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사람이 살지 않은 지 오래되어 보이는 건물 안쪽에는 인적이 전혀 없었다. 돌로 지어진 건물 특유의 싸늘함이 발바닥을 통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에사디엔은 눈을 감은 채 수염과 귀를 통해 전해지는 정보를 받아들였다.
스산한 바람 소리와 괴괴한 냉기.
그 사이를 뚫고 마침내 희미한 흔적을 잡아낸 에사디엔이 천천히 눈을 떴다. 빛이 들지 않는 공간에서 그의 눈동자는 얼음처럼 빛나고 있었다.
‘안쪽.’
건물 안쪽, 숨겨진 공간에 미뉴엘이 있다.
아무리 짐승이라고 해도 깊은 곳에서 나는 기척을 잡아낼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는 에사디엔의 머릿속에 없었다. 그저 이용할 수 있는 것을 이용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인간일 때도 셀레스테 자작저에 숨어들어 감시한 몸이었다. 아무런 기척도 내지 않고 하룻밤쯤은 너끈히 버틸 수 있는 그가 잠입과 은신에는 최적인 고양잇과 동물의 몸을 입었다.
자신만만하게 웃은 에사디엔이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 * *
‘아… 머리야.’
정신을 잃은 뒤 깨어날 때는 언제나 시각보다 다른 감각이 먼저 찾아온다.
나는 무거운 눈꺼풀을 느리게 깜빡였다. 여기저기 번진 것처럼 흐린 시야가 천천히 선명해졌다.
‘오스틴, 이 망할 놈.’
입이 가로막힌다 싶었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무슨 납치의 프로들처럼 물 흐르듯 머리에 천 주머니가 씌워지고는 곧바로 뒤통수에 충격을 받고 기절했으니까. 개비나 기사들을 부를 겨를조차 없었다.
아직도 머리가 띵하니 아팠다. 그래서 처음에는 실내에 가득한 붉은 빛도 내 착각인 줄로만 알았다.
‘오스틴, 이 돌아이가 진짜.’
사방이 불로 가득했다. 시야에 닿는 벽면이며 천장이 전부 불이었다. 어디 서커스단이나 마술 방송에서나 볼 법한 풍경에 오만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나는 뭔가 딱딱한 데 누워 있었다.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가죽끈 같은 것이 사지를 바닥에 단단히 고정한 상태였다.
‘아…….’
금방이라도 불에 휩싸인 천장이 내게 통째로 떨어질 것만 같아 눈을 감고 심호흡했다. 뜨겁게 달궈진 공기가 폐부를 가득 채웠다.
‘괜찮아. 괜찮다고. 불은 내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해.’
차라리 경험치 덩어리라고 생각하자. 무서워하지 말고 폭렙의 현장이라 생각하자고 자신을 다독인 나는 조용히 개비를 불렀다.
“개비, 거기 있어?”
거의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 잇새로 중얼거렸을 뿐이다. 그런데도 천장 중앙의 불꽃이 일렁인다 싶더니 조그만 머리통이 쏙 튀어나왔다.
- 있어, 있다! 여기는 참 좋구나.
언제나 그렇지만 개비는 불 속에 있을 때 가장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래. 네가 좋다니 그건 다행이긴 한데…….
“나오지는 말고.”
이 눈새야! 오스틴이 널 발견하면 어쩌려고!
“이것 좀 풀어줘.”
나는 한숨처럼 속삭이며 부탁했다. 머리를 세게 얻어맞아 그런지 몸에 힘이 잘 들어가질 않았다.
하지만 내 요청에 응답한 건 개비가 아니었다.
“그건 곤란한데.”
“…….”
시야에 불쑥 솟아나듯 나타난 오스틴이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내 이마며 잔머리를 어루만졌다.
“역시 그대는 꽃 같아, 미뉴엘.”
그 손길이 역겨워 피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오히려 그의 손이 닿는 범위만 늘렸을 뿐이었다.
“꽃이 자꾸 도망가려고 하니 나도 꺾어버리고 싶잖아.”
“남 탓…하지 마시죠.”
보자 보자 하니까 누굴 보자기로 아나. 거절하면 찌그러져 있을 것이지 꺾어버리고 싶어? 납치를 해?
“그리고 꽃이라고 하지 마요. 듣는 인간 기분 나쁘니까.”
“꽃처럼 보이는 걸 어쩌나. 그대가 너무 아름다워서 그렇지.”
또 내 탓이다.
“당신 보기 좋으라고 예쁜 거 아니거든?”
