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 인간들 사이에는 이런 말이 있지 않더냐?
- 어떤 말을 이르십니까?
- 매도 빨리 맞는 편이 낫다.
- …….
왜 하필이면 알아도 저런 말을 아는 건지. 에사디엔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 저도 알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밝혀야 한다는 것을.
그러나 그때가 오지 않기를 바랐다. 라망드가 던졌던 가정에 대한 답은 아직도 정하지 못했고 생각하면 속이 울렁거리기만 했다.
그래도, 그렇더라도 미뉴엘이 혐오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건 두 번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 정령이시여, 미뉴엘에게는 비밀로 해주십시오.
- 글쎄다. 어느 쪽이 더 재미있으려나.
- 부탁드립니다.
- 흐응?
- 정령이시…….
벌컥!
개비가 놀리는 것도 모르고 에사디엔이 한창 그를 따라다니며 조르던 중이었다.
문이 거칠게 열리는 것과 동시에 정령과 짐승의 움직임이 딱 멎었다. 화제의 주인공, 미뉴엘이 들어오자마자 문을 걷어차며 씩씩거린 탓이다.
“아오! 저놈의 황자, 정말 언제 돌아간다니? 지긋지긋… 어라?”
‘둘이서 노는 중이었나?’
처음에는 미뉴엘도 그렇게만 생각했다. 하지만 제 발이 저렸던 에사디엔이 슬그머니 자리를 뜨려 하자 하늘빛 눈이 가늘어졌다.
‘엘이 왜 나를 피하지?’
설마하니 나이 지긋하게 먹은 정령이 새끼 고양이를 괴롭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알면서도 혹시나 해서 의심 어린 눈초리를 개비에게 던졌지만 녀석은 천진난만하게 허공을 빙글빙글 돌고 있을 뿐이었다.
‘나중에 물어볼까.’
미뉴엘은 훗날, 계약 관계이니만큼 개비가 순순히 불 거라고 생각하고 넘어간 것을 후회하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그때 일이고.
“엘, 이리 와.”
지금은 쪼르르 달려가서 등을 보인 엘을 답삭 껴안을 뿐이다.
“먀, 먀웅.”
에사디엔은 잠시 버둥거렸지만 발바닥이며 코, 이마, 목덜미로 이어지는 뽀뽀 세례에 흐물흐물하게 풀어져 버렸다.
“누나 너무 힘드러쩌.”
더군다나 미뉴엘이 힘들다는데야. 개비의 시선이 느껴져서 등줄기에 땀이 흘렀지만 지금 당장 폭로할 것 같지는 않았다.
- 무슨 일이지? 왜 힘들었는지 말해 다오.
이렇게 말해 보았자 입에서 흘러나가는 건 ‘먀먀’ 소리뿐이었다. 그래도 미뉴엘은 마치 그 뜻을 알아들은 사람처럼 그의 귓가에 속닥속닥 이야기를 풀었다.
“정령 녀석이 말이야. 말도 안 되는 과제를 내주고 말이야. 그러면서 자기는 저렇게 편하게 있고 말이야.”
- 저런.
에사디엔은 안쓰러운 마음에 미뉴엘의 손목 안쪽으로 이마를 쓱 부볐다.
요즘 미뉴엘은 이황자가 큰일을 치기 전에 조금이라도 힘을 이용할 방법을 찾겠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개비의 힘은 그가 처음 눈을 떴을 때부터 의지에 따라 움직인 것이다. 이제 와 그것을 ‘이용할 방법’을 가르치려 해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막막했다.
미뉴엘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동굴 안에서 있었던 일로 조금은 극복했다지만 아직도 불에 대한 공포심을 다 떨치지 못한 상태였다.
둘 다 미묘하게 틀어져 있으니 잘될 리가 없었다.
“저 개비 녀석, 한 번 와보지도 않고 말이야. 정말 벽난로에만 처박혀 있을 줄이야…….”
- 다 들린다, 이 인간아!
“뭐, 들리면 뭐!”
둘 사이도 좋을 리가 없고.
- 미뉴엘, 잠시만 진정을.
미뉴엘은 개비와 만난 뒤로 더 다혈질이 된 것 같았다. 에사디엔이 말려보려 했지만 그녀와 개비가 동시에 그를 향해 인상을 찌푸려 보였다.
