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기대에 부응하듯 오스틴은 내 귀밑머리를 매만지며 달콤하게 덧붙였다.
“대신.”
역시나.
“내 손을 잡아, 미뉴엘 양. 내 옆에 있도록 해.”
“잡으면요?”
“그대를 황후로 만들어주지.”
“……!”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마트료시카 인형에서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것이 튀어나왔다.
“그건… 그건.”
어찌나 놀랐던지 나는 같은 단어를 두어 번이나 반복하고 나서야 다음 말을 내뱉을 수 있었다.
“그건 반역이에요.”
에사디엔을 괴롭히며 비뚤어진 반항심을 충족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돌아온 후로 황제와 오스틴의 분위기가 훈훈하다고도 들었는데, 이 무슨 날벼락이냐!
그런데 뻔뻔스럽게도 오스틴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는 내 모후의 복수를 하는 거야.”
“궤변이군요.”
나는 딱 잘라 말했다.
오스틴이 황제가 승하하기를 얌전히 기다릴 것인가, 하는 문제는 차치하자. 일단 그가 후계자가 되기 위해서는 황태자를 제거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머니의 복수와 황태자가 대체 무슨 관련이 있다고?
“반역이라는 말로 내 진심을 흐리다니. 의외로 대공과 그대의 유대 관계가 약한가 보군?”
웃기는 소리.
“하… 저의 어머니는 대리 복수 따위 시키실 분이 아닙니다.”
“아, 하긴. 대공은 우리 모후와 달리 강한 사람이지. 죽더라도 스스로 적을 다 없앤 후 죽을 이야.”
“…….”
처음으로 오스틴과 의견이 일치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기쁘기는커녕 기분이 더 저조해져서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면 뭐, 어쩔 수 없나.”
옅은 체념이 묻은 말투에 이제 좀 물러나겠구나, 싶어 반사적으로 몸에서 힘이 풀렸다. 오래 긴장한 탓에 어깨가 저릿저릿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나는 오스틴을 조금 우습게 본 모양이었다.
“몸으로 꼬실 수밖에.”
“뭐라고요?”
귀를 의심하는 동안 오스틴은 스스럼없이 내 앞에서 몸을 낮추었다.
무릎만 땅에 댄 채로 허리를 세운 그는 천천히 셔츠 단추를 풀어냈다. 행여나 자리를 박차고 도망치지 못하도록 내 다리를 붙든 왼손이 용의주도했다.
‘아니, 일이 대체 왜 이렇게 흘러가는 거야?’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반역에 참여해라, 웃기고 있네, 뭐 이런 대화를 하지 않았던가?
현실감 없는 광경에 정신 줄을 한 가닥 놓은 듯한 생각만 떠올랐다.
로콰이트 황가 남자들의 무릎은 왜 이리 싸구려인가.
셔츠 안쪽 피부도 갈색인데 치트룸에서는 상의를 안 입고 지내는 건가.
에사디엔만큼은 아니어도 옷깃 사이로 차츰 드러나는 골이 꽤 봐줄 만한 편이다.
등등.
“미야아악!”
점점 더 우주로 날아가는 정신을 붙잡아 준 건 꽉 껴안은 품 안에서 날카롭게 내지른 엘의 울음소리였다.
그 심상치 않은 기세에 나는 재빨리 엘을 저만치 내려놓고 오스틴의 멱살을 쥐었다.
“외간 여자한테 이런 거 함부로 보여주는 거 아니에요.”
“꽤 격한 방식으로 아껴주는군.”
그런데 이 미친놈이 멱살을 잡힌 채로도 실실 웃는 게 아닌가.
“그대처럼 일관적인 여자는 처음이야. 역시 나와 결혼해 줘야겠어.”
“야, 이……!”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정의의 발길질을 날렸다.
하지만 너무 가까이 붙어 있었던 탓일까. 오스틴은 힘도 들이지 않고 턱 하니 내 발을 붙잡았다.
“두 번은 안 당해. 지난번에 너무 아팠거든.”
싱글벙글 웃는 게 이렇게 꼴 보기 싫을 줄이야.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옛말은 완전히 틀렸다.
