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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 영애 집착을 시작합니다 (70)화 (70/130)

70화

번화가를 빙빙 돌다가 찻집까지 끌려 들어간 미뉴엘은 이제 표정을 숨길 생각도 없어 보였다.

이마에 ‘언짢음’이라고 커다랗게 쓰인 듯해 그녀를 멀리서 지켜보던 라망드와 에사디엔은 긴장한 와중에도 흐릿하게 웃었다.

- 미뉴엘답군.

“거칠 것이 없지요. 다만 적 앞에서는 조금 숨겨줬으면 좋겠는데 말입니다.”

- 동감이다.

미뉴엘의 태도가 그런데도 오스틴은 별달리 개의치 않고 느긋했다.

“이 차가운 공기, 처음에는 좋았지만 너무 춥군.”

“그럼 이만 들어가실까요?”

“사막에 가본 적이 있나, 미뉴엘 양? 따가울 정도로 뜨거운 햇빛에 공기마저 달아오른다네.”

“…뜨거운 건 영 별로라서요.”

“그건 곤란하군. 난 침대에선 한낮의 사막보다 더 뜨거운 남자거든.”

순간적으로 올라오는 구역질을 참으려 미뉴엘의 얼굴이 핼쑥하게 질렸다.

‘님 침대 사정은 하나도 궁금하지 않거든요!’

신개념 철벽이랄까. 도무지 무슨 말을 해도 통하지 않았다.

미뉴엘은 그것이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말 한 사람으로 대우하는 것이 아니라 카르이넨의 힘을 이용하기 위한 수단이라 앞에 두는 것일 뿐이라고 느껴졌으니까.

그리고 한편으로는 다른 사실도 깨달았다.

‘에사디엔하고는 달라. 너무 달라.’

둘 다 벽창호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정말로 미뉴엘을 이용하려는 오스틴을 접해 보자 알 수 있었다.

‘어차피 우리 가문을 방패로 쓰려고 한 거잖아요.’

‘그런 게 아니다.’

그때는 믿지 않았지만 에사디엔에게는 정말로 그녀 덕을 보려는 생각이 없었던 거다.

‘그렇다면 설마…….’

‘그대를 사랑한다. 내가 너무 늦게 깨달았어.’

그 말도 진심이었다는 뜻……?

이어 그런 결론에 도달해 버린 미뉴엘의 눈이 정처 없이 테이블 위를 떠돌았다.

그녀가 에사디엔에게 얼마나 매몰차게 대했던가. 심지어 울리기까지 했다.

‘으아아.’

양심이 쿡쿡 찔려 견딜 수 없어진 미뉴엘이 이마를 짚자 오스틴이 다리를 바꿔 꼬며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아닙니다.”

미뉴엘은 얼른 찻잔을 들어 올리며 표정을 숨겼다. 잠시 자신이 지금 누구와 있는지 잊어버리고 과거 생각에 잠겨 있었다.

‘과거……. 그래. 과거야.’

지금은 없는 사람이고 지나간 기회이며 흘러간 감정이다.

미안한 마음은 지워지지 않는 얼룩처럼 오래도록 남겠지만.

“피곤해하는 것 같으니 이만 일어날까.”

“그러죠.”

이제 막 두어 모금 머금은 참이었다. 하지만 차가 아깝다는 생각보다 귀가에 대한 반가움이 더 컸으므로 미뉴엘은 반색하며 벌떡 일어났다.

오스틴이 짧게 웃었다.

“오늘 하루 중 가장 밝은 얼굴이군.”

“덕분에요.”

짧게 응수한 미뉴엘은 찬 바람이 일 정도로 재빨리 마차에 탔다.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마차의 속도가 점점 느려지면서 마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맞은편에서 마차가 여러 대 오고 있어 잠시 서행하겠습니다.”

오스틴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고 미뉴엘도 그러려니 하며 쿠션에 등을 기댄 채 가만히 기다렸다.

‘좀 천천히 간다고 무슨 일 나는 것도 아니고.’

빨리 가려다가 빨리 저승 간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다각다각다각.

그런데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는 다수의 말발굽과 바퀴 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기다린다? 우리 마차가?’

불합리한 일이지만 좁은 길목에서 두 마차가 마주쳤을 경우에는 지위가 낮은 쪽에서 비켜줘야만 했다.

물론 로콰이트에서는 귀족 간의 복잡한 관계 탓에 변수가 많았지만 여기는 카르이넨 가문의 땅이다.

‘더군다나… 황족이 함께 있는데?’

