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따뜻하게 움직인 덕분에 카르이넨 본성으로 돌아오는 데 걸린 시간은 과장 조금 보태서 갈 때의 절반 정도로 단축되었다.
성문을 보며 한고비 넘겼다는 안도감을 느끼는 것도 잠시, 부모님께 갑작스러운 방문 소식을 전해 들은 나는 또 한 번 목덜미를 잡았다.
“이황자가 여기에 온다고요?”
이황자가 프레세리아에 입국할 수 있는 거였어요?
내 질문에 아버지는 당신도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끄덕이셨다.
“치트룸의 막내 왕자가 프레세리아에 방문해서, 그와 함께 들어왔다더구나.”
이어진 이야기는 더욱 놀라웠다.
치트룸의 막내 왕자, 군나르 엠브로세티가 황태자에게 반했단다. 사랑에 빠진 왕자님이 후궁으로 들여달라고 자처했단다!
“그, 그걸 치트룸 왕실에서 허락했대요?”
프레세리아가 대제국이 된 것도 벌써 두 세대 전. 황제가 두 번 바뀔 동안에도 치트룸은 사막을 장벽 삼아 제국에 대항하고 있었다.
“당연히 아니지. 그런데 막내 왕자가 단식 투쟁까지 불사했단다.”
막내 왕자도 나처럼 늦둥이라 왕실 어른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 아이가 난생처음 반항하자 골머리를 앓던 치트룸의 왕은 결국 백기를 들었다고 한다.
‘역시 자식 이기는 부모 없구나.’
“황제 폐하께서는 랑베르 공에게 미안해하시면서도 은근히 반기신다더구나.”
그간 적대하던 나라다. 제국에 흡수시키지 않는다면 차라리 우호적인 방향으로 나가는 게 좋은 수일지 모른다.
하지만 본인의 의사는?
“황태자 전하께서도 찬성하셨어요? 분명 랑베르 공하고 사이가 좋다고 들은 것 같은데…….”
랑베르 공은 황태자의 남편이다. 어릴 때부터 그녀의 호위 기사였고, 지금은 황태자 직속의 근위대장인.
이번에는 아버지 대신 엘가 언니가 미간을 꾹 누르며 대답했다.
“루미에르는 아마 받아들일 거다. 랑베르 공을 사랑하는 것하고는 별개로 이국적인 미남이 알아서 굴러 들어왔는데 거절할 리 없지.”
“어…….”
황태자도 이쪽 과였어?
마치 마음의 소리를 들은 것처럼 언니는 자연스럽게 덧붙였다.
“그래. 미뉴엘, 마치 너처럼.”
“어, 언니!”
미남 좋아하는 게 흉은 아니었지만 부모님 앞에서 말하는 건 여전히 쑥스러웠다. 하지만 아버지는 한술 더 떴다.
“그런 면은 유가티스에게서 그대로 물려받았다니까.”
“네에?”
“나와 결혼했잖으냐.”
자랑하는 기색도 없이 빙긋이 웃는 모습이 마치 한 그루 꽃나무 같았다.
“아, 아빠가 쫓아다니셨다고 들었는데요.”
“그랬지. 성인식 연회 때 보자마자 첫눈에 반해 버렸거든. 드레스 대신 검은 제복을 입은 영애라니…….”
이제는 익히 들었던 부모님의 러브 스토리가 흘러나올 차례였다. 그것을 눈치챈 나는 황급히 손을 들었다.
“잠깐. 잠깐만요, 아빠.”
언제나 침착한 아버지가 이럴 때만큼은 팔불출처럼 구는 게 귀엽기도 하고, 언제 들어도 재미있는 이야기기는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이황자가 치트룸의 막내 왕자 때문에 귀국하는 건 알겠는데요. 왜 굳이 북단에 있는 대공령까지 방문하는 거예요?”
“오랜만에 바람을 쐬고 싶다더구나.”
굳이 이 추운 곳의 바람을? 로콰이트에는 바람이 안 부나?
“우리도 썩 내키지는 않는다만, 미뉴엘. 폐하께서 각별히 살펴달라고 직접 부탁하시는 바람에 거절하기도 힘들게 되었단다.”
“폐하께서요?”
갑자기 황제가 이황자한테 애정이라도 생겼나.
그렇게 속으로만 꿍얼거리던 중이었다. 꿍얼거리는 소리가 꿍꿍 속을 울린 건지 저 밑에 묻어두었던 얼굴이 문득 떠올랐다.
‘에사디엔.’
