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어떡하기는.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는 거지.
“엘, 혹시 이 안에서 사는 게 답답하니?”
전에도 말한 바 있지만 집이 리조트만큼 커도 답답할 수 있는 거다.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지자 엘은 곧바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러면, 요즘 식사가 입맛에 안 맞아? 메뉴를 바꿔줄까?”
또다시 도리도리.
그 뒤로도 조금이라도 짚이는 것을 하나하나 물었지만 도리도리만 반복됐을 뿐이다.
도무지 이유를 알 수가 없으니 답답할 따름이다.
‘여기까지만 할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마지막으로 엘에게 살짝 장난을 쳤다.
“우리 엘이 누나한테 질린 걸까나아.”
“……!”
그러자 엘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뒤이어 그 똥그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오르더니 바닥으로 뚝뚝뚝뚝 빗방울처럼 떨어졌다.
“어, 어? 엘?”
엘이 이렇게 서럽게 울다니!
언제나 한껏 애교 부리고 때로는 나를 위로해 주던 엘. 그런 모습만 봐왔던 나는 깜짝 놀라 우왕좌왕하다가 뒤늦게 엘을 안아 들려고 했다.
“노, 농담이었는데. 미안해.”
하지만 엘은 내가 뻗은 손 사이를 빠져나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쌩하니 달렸다. 나도 엉거주춤한 자세로 엘의 뒤를 따라 뛰었다.
하필이면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엘은 마침 잘되었다는 것처럼 문틈으로 빠져나가려 했고 미처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한 탓에 다리가 꼬인 나는 간절하게 외칠 수밖에 없었다.
“엘, 잠깐만!”
“어이쿠.”
뭔가가 둔탁하게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살짝 열린 문 사이로 갓 구운 빵처럼 갈색이 도는 피부가 슬쩍 보였다.
싫은 예감에 인상을 찌푸린 찰나 이제는 아예 자기 집처럼 셔츠 차림이 일상이 되어버린 오스틴이 엘의 목덜미를 달랑 쥐고 들어왔다.
“이 녀석이 도망치려고 했나?”
“하악!”
엘은 네 발의 발톱을 전부 드러내고 마구 휘둘렀지만 뒷덜미를 쥔 오스틴에게 닿을 리는 없었다. 안쓰럽게도.
그래도 더 흥분하면 둘 중 하나는, 아니 아마 높은 확률로 엘이 다치겠구나 싶어 나는 얼른 녀석을 받아 들었다.
평소처럼 녹아들듯 폭 안기는 것도 아니고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래도 오스틴보다 이쪽이 낫다고 생각했는지 엘은 반항을 그만두었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것을 확인하고 살짝 고개를 숙이자 오스틴의 얼굴에 의기양양함이 번졌다.
“이 정도야 얼마든지 해줄 수 있지.”
곧장 이어진 내 말에 금방 굳어졌지만.
“그런데 제 방 위치는 어떻게 아시고 오셨죠? 이렇게 개인실에 찾아오는 거, 실례라는 걸 아실 만한 분이 왜 이러세요?”
“왜 이러느냐, 라.”
질문을 따라서 읊은 오스틴은 나를 지나쳐 소파에 털썩 앉았다. 내가 권하지 않았음에도.
그 막무가내에 질린 내게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요구했다.
“차 한 잔 주지.”
“…황자님을 모시는 하인들이 차도 제때 내주지 않았던 모양이군요. 징계하겠습니다.”
“그래서는 아니야.”
“그러면 왜 굳이 여기까지 오셔서…….”
“꼭 내 입으로 말하게 만들다니.”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이다음 말을 들으면 닭살이 오돌토돌하게 올라올 거라는 예감.
“아니,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
“구애하는 상대가 우린 차를 마시고 싶은 내 마음을.”
“…….”
서둘러 막으려 했지만 오스틴이 조금 더 빨랐다. 일그러진 내 눈빛을 여상하게 흘리며 그는 싱글싱글 웃었다.
“추워, 미뉴엘 양.”
그렇게 입고 다니니까 춥지. 그냥 얼어 죽어라!
떫든 쓰든 빨리 마시고 꺼지라는 심정으로 설렁설렁 우린 차도 싫은 기색 없이 머금은 오스틴이 물었다.
“잘생긴 남자를 좋아한다고 들었는데.”
