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나는 엘의 부드러운 몸을 어루만지며 응접실에서 라페슈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따로 자리를 마련해 만날 정도로 라페슈가 반가우냐고? 설마 그럴 리가.
하지만 개인적인 감정은 저리 밀어두고, 라페슈 셀레스테는 원작의 설정상 ‘마력이 샘솟는’ 사람이었다.
그런 인물이 오스틴 황자 편에 붙다니. 빈말로라도 잘 가라고 그냥 보낼 수는 없었다.
“왜 부르셨죠? 이번에야말로 눈밭에 매장하시려고요?”
라페슈는 ‘나, 너 싫어’라는 뜻이 그대로 담긴 뾰족한 말과 함께 들어왔다.
그녀의 모습을 본 나는 거기에 반박하기에 앞서 웃음을 참아야만 했다.
대공령이 추운 지방인 것은 맞지만 성을 지은 자재에 마법 처리가 되어서 단열이 잘됐다.
더군다나 손님들이 온 상태이니 평소보다도 난방에 신경 쓰는 중이었다. 당장 여기도 벽난로에서 불이 활활 타고 있고.
그런데도 라페슈는 눈사람 친구처럼 보이는 털외투를 두툼하게 걸친 상태였다.
‘추운 걸 정말 싫어하나 보다.’
두께로 보아 저 안에 몇 겹이나 껴입었을 거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 입에서 나온 것은 장작을 더 넣을 테니 편하게 벗으라는 말 따위가 아니었다.
“내가 말한 ‘매장’은 눈밭이 아니라 사교계에서의 매장이지만……. 아무튼 매장하지 않았으니 그 대가로 잠깐 이야기 좀 하죠.”
“흥. 빨리 끝내 주세요. 마주하기 불편한 건 피차 마찬가지 아닌가요?”
라페슈는 옷 때문에 둔해진 움직임으로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래도 자리를 박차고 나가지는 않네.’
꽤 긍정적인 신호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알고 보니 엘 때문이었다.
“원래 고양이 안 키우셨잖아요.”
자기 이야기를 하니 엘도 알아듣고는 내내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새로운 사람에 대해 호기심이 들 법도 한데 라페슈에게 흘긋 시선을 던진다 싶더니 이내 아양 부리듯 내 볼을 핥았다.
“셀레스테 영애도 고양이를 좋아하나요? 다친 채 발견되었는데, 치료한 후에도 떠나지 않으려고 해서 키우게 됐어요.”
“미야아.”
“아, 엘. 잠시만. 이제 그만해.”
간지러워서 키득키득 웃는 나, 그리고 내가 웃으니 더 열심히 할짝대는 엘을 보던 라페슈가 툭 던지듯 말했다.
“고양이가 그냥 고양이죠, 뭐. 그런데 그 고양이, 눈 색깔이 삼황자님하고 비슷한 것 같네요?”
뭐라고?
“에이, 무슨…….”
반사적으로 부정하려던 찰나였다. 장난을 멈추고 나를 올려다보는 푸른 눈동자와 엘을 내려다보는 내 눈이 딱 마주쳤다.
‘어?’
왜 지금껏 몰랐을까? 맑은 터키색이라고만 생각했던 엘의 눈은 분명 바다처럼 기분에 따라 색이 조금씩 바뀌는 에사디엔의 눈과 닮아 있었다.
‘맙소사.’
나는 낭패감에 입 안의 여린 살을 깨물었다. 이 뒤에 나올 말이 빤해서였다.
“파혼한다고 했으면서도 여전히 마음에 남아 있나 보네요.”
그래. 이런 거.
‘남이사?’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마음을 가다듬고 담담한 표정을 만들어냈다.
“글쎄요. 딱히 그런 생각을 한 적은 없는데요. 그리고!”
나는 엘의 앞발을 쥐고 라페슈를 콕! 집어 가리키며 외쳤다.
“우리 엘 눈이 삼황자님 것보다 훨씬 예쁘거든요?!”
“아, 예…….”
라페슈의 시선이 상종 못 할 팔불출을 보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엘의 반응이 조금 이상했다.
“먀…….”
평소에 예쁨 받을 때처럼 기쁜 기색 없이 복잡미묘한 심경인 듯했다. 상하좌우 종잡을 수 없이 흔들리는 꼬리가 증거라면 증거였다.
‘얘가 왜 이러지.’