그가 사라지자 이황자를 다시 챙겨야겠다는 의무감이라도 생긴 걸까?
에사디엔이 제자리에 돌아왔다는 소식은 아직도 들리지 않았다.
기억 위로 떠오른 건 얼굴뿐만이 아니었다. 흐릿하게 웃던 모습, 무릎 꿇은 채 나를 올려다보던 모습, 허망하게 울던 모습들이 차례로 스쳐 지나갔다.
‘아아, 없어져! 지워져! 사라져!’
나는 그 모습들을 지우려 고개를 홰홰 저었다.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건지. 적어도 몸 성히 나타났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
당연하다는 듯 내 무릎 위에서 몸을 만 엘을 쓰다듬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음?’
그런데 어쩐지 엘의 몸이 긴장한 것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엘, 어디가 불편해?”
녀석의 다리며 몸을 쭈욱 펴서 조물조물 만져봤지만 특별히 아파하는 곳은 없었다. 평소처럼 얌전히 몸을 맡기고 있을 뿐.
“이상하네…….”
“먀아.”
괜찮다는 듯 녀석이 울어도 찝찝함은 가시지 않았다. 좀 더 어르고 달래보려는 찰나 아버지가 부르셔서 그만둘 수밖에 없었지만.
‘이따가 간식이라도 줘야겠다. 새 장난감도 만들어줘야지.’
그렇게 몰래 다짐하면서.
* * *
우리 부모님께서 황제의 ‘각별히 살펴달라’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이황자 일행이 도착하자마자 알 수 있었다.
수행원들에게까지 하인을 두 명씩 붙이실 줄이야.
‘이건 하인이라기보다…….’
감시인? 그러니까 대공령 안에서 같잖은 수작 부리지 말라는 경고였다.
더 놀라운 건 이황자의 수행원 중에 눈에 익은 미인이 당당히 자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굽이치는 붉은 머리, 금화 같은 눈동자.
“라, 라페슈가 왜 저기에…….”
여자 주인공이 너무 탱탱볼 같은 것 아닌가요?
테오도르와 다르게 라페슈는 어디로 튈지 도통 예측할 수가 없었다. 돌이켜보면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모르겠네.”
로콰이트만 벗어나면 더 만날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그때 라페슈의 금빛 눈동자가 내 눈과 정확히 마주쳤다. 나도, 그녀도 먼저 눈을 돌리지 않고 그대로 시선을 이었다.
그것을 끊어낸 것은 마지막으로 들어온 이황자, 오스틴 로콰이트였다.
“환영해 주어 고맙소, 대공.”
오스틴의 뒤에도 어김없이 하인이 둘 딸려 있었다. 그들을 짐짓 돌아본 그가 능글맞게 어깨를 으쓱했다.
“이렇게까지 환대해 줄 줄은 몰랐지만 말이야.”
“폐하께서 황자님께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계십니다.”
“알고 있다네.”
아무렇지 않다는 듯 넘긴 오스틴은 엘가 언니를 거쳐 내게 웃음 담긴 시선을 던졌다.
“이쪽이 카르이넨의 봄이라는 막내 공녀로군.”
예? 카르이넨의 봄이요?
그렇게 구린 별명이 정말 돌아다니고 있는 건지, 아니면 오스틴이 급조한 건지 판단하기도 전에 그의 손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단둘이 있는 자리도 아니고, 우리 가신들이며 황자 일행이 모두 지켜보는 중이다. 꺼림칙했지만 피할 수 없었다.
그런데 빈틈없이 장갑을 낀 두 손이 맞닿은 순간이었다. 이런 자리에서 나올 거라 예상치 못했던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쯧.”
뭐지?
당황했지만 이미 오스틴은 몸을 굽힌 상태라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손등에 그의 입술이 꾹 눌리는 감각에 나도 모르게 몸서리가 쳐졌다.
‘인사하면서 진짜로 입 맞추는 사람이 대체 어디 있어!’
장갑을 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그런 내게 오스틴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드디어 만나서 기뻐, 영애.”
웃기고 있네.
가까이서 오스틴의 눈을 들여다본 나는 단언할 수 있었다.
그의 눈은 햇빛에 비친 나뭇잎처럼 아름다운 녹색이지만 그 뒤에는 시커먼 꿍꿍이가 똬리를 틀고 있노라고.
‘이거야말로 가시 품은 장미지.’
에사디엔이 만인의 취향을 깨부수는 얼굴이었다면 오스틴의 얼굴은 그야말로 내 취향을 빼다 빚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얼굴을 보고 좋아하기엔 오스틴은 너무 나쁜 놈이었다.