“예쁘고 잘생긴 걸 싫어하는 사람도 있나요?”
“그거야 그렇지. 그렇다면 그대 눈에 나는 어때? 나 정도면 괜찮지 않나?”
그 질문을 들은 순간 깨달았다.
거울 앞에서 자신의 외모에 감탄하던 나를 볼 때마다 라망드의 표정이 썩어들어 가던 이유를.
‘미안했다, 친구야.’
아마 지금 내 표정도 라망드가 짓던 것 못지않게 썩었을 것이다. 변명하듯 웃으며 말하는 오스틴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뻐기는 게 아니라, 도통 넘어오지 않는 이유가 궁금해서.”
“하.”
나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내가 미남을 좋아한다는 사실은 제국 전체, 아니 아예 사막을 건너 치트룸에까지 퍼진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 미뉴엘 카르이넨은 새로 태어났다고! 에사디엔을 겪은 이후로 얼굴만 보고 반하는 짓 따위 하지 않아!
내가 속으로 뭐라 외치는지 알 턱이 없는 오스틴은 여전히 대답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뻐기는 게 아니라더니 은근히 기대감을 담은 시선이 아주 초롱초롱해서, 나는 떨떠름하게 입을 열었다.
“뭐, 객관적으로 보면 황자님도 미남이세요.”
그때였다. 문밖으로 나서자마자 오스틴에게 답삭 붙들린 것이 충격이었는지 여태 잠잠하게만 있던 엘이 갑작스럽게 발톱을 세우며 으르렁거렸다.
“크릉!”
“아얏, 놀라라.”
추위를 타지 않는 내 옷차림도 오스틴만큼이나 얇았다. 하지만 그래도 천인데 대체 얼마나 날카로운 건지 엘의 발톱은 천을 뚫고 들어와 살갗에 생채기를 냈다.
대부분은 그냥 긁힌 정도였지만 딱 한 군데 피가 조금 맺혔다. 하늘색 천 위로 잉크를 잘못 떨어뜨린 것처럼 콕 찍힌 핏방울의 흔적을 보고 엘이 딱딱하게 굳었다.
“괜찮아, 엘. 누나는 하나도 안 아파. 괜찮아.”
빈말도 아니고 정말 괜찮았는데, 엘은 자신이 나를 다치게 했다는 사실에 굉장한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 조그만 핏자국과 나를 번갈아 보던 푸른 눈에 또다시 눈물이 글썽거렸다.
‘한번 울음보가 터지니 완전히 잠글 수가 없는 걸까?’
예쁜 눈에서 눈물이 또르르 흐르는 모습을 더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나는 앞에 오스틴이 있든 말든 엘을 둥개둥개 어르며 귓가에 소곤거렸다.
“왜 자꾸 울어, 응? 누가 서럽게 해쩌요. 누나가 그래쩌요?”
“먀아.”
아까처럼 고개를 저어 보인 엘은 재빠르게 내 어깨를 짚고 서서 맞은편의 오스틴더러 보란 듯이 뺨을 핥았다.
그 모습을 찬찬히 살피던 오스틴은 가소롭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주인을 너무 좋아해서 질투하는 건가? 귀엽군. 나도 동물을 좋아하는 편이야.”
은근슬쩍 같은 관심사로 어필하려는 수작에 나는 냅다 철벽을 쳤다.
“아, 예.”
안 물어봤어요. 안 궁금해요.
“…….”
“…….”
다행히 의도가 잘 먹혀서 잠시간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오스틴은 정말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이제 저놈도 지쳤겠거니 싶어 긴장을 풀려던 순간이었다.
“그러고 보니 미뉴엘 양이 외출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군.”
“…바깥에서 활동하는 걸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서요.”
“음, 황후가 되면 내치를 잘하겠군. 다시 한번 반할 것 같아.”
“…….”
황후 같은 거 하고 싶지 않다고! 원한 적도 없고!
정말이지 너무 지쳤다. 말도 안 되는 구혼, 엘의 털끝만큼도 설레지 않는 플러팅, 속이 시커먼 사람과 함께 있는 이 상황 자체까지도.
그래서인지 나도 모르게 자제력을 잃고 흐릿하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멍멍…….”
“방금 뭐라고 했지?”
오스틴은 그걸 또 듣고 한쪽 눈썹을 추켰다.