급기야 오스틴의 손이 내 발목을 따라 올라오기 시작했다. 나는 몸서리치며 그의 멱살을 놓고 외쳤다.
“이, 이거 놔요!”
“싫은데.”
역시 그냥 죽여버리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분노를 눌러 담아 잇새로 씹어뱉듯이 말했다. 어떤 사람이 이 정도로 싫어진 적은 정말이지 난생처음이었다.
“황제 폐하께, 그리고 황태자 전하께도 보고할 거야. 당신이 반역을 도모하고 있다고.”
그러나 오스틴의 여유로운 표정은 결코 무너지지 않았다. 그는 딱 한 문장으로 상황을 정리했다.
“증거 있어?”
오, 마이 혈압…….
증거는 없지만 내 발은 두 개다. 나는 붙잡힌 오른발 대신 왼발을 격렬한 기세로 내질렀다.
퍽!
“……!”
타격음이 제대로 울리며 오스틴은 입을 조금 벌린 상태로 숨을 멈췄다. 그의 잘난 얼굴이 순식간에 시뻘게졌다가 다음 순간 하얗게 탈색되기를 반복했다.
귀족 영애라고 급소 공격할 줄 모르는 거 아니거든?
‘방심하고 수작 부리더니 꼴좋다.’
“흥.”
나는 코웃음과 함께 붙잡혔던 오른발을 툭 털어냈다. 오스틴이 더 버티지 못하고 옆으로 쿵 쓰러졌지만 알 게 뭔가. 어차피 조금 있으면 하인들이 올 텐데.
“엘, 가자.”
엘은 공격 태세를 갖춘 자세로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내가 오스틴을 쓰러뜨린 것이 어지간히 놀라운 모양이었다.
“안 가? 그럼 두고 간다?”
그렇게 을러서야 주춤주춤 이쪽으로 다가왔지만 엉덩이를 뒤로 쭉 뺀 자세가 우스꽝스럽기 그지없었다.
“괜찮아. 네 땅콩은 안 건드린다니… 읍.”
“먁!”
엘이 더 말하지 말라는 듯 다급하게 내 입 위로 앞발을 턱 하니 올렸다.
내가 그대로 배시시 웃자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 쉬며 얌전히 안긴 것은 덤이었다. 어쩐지 엉덩이를 토닥일 때마다 움찔거리는 것 같기는 하지만.
* * *
혹시나 했지만 오스틴을 바로 발고하는 데는 부모님도 회의적이셨다.
“섣부르게 덤비면 오히려 이쪽이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단다.”
증거가 중요하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는 있지만 한숨이 절로 터져 나왔다.
대체 어떻게 증거를 구한단 말인가? 바보가 아닌 이상 ‘나 반역 계획 중’이라고 서류를 만들어둘 리도 없고.
“그런데 미뉴엘.”
심란하기 그지없어진 나를 보며 아버지가 의뭉스럽게 웃으셨다. 내게 이런 얼굴을 보이신 것은 처음이라 조금 당황한 나는 다소 늦게 대답했다.
“…네, 아빠?”
“네 생각은 어때? 황후가 되고 싶지는 않으니?”
“에이, 됐어요.”
반사적으로 손까지 휘저으며 거절하고 나서야 아버지가 내 의중을 떠보셨다는 걸 깨달았다.
“아빠!”
“하하. 혹시 모르잖니. 인간이라면 위를 올려다보는 것이 당연하니까.”
“저는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 사람은 높이 올라가면 갈수록 인생이 피곤해지는걸요.”
그리고 나는 지금 충분히 높은 곳에서 살고 있다.
내 머리 위에 선 사람보다 발밑에 있는 사람이 더 많은 삶, 먹고 자고 입는 것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풍요로운 삶, 나를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가 존재하는 충만한 삶.
게다가 이제는 건강도 전보다 훨씬 좋아졌다. 물론 그 대가로 정령을 도와야 하지만 그건 인생의 마지막 고비처럼만 느껴졌다.
“이 이상은 바라지 않아요.”
다시 한번 되풀이하는 내게 부모님은 애늙은이를 보는 듯한 시선을 던지셨다.
‘나도 성인인데.’