당황한 미뉴엘이 창을 가린 두꺼운 커튼을 치우려 했을 때였다.

벌컥!

마차 문이 거세게 열리며 미뉴엘의 입이 틀어막혔다.

* * *

기사들이 이상을 감지한 것은 이황자와 미뉴엘이 탄 마차가 번화가 외곽에 다다랐을 때쯤이었다.

“어디로 가시는 건가?”

“목적지를 알 수 없습니다.”

“앞쪽 조들도 전부 집결시켜.”

그런데 마치 그들의 상황을 아는 것처럼 갑자기 마차의 속도가 빨라졌다.

“쫓아라!”

성으로 돌아가기는커녕 점점 멀어지던 마차는 휑한 벌판으로 나갔을 때쯤에는 전속력으로 달리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마차라는 무거운 것을 매단 말이 오래 추격전을 끌 수는 없었다.

“황자님, 공녀님! 안에 계신다면 창문을 열어주십시오!”

“마부는 저항하지 말고 내려라!”

마침내 기사들이 마차를 포위하자 그때까지 동요 없이 말을 몰던 마부의 모습이 연기처럼 픽 꺼졌다. 마부석에 남은 것은 옷가지뿐.

하지만 놀라기에는 아직 일렀다. 무례를 무릅쓰고 마차 문을 열어젖힌 기사가 외친 것이다.

“안에 아무도 없습니다!”

가장 후미 그룹에서 따라온 라망드와 에사디엔은 그때쯤 현장에 도착했다. 별다른 설명을 듣지는 못했지만 짙게 드리운 낭패감에 일이 잘못됐음을 느낄 수는 있었다.

“대체…….”

- 보기 좋게 걸려들어 버렸군.

이런 일에 익숙한 에사디엔이 그나마 남은 냉정함을 그러모아 말했다.

- 번화가에서 빠져나올 때쯤 마차 몇 대가 들어왔지.

“무슨……. 그러면 그때 갈아탔을 거라는 뜻입니까? 멈춘 적도 없는데?”

- 그 정도는 때만 맞추면 된다. 조금 훈련하면 누구라도 할 수 있지.

“…….”

머뭇거리는 라망드에게 에사디엔은 담담하게 말했다. 테오도르라면 모를까, 친구도 아닌 사람이 그를 믿고 지원해 주리라고는 애초부터 기대하지 않았다.

- 믿을 수 없다면 나 혼자 움직이겠다. 그 지점으로만 데려가 다오.

“당신 혼자 뭘 하겠다고…….”

- 어차피 성으로 돌아가 대공에게 보고해야 할 것 아닌가.

“…알겠습니다.”

결국 에사디엔의 고집을 이기지 못한 라망드는 마차들이 지나쳤던 곳으로 그를 데려다주었다.

- 너무 걱정하지 마라. 미뉴엘 곁에는 정령도 있고, 위험했다면 가장 먼저 기사 호출기를 눌렀을 것이다.

에사디엔은 갑자기 어딘가로 추락하는 상황에도 호출기를 누르던 미뉴엘을 기억했다.

- 그리고 그대가 만든 포션도 가지고 있지 않나.

“…….”

에사디엔의 말에 불안감이 조금 가라앉았음에도 라망드는 짐짓 표정을 굳혔다.

“당신 위로가 필요한 게 아닙니다.”

- …그렇겠지.

같은 사람을 좋아하는 상대에게 위로받는다니. 남자로서 그만큼 우스운 일도 없었다. 그것을 이해했기에 에사디엔은 짧은 인사만 남기고 돌아섰다.

- 그럼 나중에 보도록 하지.

훌쩍 뛰어 골목 사이로 사라지는 꼬리를 보며 라망드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조금 자란 것 같은데.”

* * *

동물들과 말이 통한다는 건 황성에서 빠져나왔을 때의 경험으로 배운 바였다.

하지만 동물들에게 도움을 받는 건 생각보다도 어려운 일이었다.

- 인간을 찾으라고짹? 인간은 저 둥지에 많이 드나들잖아짹.

새들이 알려준 건 여관이었고.

- 인간을 돕는다고? 아직 순진한 잡종이구먼. 쥐가 늘어났다고 빗자루로 맞다가 쫓겨나 봐야 정신을 차리지, 쯧쯧.

뒷골목의 고양이들은 심드렁하기만 했다. 에사디엔은 막막해졌다.

-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라망드에게 안심하라고 했던 말은 반쯤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만약 미뉴엘이 포션도, 기사 호출기도 쓸 수 없는 상황에 처한 것이라면? 아직 정령의 힘을 제대로 다룰 수 없는 그녀가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을까.