역시 정령의 힘보다 고양이 말을 할 줄 아는 능력이 더 나은 것 같은데 교환 좀!
어디서 ‘교환, 환불 불가입니다.’라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지만 물론 환청이겠지.
나는 엘의 마음이 안정되도록 천천히 엉덩이를 다독여주며 라페슈에게 본론을 말했다.
“아무튼 지금 영애에게 대화를 청한 건, 치트룸으로 가지 마십사 부탁드리기 위해서예요.”
“하, 왜요? 이제는 제 재능까지 매장하고 싶은 건가요? 당신은 정말 사사건건……!”
“아니, 잠깐만요. 셀레스테 영애.”
오해입니다요.
물론 나도 사람이니 얄미운 라페슈가 브라시다스의 제자로 들어가지 못했을 때 깨소금 맛이기는 했다.
그래도 딱히 나서서 그녀의 앞날을 방해한 건 아닌데! 무엇보다도 나는 그럴 정도로 성실하고 부지런한 사람이 못 되었다.
“영애의 생각과는 정반대네요. 저는 외국으로 나가지 말고 여기서 공부하기를 권하려고 했거든요.”
“네? 갑자기 그게 무슨……?”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제안이었는지 잔뜩 가시를 세우던 라페슈의 기세가 잠시나마 누그러졌다.
“지금부터 준비해서 내년에 시험을 치세요. 당신을 후원하고자 합니다.”
“나를?”
“그래요. 팔로스와 달리 저 개인이 아니라 카르이넨의 이름으로 들어갈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요.”
라페슈의 표정은 더 아리송해졌다.
“왜…요?”
왜 그렇게까지 하냐는 질문에 나는 어깨를 살짝 으쓱했다.
“대마법사도 인정한 마력의 보유자잖아요? 만에 하나라도 당신이 치트룸인과 결혼하면 국적이 바뀌는걸요.”
“아…….”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인지 흐린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물론 그런 생각한 적 없겠지. 라페슈는 오스틴을 노리는 것 같았으니까.
‘그래도 인생, 어떻게 굴러갈지 모르는 거다…….’
나라고 정령이랑 계약까지 할 줄 알았겠나? 신전에서 나올 때만 해도 가족들 품에서 평생 놀고먹으며 뒹굴 줄로만 알았다.
‘그간 토한 피가 몇 리터던가.’
씁쓸하면서도 아련하게 짧은 과거를 떠올리는 내게 라페슈가 어림없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대마법사님은 지금 들인 제자를 다 키우기 전까지는 다른 사람을 받지 않겠다고 하셨어요.”
“음? 대마법사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 해도 마법사가 될 수 없는 건 아니잖아요?”
“그, 그건…….”
또다시 2G 와이파이처럼 버벅거리는 라페슈를 보며 나는 뭔가를 깨달았다.
‘이 애는 꽂히면 하나만 보고 달리는구나.’
애초부터 그녀가 스승으로 정한 건 브라시다스 하나뿐이었다. 다른 마법사는 선택지에 올릴 생각조차 없이.
그런 한편으로 원했던 것이 무산됐을 때 U턴도 빨랐다. 에사디엔에서 오스틴으로 갈아탄 것처럼.
‘그렇다면 아마 브라시다스 대신에 선택할 치트룸의 마법사도 만만치 않은 실력자이겠지.’
사실을 말하자면 라페슈가 치트룸인이 되는 것보다 오스틴과 불의 교단에 일조할까 봐 걱정되는 것이 더 컸다.
그런데 증거도 없이 불의 교단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니 이쪽에서는 좋은 조건을 흔들며 유혹할 수밖에.
“아시겠지만, 꼭 제자의 연을 맺지 않아도 아카데미에서 공부하는 데 문제는 없어요. 영애의 전공 적성도 아직 모르니까 느긋하게 공부하며 생각하시는 게 어때요?”
“…….”
“치트룸의 환경은 여기와 많이 다를 거예요. 외국인이니 분명 차별도 있을 테고요.”
라페슈의 입술이 달싹였다. 분명 흔들리고 있는데도 그녀는 ‘그렇지만’이라는 말을 계속해서 되뇌었다.
“마음에 걸리는 것이라도 있나요?”
“그게…….”
나는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그간 내가 본 라페슈는 자존심이 센 편이다. 그리고 자신에게는 전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유형이었다.
그렇다면.
“이런 말씀은 조심스럽지만, 혹시 가문 내의 문제인가요?”
