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먀아.”
“엘, 나 위로해 주는 거야?”
“냥.”
“아이고, 착해라.”
나는 피식 웃으며 엘을 안아주었다. 작은 몸에서 전해지는 체온은 실패해도 괜찮다고 위로하는 것만 같았다.
예상치 못하게 거둔 동물이 이렇게나 의지가 될 줄 몰랐는데.
나는 엘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유리알처럼 빛나는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비 오는 날의 바다와 같은 색깔.
녀석을 안고 햇빛이 들어오는 창가로 향하자 동공이 가느다랗게 변하며 맑은 날 백사장 앞의 바다와 같은 색으로 변했다.
“…….”
한 번 그렇게 인식해서인지 계속해서 에사디엔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움직이지 않고 계속해서 눈만 바라보고 있자 엘은 불편해졌는지 작게 울며 내 뺨에 작은 앞발 하나를 올렸다.
“먀…….”
“엘.”
나는 한숨을 내쉬며 그 발바닥에 살짝 뽀뽀했다.
“너를 닮은 사람이 있는데…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사실 라페슈의 말을 의식하는 게 어리석다는 건 안다. 파란 눈이 드문 것도 아니고, 빛에 따라 밝아 보일 수도, 어두워 보일 수도 있는 건데.
그런데도 가슴 언저리가 불편한 건 아직 걱정하는 마음이 남아 있어서겠지. 오스틴이 대놓고 여기까지 찾아온 데 대한 불안감도 한몫할 테고.
“미안, 엘.”
나는 사과하며 엘에게 웃어 보였다.
“너한테 에사디엔을 투영하지는 않을래.”
엘을 만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동물은 인간과 달리 오롯한 애정을 내준다는 걸 알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너는 에사디엔과 달라. 엘, 너는… 흔들리지 않고 나만 좋아해 주니까. 그렇지?”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푸른 눈동자에 물기가 어렸다고 생각한 순간, 엘은 눈을 꽉 감으며 내 목에 얼굴을 부볐다.
전에 없이 길게 먕먕 소리를 늘어놓으며.
엘이 내 말을 알아듣는 것과 달리 나는 엘의 뜻을 알 수 없어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 하나뿐이었다.
“나도 네가 좋아.”
그러자 뜨거운 한숨이 귓불 아래를 길게 스치고 흩어졌다. 나는 더 강하게 기대오는 엘을 꼭 껴안으며 속삭였다.
“우리는 헤어지지 말자.”
그러자 엘이 전에 없이 단호한 소리를 냈다.
“냐!”
이번만은 녀석의 뜻을 어렴풋이 알 것 같아서 씩 웃었다. 아마도 내가 멋대로 짐작하는 거겠지만…….
“너도 동의한 거다?”
웃음에 반응한 건지, 아니면 정말 동의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엘은 내 표정을 따라 하듯 씩 웃어 보였다. 자신의 턱을 간질이는 내 손가락을 앙앙 아프지 않게 깨무는 애교는 덤이었다.
그걸 보니 기분이 몽글몽글하게 풀어지는 것도 당연했다.
‘어디서 이렇게 사랑스러운 애가 나타난 건지.’
엘 덕분에 가까스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응접실을 나섰다.
그런데 이게 웬걸?
“아아, 미뉴엘 양.”
“…이황자님.”
친한 척 내 이름을 부르며 다가오는 오스틴을 보고 나는 어설픈 미소를 입가에 올렸다.
‘어쩌면 재수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신경질을 부려도 그냥 내 방에 가서 부릴 것을 그랬다.
“이렇게 딱 마주치다니. 역시 우리는 통하는 데가 있나 보군.”
“그냥 우연이죠.”
게다가 어떻게 빠져나왔는지 오스틴의 곁에는 수행원은커녕 우리가 붙여준 하인조차 없었다.
“그러면 반가운 우연이네. 마침 내가 길을 잃었거든.”
“그러셨군요. 그대로 뒤돌아서 쭉 가시면 중앙 홀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이실 겁니다.”
“나 혼자서 가라는 건가?”
“혼자 다니기 어려우세요? 혹시 춘추가 세 살?”
“호오, 어떻게 알았지? 세 살 맞아.”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인간이 뭐라니?
내 얼굴에서는 예의상 지었던 미소마저 사라졌지만 오스틴의 웃음은 더 크고 해맑아졌다.
“맞는다니까? 스물세 살.”