사람의 마음은 간사하기 짝이 없다. 미뉴엘에게 사랑받을 수 있어서 좋았던 작은 몸이 지금은 갑갑하기만 했다.

- 미움받더라도 그녀를 구하고 싶다.

에사디엔은 절망적인 심정으로 자신의 작고 동그란 발을 내려다보았다.

인간의 몸이 그리웠다. 검을 휘두르고, 미뉴엘을 품에 안고 안전하게 지켜주고 싶었다.

물론 미뉴엘은 품 안에서 얌전히 웅크리고 있을 성격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자신의 힘을 펼칠 기회를 비집고 들어오는 사람이다.

알고 있었다. 카듀렌의 저택에서 미뉴엘이 온몸에 온통 먼지를 묻힌 채 그에게 굴러왔을 때부터.

아니, 그보다 이전에 황제의 비원에서 그를 끌어안았을 때부터.

‘많이 아파요? 미안해요…….’

아련한 목소리가 떠오르자 발 앞으로 투둑, 물방울들이 떨어졌다.

- 아프다.

그대가 걱정되어서. 도움을 줄 수 없어서. 아프고 괴롭다.

부들부들 떨리는 그의 정수리 위로 느릿한 목소리가 떨어진 것은 그때였다.

- 인간을 찾는다고 들었다, 아가야.

- ……?

에사디엔이 고개를 드는 것보다 먼저 지독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윽.’

그의 눈앞에 선 것은 개였다. 검은 털이 길게 늘어지고 여기저기 뭉쳐 더러웠으며 한쪽 눈은 막을 씐 듯 뿌연 개.

- 네! 맞습니다!

에사디엔은 거의 펄쩍 뛰듯 하며 대답했다.

더럽거나 냄새가 좀 나면 어떠한가? 사람을 찾는 데 개만 한 동물이 또 어디 있다고. 막막했던 와중에 고마울 따름이었다. 무의식적으로 존댓말을 쓸 정도로.

- 착한 아이로구나.

반갑고 고마워하는 마음은 동물인지라 더 선명하게 전해졌다. 개의 목소리가 더욱 부드러워졌다.

- 그래. 누구를 찾는 것이니?

- 젊은 여자입니다. 제 냄새가 밴…….

설명하던 에사디엔은 문득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내 냄새’가 밴 사람이라니. 동물로서는 당연한 묘사라고 해도 속은 사람이니 부끄럽기 그지없었다. 그나마 털이 있어 티가 나지 않는 것이 다행이랄까.

- 새들에게도 설명해 주련.

- 예?

고개를 더욱 위로 올리자 나뭇가지 위에 쪼르르 앉은 새들이 보였다. 조금 전에 성의 없이 여관을 가리켰던 녀석들이었다.

- 말해 봐짹.

- 어르신 부탁이니까 들어줄게짹.

아까도 별 소용이 없었는데 지금이라고 다를까 싶었지만 에사디엔은 잠자코 정보를 알려주었다.

급할 때는 새 발이라도 빌려야지 않겠는가.

- 분홍색 털을 가졌고… 함께 있는 인간은 빛나는 돌처럼 번쩍거리는 털이 났다.

- 둘 다 특이한 털이네짹!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감상과 함께 새들은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포르르 날아갔다.

- 자, 우리도 가자꾸나.

에사디엔의 냄새를 두어 번 맡은 개는 그를 휘익 등에 태우고는 이곳저곳의 냄새를 맡으며 방향을 잡았다.

별달리 기대하지 않았던 새들이 의외의 활약을 해주었다. 새들이 범위를 추려 오면 개와 함께 마차의 냄새를 확인하는 것을 반복하고 난 뒤, 에사디엔은 미뉴엘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 여기가 맞는 듯합니다.

- 찾아서 다행이구나. 함께 들어갈까?

건물 안에서도 길잡이가 되어주겠다는 친절한 제안이었지만 에사디엔은 고개를 저었다. 오스틴의 성정은 독해서 짐승이라고 봐줄 리 없었다.

- 아니요. 당신은 여기에서 새들과 함께 있어주십시오. 나온 뒤에 반드시 보상하겠습니다.

- 보상이라. 아가, 너는 인간처럼 말하는구나.

- 저…….

- 기다리마.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렴.

개는 새들을 머리에 얹은 채 느긋하게 엎드렸다. 고개를 살짝 숙여 그들에게 인사한 에사디엔은 짧은 다리를 재게 놀려 안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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