‘이렇게 된 거 이판사판 오리발이다!’
나는 짧게나마 사교계에서 배운 스킬, ‘아무것도 몰라요’ 미소를 장착하고 답했다.
“네?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그런가. 그러면…….”
입가를 톡톡 두들기던 오스틴이 그 손을 그대로 내게 뻗었다.
“개소리를 지껄인 데 대한 사과로 데이트를 신청하지.”
역시 다 들었잖아.
아니라고 했는데 다시 말을 바꾸어서 사과하는 것도 체면 상하는 짓이다. 나는 앞부분을 아예 못 들은 것처럼 넘겨버리고 오스틴의 손도 무시한 채 내가 할 말만 했다.
“거절합니다.”
“구혼자 체면도 봐줘야 할 때가 있는 거야. 이래 봬도 나는 황자가 아닌가.”
“네, 다음 거절.”
“사실은 대공도 이미 허락했다네.”
이건 정말로 예상하지 못한 거였다. 기습을 당한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거의 비명을 질렀다.
“뭐, 뭐라고요?!”
어머니도 내가 오스틴이라면 치를 떨 정도로 질린 걸 알고 계셨다. 그런데 어째서?
하지만 오스틴의 여유만만한 태도를 보니 어머니께서 허락하셨다는 게 거짓말은 아닌 듯했다.
나를 따라서 천천히 일어선 그가 다시 한번 손을 내밀었다.
“지금쯤 바깥에 마차가 준비됐겠군. 함께 나가지.”
* * *
불의 정령, 개비는 라망드보다 에사디엔 쪽을 월등히 좋아했다.
라망드는 결코 개비를 좋아할 수 없었다. 오랜 시간 미뉴엘이 고통받는 모습을 가장 가까이에서 본 사람이었으니까.
그 원한이 은연중에 드러나기도 했고, 은근히 하찮게 여기는 태도도 그랬지만 개비가 에사디엔을 더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것이었다.
- 너 말이야. 희한한 기운을 품고 있구나?
- 제가 말입니까?
- 그래. 내 친구하고 비슷한데 조금, 음…….
알맞은 표현을 찾는지 마치 사람처럼 고개를 좌우로 갸웃거리던 개비가 마침내 말을 끝맺었다.
- 짠 내가 나.
짠 내라니. 땀 냄새가 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조금 충격받은 에사디엔이 몸 이곳저곳에 대고 코를 킁킁대 봤지만, 불과 엊그제 목욕한 덕에 입욕제 냄새만 날 뿐이었다.
‘멀쩡하군. 그런데 어째서 저런 말을.’
에사디엔은 매우 사랑받는 ‘고양이’였으므로 털 뭉친 곳 하나 없이 최상의 관리를 받고 있었다.
조금 안도한 그를 보며 개비가 크게 웃었다. 벌린 입 속에서는 불길이 혓바닥처럼 날름거렸다.
- 기운이라고 했잖으냐. 육신의 냄새는 모른다. 나는 바람의 정령도 아니고.
개비는 곧은 자세로 앉은 에사디엔 주변을 신이 난 것처럼 빙글빙글 돌았다.
그런 행동거지와 작은 몸집이 어우러져서 큰 힘을 가진 정령이라기보다 어린아이처럼만 보였지만 에사디엔은 현명하게도 그런 생각을 내색하지 않았다.
- 그런데 원래는 인간이면서 왜 짐승 거죽을 쓰고 있느냐?
- 저도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약의 부작용이 아닐까 합니다.
- 미뉴엘은 알고 있고?
이 화제만 나오면 에사디엔은 할 말이 없어졌다. 조용히 고개만 저을 뿐이다.
- 인간들의 생리를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미뉴엘, 그 인간은 성격이 장난 아니던데 말이지.
‘정령도 아는군.’
평소에는 솜사탕 같은 미뉴엘이지만 화가 나면 가차 없었다.
아직도 가끔 라페슈와 둘이 있는 그를 보고 장갑을 던지던 미뉴엘을 떠올릴 때면 온몸의 피가 서늘하게 식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정령이 저럴 정도라면 대체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말인가.
미뉴엘은 무서울 정도로 저돌적인 사람이다. 물론 그런 면도 사랑스럽다고 생각하지만 가끔은 걱정스럽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