그러나 자식이 몇 살이든 부모 눈에는 아이로 보인다는 말을 전생에서부터 익히 들었다. 특히나 나는 막둥이라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듯 천진한 웃음을 띠며 다른 이유를 덧붙였다.
“게다가 황태자 전하는 엘가 언니의 둘도 없는 친구잖아요. 그리고 황제 폐하도, 황태자 전하도 제게 언제나 잘해 주셔서……. 그분들을 배반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들이 내게 보인 친절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 에사디엔의 약혼녀라서, 친구의 동생이라서. 하지만 그 호감에 진심이 전혀 섞이지 않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해한다, 미뉴엘. 폐하께서는 엄정한 군주이시지만 카르이넨을 믿고 인간적인 면모도 많이 보여주셨으니까.”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황제가 소싯적에 전쟁터를 엄청나게 누볐다는 말을 듣고 처음에는 조금 무서워했으니까.
‘이럴 때 에사디엔이 있으면 좋을 텐데.’
황제의 직속 부대도 찾아내지 못하는 에사디엔을 어디에서 데려오겠느냐마는, 이럴 때는 그의 생각이 절로 떠올랐다.
신하가 반역 혐의를 제기했다가 입증하지 못하면 멸문이지만, 같은 황족이라면 여차할 때는 집안 문제라고 얼버무릴 수 있다.
그리고 에사디엔은 꽤 대단한 수준의 기사인 데다 오스틴도 그의 앞에서라면 더 뚜렷하게 감정을 드러냈으니까.
파혼하고 상처도 어마어마하게 많이 줬으면서 이용하려고 하다니. 나도 사람인데 양심에 가책이 들지 않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일이 더 커지기 전에 막아야 해.’
그래. 오스틴이 정말로 반역을 실행에 옮기기 전에. 황제와 황태자 모두가 마음을 다치고 더 나아가 목숨을 잃기 전에.
‘그러니까 에사디엔, 지금 어디에 있든 부디 빨리 돌아와 줘요.’
* * *
그런데 한 가지 예상하지 못했던 점이 있었다.
봉변을 당한 뒤로도 오스틴은 내게 끈질길 정도로 달라붙었다.
“구혼자에게 그대의 마음을 돌릴 기회를 줘야 정당한 것 아니겠어?”
이렇게 짖어대면서.
시간이 흐르며 나는 그 반짝거리는 머리카락 끄트머리만 보여도 자리를 피했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그런 일이 반복되자 오스틴은 한술 더 떠서 우연을 가장해 마주치는 것을 때려치우고 아예 대놓고 내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사촌 형제끼리도 닮는 건가?’
에사디엔이 떠오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로콰이트의 대공저 앞에서 내가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고 했지. 그뿐인가? 사도님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 신전에서 자리를 마련하기도 했고, 황태자 대신이랍시고 마법 학교 입학식에까지 참석했지.
“에사디엔…….”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 이름에 엎드려 있던 엘의 귀가 쫑긋 섰다. 이어 이쪽을 빤히 보는 엘에게 나는 재빨리 고개를 저어 보였다.
“실수야. 우리 엘 부른 거 아니야.”
“뮤우…….”
엘은 기운 없이 몸을 수그렸다. 요즘 들어 눈에 띄게 의기소침해졌는데 도통 이유를 알 수 없어 걱정만 쌓였다.
“라망드도 건강상 별문제는 없다고 했는데.”
하지만 아픈 데 없는 애가 왜 갑자기 저러느냐고.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런가?’
성에 모르는 사람들이 잔뜩 들어와 있으니까. 동물들은 예민해서 이런 상황에 스트레스를 받을 수도 있다고 들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듯해 찜찜함이 남았다.
지난번에 겨우 오스틴에게서 빠져나와 내 방으로 뛰어 들어왔을 때, 조용조용한 대화 소리가 뚝 끊기고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걸 분명히 느꼈으니까.
방 안에 있던 건 오로지 엘과 개비뿐. 엘이 자는 틈을 타서 무슨 얘기를 했는지 개비를 들들 볶아봤지만.
- 왜 뒤에서 캐묻고 그래? 나 그렇게 비겁한 정령 아니다?
…라며 혼만 났다.
나라고 직접 물어보고 싶지 않겠느냐고! 말이 안 통하는데 어떡해, 그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