“영애는 그다지 기쁘지 않은가 보군.”
“처음 뵙는데 기쁘고 말고 할 것이 있나요.”
천천히 굳어가는 내 얼굴을 보며 오스틴은 더없이 재미있는 것을 관찰하는 아이처럼 해맑게 웃었다.
“이런. 마음이 통하지 않았다니 아쉬운걸.”
그러고는 그 웃는 얼굴 그대로 핵폭탄을 터뜨렸다.
“나와 결혼하지, 미뉴엘 카르이넨.”
“……!”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잠시 영혼이 육체를 빠져나가 성층권을 찍고 돌아왔을 때, 내 몸은 채신머리없이 입을 딱 벌리고 있었다.
주변은 뭐, 말할 나위도 없이 발칵 뒤집힌 상태였다.
“황자님, 제 여식과는 전혀 교류가 없으셨던 것으로 압니다만.”
아버지처럼 말로 철벽을 치는 건 그나마 나았다.
“여, 여보!”
문답 무용으로 검 자루에 손을 올린 어머니와 엘가 언니에게 아버지와 형부 소디엠이 냅다 매달렸다.
이쪽만 난리인 것은 아니었다.
“화, 황자님?!”
“이 무슨 갑작스러운 말씀입니까!”
황자를 따라온 사람들도 저러는 걸 보면 사전에 일언반구도 없었던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라페슈 쟤는 왜 나를 째려보는 건데!’
팔로스의 후원자가 나인 것을 확인했을 때만큼, 아니 그때보다 더 분노로 타오르는 눈이었다.
2초 만에 컵라면을 익힌다는 레이저가 이 정도로 뜨거울까!
이마에 진땀이 절로 돋았다.
‘설마 에사디엔 다음으로 이황자를 노린 거야?’
두 번, 세 번 생각해도 원작하고는 너무 다르다. 원래는 저렇게 야망 넘치는 애가 아니었는데?
“카르이넨 영애, 아니 미뉴엘 양. 대답해 주겠나?”
주변의 소란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오스틴은 오로지 내게만 시선을 고정한 채 요구했다.
‘대답해 달라니 해줘야지.’
‘여기 단호박 하나 추가요!’를 마음속으로 외치며 나는 또박또박 말했다.
“싫습니다.”
거절은 단호하게. 에사디엔을 대하며 배운 것 중 하나였다.
하지만 오스틴은 에사디엔 못지않은 마이 웨이였다.
“응? 안 들리는군.”
자기가 원하는 답이 나올 때까지 괴롭힐 것이 뻔해서 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단단하게 잡혀 움직일 기미가 없었다.
오히려 오스틴의 손이 단단하게 힘을 주는 바람에 옥죄여 아프기만 했다.
그래도 이놈 앞에서 ‘아파요.’ 따위의 우는 소리는 곧 죽어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이냐?
나는 반대로 손 빼기를 포기한 사람처럼 오스틴에게 바짝 붙었다. 풍성한 드레스 자락이 그의 다리에 닿아 구겨질 때까지.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이 흥미를 담고 반짝였다.
“다시 한번 말씀드릴게요.”
“친절하기도 하군.”
나는 오스틴의 기대에 부응하듯 친절한 웃음을 지으며.
“호호호.”
치맛자락에 가려진 발을 힘껏 내질렀다.
퍽!
“윽!”
제대로 조인트를 까… 아니, 정강이를 얻어맞은 오스틴의 몸이 반사적으로 숙었다.
‘오예. 불꽃 슛!’
정령과의 계약으로 건강해진 효과가 여기서 보이는구나.
나는 오스틴의 멱살을 확 잡아당겨 마치 그가 쓰러지려고 해 부축하는 척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 괜찮으세요?”
그리고 오스틴의 귓가에 약속한 대로 다시 한번 단호한 답을 속삭였다.
“싫다고, 멍청아.”
“뭐…….”
오스틴도 이때만큼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지만 나는 그를 무시하고 그의 수행인들이며 하인들에게 명령했다.
“다들 뭐 하는 건가? 황자님을 모셔라. 먼 길 오시느라 기력이 많이 쇠하신 듯하구나.”
그제야 다들 마법에 걸렸다 깨어난 사람들처럼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절하지 않고 그들에게 부축받으며 나가던 오스틴은 딱 한 번 나를 돌아보았다.
“좋지 않은 모습을 보였군. 또 보지.”
웃느라 가늘어진 눈이 나를 통째로 핥는 듯해 오한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