“엘, 잠시만. 누나 얘기 좀 하게.”
- 너는 좀 빠져 있거라.
- …….
어지간한 에사디엔도 이때만큼은 정말로 토라질 뻔했다. 그를 대신해서 그의 꼬리가 못마땅한 심기를 그대로 표출해 주는 동안 미뉴엘과 개비의 언성은 점점 더 높아지고 있었다.
- 불을 그렇게 피워뒀는데도 뭐 느껴지는 게 없어? 이렇게 뻗으면 딱!
개비가 손을 쭉 뻗자 벽난로 안에서 타오르던 불길이 바깥으로 화르륵 빠져나왔다.
“실내에서 그러면 어떡해! 어후, 잿가루!”
- 쳇.
“그리고 그게 됐으면 내가 진작에 정령 했지! 너하고 계약을 했겠어?”
- 감히 정령은 무슨! 너는 소질이 없어, 소질이!
“아, 그러세요? 왜 그 소질 없는 사람한테 붙으셨대? 소질 많은 사람 몸이나 빼앗지!”
이쪽에서 어흥! 하면 저쪽에서도 크르렁! 한다. 더 참지 못한 에사디엔이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먕먀(그만)!”
그 소리가 어찌나 쩌렁쩌렁했던지 한창 열이 올랐던 미뉴엘과 개비마저 움찔했을 정도였다.
- 정령이여, 당신은 어마어마한 힘을 관장하며 신에 비견될 존재입니다. 답답함은 알겠으나 조금만 아량을 베풀 수는 없겠습니까?
- 네가 내 심정을 어찌 헤아린다고 그러느냐.
개비는 투덜거렸지만 기세는 확실히 죽은 상태였다. 한참 에사디엔이 먕먕거리는 것을 신기하게 바라보던 미뉴엘이 쿡 찌르듯 물었다.
“왜, 엘이 뭐래?”
- 말 안 해줘.
“이익, 치사하게!”
“먀!”
또 발끈하려던 미뉴엘이 그녀를 휙 돌아보는 에사디엔의 시선에 푸시시 식었다.
- 미뉴엘, 무조건 숙이라고는 하지 않겠지만, 둘이 협력해야 하는 상황 아닌가? 너무 조급하면 될 일도 안 되는 법이다.
여전히 미뉴엘에게는 그의 말이 먕먕거리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지만 분위기를 보아 잔소리라는 것만은 알아차렸다.
“엘.”
미뉴엘은 무릎을 굽혀 그녀의 사랑스러운 짐승을 꼭 껴안았다.
“고마워, 걱정해 줘서.”
그대로 일어선 미뉴엘은 개비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 뭐, 뭐냐.
“고양이는 십 년을 넘게 산다더라. 정확히 고양이는 아니라지만 엘도 그 정도는 살지 않을까 싶어.”
- 뭐… 그래서?
“나, 삼 년 남았다면서.”
‘뭐라고?’
에사디엔은 깜짝 놀라 개비를 바라보았다. 미뉴엘은 평소 그런 내색이 전혀 없었고, 심지어 라망드에게도 말하는 걸 보지 못했건만.
개비도 에사디엔을 보았지만 별다른 부연 설명은 없었다. 그러는 동안에 미뉴엘은 한층 더 담담해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최소한 엘이 무지개다리를 건넌 후에 죽고 싶어. 나만 보는 애를 나 없이 쓸쓸히 살게 하고 싶지 않아.”
- 계약을 했으니 삼 년보다는 더 살 테지만 저 녀석의 끝을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구나.
“그러니까… 그럴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말이야.”
정령과 인간은 잠시 묵묵히 서로를 들여다보았다.
정령은 자연의 정수나 다름없는 존재. 생명을 어여삐 여길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 좋다.
미뉴엘의 말이 진심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개비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 요시초라는 풀이 있다.
- ……!
에사디엔이 아는 식물이었다. 한때 라페슈가 찾아다니며 가루를 구매하고 죽은 셀레스테 자작이 밭째로 구입했던 그 식물.
잔뜩 집중한 에사디엔의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개비의 말이 천천히 이어졌다.