나는 거의 침이라도 뱉을 기세였지만 오스틴은 개의치 않고 웃었다. 잘생긴 얼굴이 활짝 피었는데도 보기 싫다고 생각한 건 이 사람이 처음이었다.
‘플렌드나 님, 제가 대단한 착각을 하고 있었나 봐요.’
라망드부터 시작해서 대신관님, 사도님까지. 신전 사람들은 다들 마음씨가 좋았다. 플렌드나의 신전이니 하나같이 빛나는 외모를 가졌음은 물론이다.
그래서 아름다움을 관장하는 플렌드나가 마음씨 아름다운 사람에게 미모를 내리는 거라고 생각했다. 즉, 미인은 마음씨도 비단결 같을 거라는 가정이었다.
우리 가족들이며 테오도르, 에사디엔과 황제, 황태자 등등의 예도 그 생각을 뒷받침했다.
‘라페슈야 여주인공이고 저지르는 짓이 고만고만해서 넘겼는데.’
그런데 오스틴 같은 놈을 보고 있자니 외모 성선설이 산산조각이 났다. 아름다움의 신이 있건 없건 인간은 어디나 똑같았다. 잘생김이 안구는 정화해 줄지언정 인성은 보장하지 않는다.
“하하. 이유야 어떻든 꺾고 싶은 건 변하지 않아.”
이것 봐.
“내가 순순히 끌려갈 것 같아?”
“근성은 대단하군. 힘이 하나도 없을 텐데.”
내가 눈을 희번덕거리며 노려보는데도 오스틴은 왼쪽 입꼬리를 더더욱 올릴 뿐이다.
“지금 그대가 어디 누워 있는 건지 아나?”
“뭔… 헉!”
이상한 느낌에 나는 헛바람을 들이켰다. 바닥에 무슨 대형 부항이라도 달린 것처럼 몸 전체가 빨려 들어가는 감각이 느껴진 것이다.
다급히 손바닥으로 바닥을 쳐봤지만 멀쩡하게도 차갑고 딱딱했다.
‘그럼 대체?’
내가 하는 꼴을 재미있다는 듯이 지켜보는 오스틴과 시선을 마주하자 천천히 깨달을 수 있었다.
심장을 감싼 불의 고리가 옅어졌다.
“이제 알았어? 나의 꽃.”
“미친……. 왜 내가 네… 아니, 애초에 꽃도 아니라고!”
“이건 제단이야.”
“뭐?”
지금 내가 제단이라고 들은 게 맞나? 신에게 제물 바칠 때 쓰는 그거? 양 잡고 돼지머리 올리고 하는, 그거!
몸에 힘이 없는 건 머리를 맞아서라기보다는 이쪽의 이유가 컸던 것이다.
“대공의 눈을 피해서 간이 제단을 설치한다고 얼마나 힘들었던지. 이 기회를 잡는 건 또 어떻고? 그대가 그대의 언니들처럼 활동적인 성격이었다면 더 빨리 이날이 왔겠지.”
뭐라는 거야.
천장에서 빼꼼히 눈만 내민 개비가 걱정스럽게 나를 보고 있었다. 힘이 이어져 있으니 이쪽의 소실을 느끼지 못했을 리가 없다.
‘나오지 마! 차라리 여기 있는 불을 네가 흡수해.’
입을 열어 말할 수가 없으니 뜻이 전달되기를 바라며 눈짓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 알았어.
귓가로 스며든 소리에 반사적으로 오스틴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는 듣지 못한 듯했다.
동시에 천장과 벽면을 가득 메운 불길이 조금씩 약해지기 시작했다.
‘정말 개비가 내 뜻을 알아들었어.’
위로 향한 내 시선에 오스틴의 초록빛 눈도 따라서 위로 향하려 하자 나는 얼른 버둥거리며 몸부림쳤다.
“참 이상하지. 그대는 저항하는 것도 귀여워 보인단 말이야. 다른 놈들은 그냥 죽여버렸는데.”
“성격 한번 아름답네.”
“이제야 알아주는군.”
“…….”
그러지 않으려고 했는데, 너무 질려버린 나머지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역시 말이 안 통하는 놈이다, 이 자식은.
“이래서 에사디엔, 그 끈질긴 멍청이도 그대에게 집착했나 보지.”
“파혼한 시점에 상관없어진 사람 끌고 들어오지 마.”
나는 심호흡했다. 개비가 불길을 빨아들인 만큼 내 심장을 감싼 불의 고리도 다시 강해지고 있었다.