“…….”
대답 대신 시선을 내리깐 라페슈의 귀가 그녀의 머리카락만큼이나 빨개졌다.
‘빙고.’
하기야 라페슈가 셀레스테 가문 내에서 뿌리내릴 시간이나 있었나.
황성에서마저 자리 잡지 못한 상태로 양부가 사망해 버렸으니 그야말로 끈 떨어진 연 신세, 구박데기 노릇을 했을 것이 훤히 보였다.
나는 쾌재를 불렀다. 그런 문제라면 오히려 해결이 쉬웠다.
“저희는 영애가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게 도울 거예요.”
영업 사원처럼 믿음직한 웃음을 띠는 것도 잊지 않았다.
“원하신다면 셀레스테에서 적을 옮기는 절차도 돕겠습니다. 물론 카르이넨의 변호사들이 움직일 테니 그쪽 가문 분들과 대면할 일도 없을 테고요.”
“그럼 나는 성이 없어지는 거잖아요.”
그게 참, 귀족으로서 문제이기는 했다. 하지만 해결책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기존 성인 ‘템페스트’를 살려도 될 테고, 그쪽이 꺼려진다면 저희 가신의 집안으로 입적시켜 드리죠.”
“가신? 그러면 나는 카르이넨을 위해 봉사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거야 당연하지. 누구는 땅 파서 장사하나? 아무리 돈이 많아도 아까운 건 아까운 거다.
나는 짜증 어린 한숨을 삼키며 생각했다.
‘팔로스는 솔직하게 감사하면서 열심히 하겠다는 모습이 귀엽기라도 했지.’
그러니까 팔로스에게는 가문 돈도 아니고 내 돈이 드는데 아깝지 않았고, 대가를 요구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순수하게 ‘열심히 해서 큰 사람이 되렴.’ 하고 응원했을 뿐.
그런데 라페슈는… 이렇게 받아먹기만 하려는 모습을 보니 슬슬 또다시 얄미워졌다.
하지만 라페슈에게 충만한 마력, 오로지 잠재적인 위협인 그것 때문에 나는 모든 감정을 다 삼켰다.
“행정 편의 때문에 빌리는 거라고 생각하세요. 졸업 후에 황실 마법사로 들어가면 작위가 수여되니까 그때 성을 바꾸셔도 되고요.”
“흐음…….”
이런저런 정보를 들은 라페슈의 자세가 천천히 바뀌었다. 푹신한 등받이에 마음 놓고 몸을 기댄 모습이 사뭇 거만했다.
잠시 이리저리 눈을 굴리던 라페슈가 드디어 얼굴에 미소를 올리며 말했다.
“친절한 제안과 조언에 감사드려요.”
“뭘 이런 걸 가지고요.”
살다 살다 감사하다는 말에 이렇게 불안감을 느낀 것도 처음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여유롭게 일어서는 라페슈에게서 나온 답은 애매한 거절이었다.
“이곳에 머무르는 동안 고민해 보죠.”
라페슈에게 내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이 있었다면 지금 바로 오케이를 외쳤을 것이다.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러라는 대답도 하기 전에 라페슈는 흥얼거리며 응접실을 나섰다. 그 몸짓이 들어올 때와는 딴판으로 나비처럼 가벼운 것이 아주 살충제라도 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잠시 후, 라페슈가 나가는 걸 돌아보지 않고 버티던 나는 앉은 자리에서 발을 쿵쿵 구르며 참았던 화를 터뜨렸다.
“아오, 저걸 진짜!”
치사 뿡이다! 난 이제 몰라! 라페슈가 이용당하든 말든!
내 짜증은 개비가 장작 틈에서 고개를 쏙 내밀 때까지 계속되었다.
- 시끄러워서 잠을 못 자겠다, 인간아!
“평생 자니? 평생 자? 이 정령아?”
- 왜 또 정령이래!
안 그런 척하면서도 은근히 이름으로 부르길 종용하는 걸 보면 확실히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하지만 제 이름만 이름인가?
“너는 왜 나한테 인간이래?!”
- 흠. 하여간 성격 하고는.
머쓱했는지 후, 입김을 불어 불길을 키운 개비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다시 장작 사이로 모습을 감추었다.
“하여간.”
흥, 하고 콧바람을 부는 내 어깨를 조용히 있던 엘이 짚고 일어섰다. 토닥이는 듯한 몸짓은 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