“…….”
라페슈는 대체 이런 놈의 어디가 좋은 거지?
차게 식은 눈초리를 받으면서도 오스틴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 댁 하인들이 우리 수행원들을 데리고 가버렸으니까 미뉴엘 양이라도 대신 나하고 있어줘야지.”
이 무슨 억지인가.
‘으이구’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오려 했지만 겉치레로나마 손님 대접을 해야 한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어디로 모셔다드릴까요, 황자님.”
“알면서.”
“네?”
내가 뭘 안다는 말인지. 떨떠름하게 올려다보자 오스틴이 상큼하게 윙크했다.
“나, 그대에게 청혼했잖아? 그런데도 며칠 동안 내게 단 1초도 내주지 않았지. 꽤 상심했다고.”
“싫다고 말씀드렸는데요. 그거로 끝난 거 아닌가요?”
“응. 아니야.”
“…….”
웃는 얼굴을 보며 살심이 치미는 경험은 또 처음이었다.
언니한테 부탁해서 몰래 죽일까?
이황자 일행이 치트룸으로 출발하면 그 길목에서 슥삭…….
‘아아아아! 정신 차려, 미뉴엘. 그러다 들키면 나 때문에 집안 망하는 거야!’
계급이 깡패라서 황자는 날 죽이려고 한 적 있어도 나는 황자를 죽이려고 들면 안 됐다.
마음속으로 머리를 마구 쥐어뜯은 나는 휙 돌아서며 말했다.
“일단 현관 홀로 데려다드릴게요.”
“음, 미뉴엘 양과 함께 걷는 것도 좋지만 말이야.”
아, 또 뭐요.
몸도 다 돌리지 않은 채 불손한 눈빛만 던지자 오스틴은 짐짓 팔뚝을 문질러 보이며 말했다.
“헤매고 다녔더니 너무 추워서. 몸 좀 녹일 수 없을까?”
가지가지 한다. 라페슈보다 더 더운 곳에서 살다 온 오스틴은 무슨 배짱인지 얇은 셔츠만 한 장 걸치고 있었다.
저러다 저놈이 앓아누우면 우리 집안만 손해였다. 황제는 크게 뭐라고 하지 않겠지만 티끌만 한 책이라도 잡아보려는 가문이 한둘이어야지.
“이쪽으로 들어오세요.”
응접실에서 나오자마자 마주친 것이다 보니 네다섯 걸음도 떼지 못한 상태였다. 벽난로를 끄지 않은 채 나와 다행이었다.
난로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에 오스틴을 앉힌 뒤 하인을 불러 이것저것 지시하는 나를 지켜보던 그가 아쉬운 듯 말했다.
“이렇게 나한테 관심 없는 사람도 오랜만이야.”
“…….”
내가 떨떠름하게 쳐다보든 말든 오스틴의 입은 닫히지 않았다.
“나는 있는데. 그것도 엄청 많이.”
와, 사람 기만하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하인이 문을 닫고 어느 정도 멀어질 때까지 기다리던 나는 드디어 입을 열었다.
“왜요. 아직도 절 죽이고 싶으십니까? 못 죽여서 한으로 남고, 꿈에 나오고 그러냐고요.”
“흠?”
대놓고 직구를 날렸는데도 오스틴의 웃는 얼굴은 무너지지 않았다. 눈매만 조금 가늘어졌을 뿐.
“무슨 소리야? 너무 살벌하잖아, 그대. 그것도 매력적이지만.”
“목소리도 바꾸지 않으면서 모르는 척, 감추는 척하는 것도 우습다고 생각해요.”
“똑똑하군?”
“남들만큼이죠. 황자님께서는 보통 사람들의 지능 수준을 깔보는 경향이 있으신가 보군요.”
“하하, 톡톡 쏘아붙이는 면도 정말 마음에 들어.”
오스틴은 조금 전 그 자리에 앉았던 라페슈처럼 상체를 쿠션에 깊게 묻고는 유려하게 다리를 꼬았다.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이 나른한 인상을 주었다.
“이건 진심이야.”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쪽이 진심이든 거짓이든 상관없었으니까. 그저 어서 무슨 꿍꿍이속인지 알아낸 뒤 쫓아내고 싶을 뿐이다.
‘가는 걸음걸음 소금 뿌려야지.’
흩날려라, 천일염!
“그래. 다 알고 있다면 서로 시간 낭비할 필요는 없겠군.”