‘제발 나를 자유롭게 해줘. 제발.’
혼자서 수련할 때는 한 번도 응답하지 않던 힘이었지만 나는 절박한 마음으로 고리를 움직이려 노력했다.
본능이 외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고.
‘이렇게는 싫어. 난…….’
십 년이 지나도 생의 마지막 순간은 잊히지 않았다. 기침을 너무 많이 해서 머리가 어지럽던 그 순간. 자욱한 연기와 뜨겁게 달아오른 손잡이, 그리고 절망감.
‘난 죽고 싶지 않아!’
마음속으로 크게 부르짖는 것과 동시에 덜컥 멈춘 고리에서 한 줄기 기운이 빠져나오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손목과 발목을 구속한 벨트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순간.
“이런.”
혀 차는 소리와 함께 다시 한번 온몸의 힘이 빨려나갔다.
“흐아!”
익숙해지지 않는 허탈감에 눈을 부릅뜬 나를 보며 오스틴은 큭큭 웃었다.
나는 피가 맺힐 정도로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이 자식은 지금 나를 가지고 노는 거다.
“분한가? 그러게 청혼을 받아들이지 그랬나.”
“너 같은… 말종이랑은 죽어도 같이 안 살아.”
“하하. 많이 다짐해 두길 바라. 결국 받아들이게 될 테니까.”
흐뭇하게 가늘어진 녹색 눈을 보며 생각했다.
‘뱀 같은 놈.’
“힘도, 의지도 내가 빼앗을 테니 언제까지나 내 손아귀에서 피어 있으면 돼.”
“텅 빈 껍데기를 원해?”
“그러면 더 편하겠지.”
“뭐라고?”
“그대를 거친 불의 힘은 한층 정순해져. 다루기 쉽고…….”
오스틴은 말을 멈추지 않은 채로 손가락을 튕겼다. 그의 손끝에서 선명한 불꽃이 피어났다.
“강하고.”
훅, 숨결을 불어 넣자 불꽃의 색깔이 푸른빛으로 변했다. 나는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오스틴이 불을 다룬다고?’
그는 나를 보며 씩 웃었다.
“놀랐나?”
“당신…….”
“어때. 우리는 좋은 짝이 될 것 같지 않아?”
“…….”
“불의 힘을 오롯이 다룰 수 있는 건 세상에 오직 우리 둘뿐이야. 널 이해할 수 있는 건 나뿐이라니까.”
속살대는 소리가 악마 못지않았다.
“한마디만 해. 그러면 모든 걸 알려주지. 물론 자유도 그대 것이야.”
어느새 오스틴의 얼굴에서는 웃음기가 사라져 있었다.
어쩌면 그의 계획 안으로 들어가는 게 나쁘지만은 않을지도 몰랐다.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삶이 펼쳐질 테니까.
하지만.
“네 손아귀 안에서 허락된 자유?”
그런 건 자유라고 하는 게 아니야, 이 망나니야.
“내 힘과 가족들을 네 발밑에 갈아 넣고 황후가 되는 게 나한테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
오스틴의 입매가 싸늘하게 굳었다. 그래도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네가 날 이해한다고? 가족을 저버리고 죽이려 드는 네가?”
나와 오스틴은 언뜻 같은 세계에 사는 것 같지만 단언할 수 있다. 그건 착각이라고.
반항하는 부하를 죽이고 목적을 위해 수단 가리지 않는 그의 세계.
십 년이 지난 상처도 마음 깊이 염려해 주는 사람이 있는 나의 세계.
아무리 불의 힘이라는 공통점이 있다고 해도, 그 두 세계를 감히 어떻게 같다고 말할 수 있을까.
“넌 말종이야, 오스틴 로콰이트.”
“…감히.”
막말을 내뱉고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알 수 있었다. 그와 내 안에서 똑같은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건 분노라는 이름의 불이었다.
그것을 깨달은 나는 눈을 뜬 후 처음으로 웃었다.
“왜. 죽이게?”
“…….”
“넌 날 불태울 수 없어.”
정령의 계약자는 바로 나다.
어떤 불도 나를 태울 수는 없다.
‘그렇지, 개비?’
- 틀린 말은 아니지.
‘그러니까 힘 좀 내놔 봐.’
- 내내 처박아 두더니 이제야?
투덜대는 대답에도 웃음이 흘렀다. 그러면서도 개비는 그 좋다던 불들을 모두 거둬들였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