- 인간들은 요시초를 지력이 다 소모된 땅을 살리는 데 쓰는 모양이더구나. 그런데 그 풀을 말린 뒤에 갈아서 섭취하면 자연력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지.
“뭐? 처음부터 말해 주지 그랬…….”
- 아주 먼 옛날, ‘정령사’라는 것이 있던 때에는 누구나 알던 지식이다. 그러나 그것에 의존하면 너는 네 존재를 잃게 될 거다. 그래도 좋은가?
“…그럴 리가.”
개비가 자세한 설명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미뉴엘은 본능적으로 몸을 떨었다.
존재를 잃는다는 건 이 세상에 내린 뿌리가 졸지에 사라진다는 뜻이었다. 그래도 좋은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특히나 개비에게 몸을 빼앗기지 않으려 정신을 바짝 차렸던 미뉴엘인데.
- 하나 긴급한 상황에 한두 번 쓰는 정도야 괜찮을 것이다. 수련은 수련이고, 혹시 모르니 구비해 두도록 하여라.
“알았어.”
만난 뒤 처음으로 둘 사이의 분위기가 부드러워졌지만 에사디엔은 요시초에 대해 생각하느라 흐뭇해할 겨를이 없었다.
셀레스테 자작이 언급하던 ‘그분’.
자객인 척하는 이황자와 함께 나타난 자들이 쏘아낸 불꽃. 그것을 흡수했던 미뉴엘은 정령의 힘을 품고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정령은 갑자기 세를 확장한 불의 교단에 힘을 빼앗긴 상태…….
‘그렇다면 형님과 불의 교단이 관련 있다는 뜻인가?’
그렇게 생각하면 딱 들어맞았다.
셀레스테 자작이 주군으로 이황자를 모셨고, 그가 조달한 요시초가 불의 교단에 힘을 보탠 것이라면.
‘설마.’
아무리 오스틴이 악한이라도 조국에 해를 끼쳤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미뉴엘에게 스스럼없이 반역을 제안하는 오스틴을 보며 에사디엔의 가느다란 희망은 산산이 부서졌다.
‘폐하와 누님께 알려야 하는데.’
지금이라도 라망드 사제에게 말한다면 로콰이트로 데려가 줄 것이었다. 그가 에사디엔이라는 사실을 믿게 하기는 복잡하더라도 어떻게든 경고를 할 수는 있을 터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인간의 몸이나 짐승의 몸 할 것 없이 미뉴엘의 곁에는 있을 수 없었다. 아니, 곁은커녕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것도 허용되지 않을 터였다.
‘미뉴엘이 처음으로 좋아했던 사람을 떠올리면서 토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니까.’
그건 사실 라망드보다 에사디엔에게 더 절실했다.
미뉴엘이 자신을 보며 웃어주길 바랐다. 스스럼없이 안아주길 바랐다. 곁을 내어주길 바랐다.
그 모든 것이 충족된 지금을… 놓고 싶지 않았다.
이기적인 자신의 민낯이 혐오스러웠지만 오스틴은 그가 우울감에 빠져 허우적거리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미뉴엘이 싫어하다 못해 치를 떠는데도 개의치 않고 온갖 수작을 부리는 모습이라니. 에사디엔은 오스틴에 대한 감정 때문에 평소보다 더 날뛰다가 미뉴엘을 상처 입히기까지 했다.
“개소리를 지껄인 데 대한 사과로 데이트를 신청하지.”
급기야는 데이트라니. 미뉴엘과 카듀렌의 거리를 거닐던 때를 떠올리며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참을 수 있었던 것은 계획이 다 있어서였다.
“지금쯤 바깥에 마차가 준비됐겠군. 함께 나가지.”
거의 어거지로 오스틴이 미뉴엘을 데리고 나간 후, 노여움과 질투로 바르르 떤 에사디엔은 바로 라망드에게 향했다.
- 방금 출발했다.
나도 봤다, 는 뜻으로 고개를 한 번 까딱인 라망드가 기사들에게 신호했다.
“우리도 출발하죠.”
“알겠습니다!”
몇 조로 구성된 기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두 조는 오스틴과 미뉴엘이 탄 마차를, 그리고 나머지 조는 예상되는 진로로 앞질러 나가 대기했다.
대공이 그냥 ‘데이트’를 허락할 리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