“지나간 일 아닌가요? 저는 삼황자님과 파혼했으니 신경 끄셔도 되는데요.”
물론 황태자한테는 일러바쳤지만.
‘그래도 에사디엔한테 암살자를 보낸다고만 했지, 네가 직접 날뛴다는 말은 안, 아니 못 했단 말이야!’
현장에서 덜미를 잡지 않는 한 물증이 없으니까!
하지만 오스틴의 여유작작한 태도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이런. 그런 뜻이 아닌데.”
그럼 무슨 뜻인데?
반문할 틈도 없이 몸을 일으킨 오스틴은 낮은 티 테이블 따위 애초부터 없었던 물건처럼 성큼 건너 내 앞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가 등받이를 짚으며 상체를 기울이자 언뜻 풀 냄새가 나는 미지근한 숨결이 얼굴을 간지럽혔다.
불쾌해져서 한껏 고개를 뒤로 물렸지만 그 숨결은 주인과 닮아 끝까지 나를 따라붙었다.
그리고 오스틴은 두 번째 폭탄을 터뜨렸다.
“나는 여전히 그대와 결혼할 생각이거든.”
청혼도 아니고 통보였다. 게다가 당사자인 내가 계속해서 거부 의사를 표시했는데도.
하지만 그것에 대한 항의를 떠올리기도 전에 나는 재빨리 엘의 다리를 낚아채며 오스틴의 눈에서 숨기려는 것처럼 품 안으로 깊숙이 안았다.
거의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엘의 몸이 긴장했다, 싶었던 순간 다른 판단도 하지 않고 움직였으니까.
‘제발, 엘. 저놈한테 상처가 나면 안 돼. 여지를 줘서는 안 돼!’
엘이 품속에서 으르릉거렸지만 미처 달래줄 여유까지는 없었다. 오스틴의 눈이 엘을 빤히 보고 있었으니까.
“그 짐승…….”
오스틴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몰랐지만 나는 서둘러 가로막았다. 몇 박자 늦은 분노를 뒤늦게 터뜨리며.
“미치셨어요? 전 황자님 동생의 약혼자였다고요!”
“미뉴엘 양, 그대의 말마따나 약혼자‘였’지. 지금은 파혼했으니 상관없는 것 아닌가?”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어요? 형제를 가지고 노는 요부라고 손가락질받지나 않을까 모르겠네요!”
하지만 오스틴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그대가 염려하는 게 정녕 그런 것인가?”
아니었다.
그래도 나는 꿰뚫는 듯한 시선에 지지 않으려 입술을 바르르 떨면서도 꾸역꾸역 대꾸했다.
“저도 사람인데 어떻게 평판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있겠어요.”
“아, 그야 당연하지. 타인의 시선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인간은 없으니까.”
오스틴의 입술이 다시 천천히 호선을 그렸다.
“그렇지만 미뉴엘, 그대가 걱정하는 건.”
그의 곧은 손가락이 내 양쪽 쇄골 사이, 정가운데를 쿡 찔렀다.
“본의 아니게 그대가 품게 된 정령력을 빼앗기지 않을까, 겠지.”
이렇게 대놓고 정령 이야기까지 꺼낼 줄은 몰랐던 터라 나는 잠시 멍해졌다.
“놀랐나?”
“어떻게… 아니, 왜 이런 이야기까지 하는 거죠?”
파드득 떨며 물었지만 돌아온 답은 의외로 정상적이었다.
“사람을 얻으려면 믿음을 보여야 하는 법이니까.”
“그런 위험을 감수할 정도로 제가 당신한테 가치 있는 사람인가요?”
이쪽에서 ‘이황자와 불의 교단은 관련이 있다’고 추측하는 것과 본인의 입으로 말하는 건 결 자체가 달랐다.
스스로가 위험해질 수 있는데도 오스틴은 여유를 잃지 않은 채 질문을 질문으로 받아쳤다.
“그 정도뿐인 것 같나?”
역시 싫다고 생각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더 큰 조건을 내세웠다.
“일이 끝난 뒤에는 정령의 힘도 그대로 돌려주도록 하지.”
오스틴과의 대화는 마치 마트료시카 인형과도 같았다. 열면 열수록 더 큰 것이 나온다는 게 달랐지만.
그러나 나는 긴장을 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욱 몸에 힘이 들어갔다.
세상에 대가 없는 호의는 없을진대 오스틴 같은 인간이라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