어.”

- 감히 어떻게 나를 친근하게 여길 수 있느냐!

어린아이의 몸으로 투덜거려봤자 위엄이 생길 리가 있나.

“알겠지만 나는 미뉴엘이야. 다시 한번 잘 부탁해, 개비.”

- …….

내가 내민 손을 한동안 빤히 보던 개비는 예상외로 순순히 악수를 했다.

작은 손에 힘이 꼭 들어간 순간, 계약서가 마무리되었을 때와는 다른 고양감이 우리를 한데 묶었다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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