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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 영애 집착을 시작합니다 (72)화 (72/130)

72화

불이 깡그리 사라진 실내와 반대로 구속구 위로 화염이 치솟으며 나는 순식간에 자유로워졌다.

불을 다루는 방법을 공부하려 애쓰다니. 어리석은 짓이었다.

정령의 계약자인 ‘나’를 진짜로 받아들이고 불에 대한 공포심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러자 이 힘은 개비가 말했듯 숨을 쉬는 것처럼 내 의지를 따라왔다.

“이게 자유지.”

유령처럼 스르르 일어나는 나를 보며 오스틴은 눈동자를 떨었다.

놀랍기도 할 터였다. 달궈진 제단이 녹아내려 버렸으니까.

이제 내 힘을 빨아먹지 못해서 어쩐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놀랐어?”

그리고 벼르고 별렀던 불꽃 따귀를 날렸다.

짜악!

“……!”

하여튼 나는 악녀 재질이다. 사람 때리고 속이 후련해지는 걸 보면.

“불의 힘을 오롯이 다룬다고? 빼돌리는 주제에 착각하지 마. 이 탈취범, 기생충아.”

오스틴은 돌아갔던 고개를 서서히 되돌렸다.

“말 다 했나?”

그의 얼굴에는 분노도, 비웃음도 없었다. 어떤 표정도 없는 백지장 같은 얼굴이 소름 돋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황제가 되려는 게 복수를 위해서라고? 그러면 황제가 된 다음에는 뭘 어쩔 건데? 프레세리아를 엉망으로 만들고 있으면서?”

다 불탄 자리에서 혼자 머리에 관을 얹고 있는다고 황제라 할 수 있을까. 애초에 말이 되지 않는 짓이었다.

“당신은 억지를 부리는 거야.”

“억지, 라.”

억지, 억지. 두어 번 입 속에서 같은 말을 굴린 그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생각이 바뀌었다.”

그 눈은 이제 정말로 뱀처럼 냉혹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제는 안 귀엽군. 하나도.”

“귀엽게 봐달라고 한 적 없어!”

그 말과 함께 우리는 맞부딪쳤다. 엄청난 고열과 함께 디딘 바닥이 조금씩 녹아내렸지만 오스틴은 온몸에 화염을 휘감고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너도 나를 불태울 수 없는 건 마찬가지다.”

“어, 인정.”

반쯤 기대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쿨하게 포기했다. 대신 그가 내뿜는 불을 빼앗으면 되니까!

“다 토해 내!”

마치 나 스스로가 아까의 제단이 된 것처럼 오스틴의 불길은 버티지 못하고 내게 빨려들었다.

일단 받아들이고 나자 불의 기운이 몸을 내달리는 것은 라망드의 서늘한 신성력과는 또 다른 개운함을 선사해 주어서 나는 정신없이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 감각에 너무 집중한 탓일까.

- 집중해라, 이 인간아!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내가 만든 것이 아닌 불덩어리가 명치 앞쪽에서 화르르 타올랐다 사라졌다.

‘헉.’

그 자리 앞에는 어느새 다가온 오스틴의 손이 있었다. 칼날이 없는 검 자루를 쥔 채로.

“역시 정령은 네 옆에 있었군. 설마 내가 착각했나 싶었다.”

너무 놀란 나는 불길을 일으켜 오스틴을 밀어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는 눈살을 조금 찌푸릴 뿐 개의치 않고 다시 가까이 다가왔다.

“그것 아는가? 정령은 관계를 맺은 대상이 죽으면 엄청난 타격을 받고 봉인되지.”

“거짓말.”

거의 조건 반사적으로 부정했지만 개비는 그의 말을 인정했다.

- 정말이야.

그렇다면 계약자의 안위에 당연히 신경 쓴다던 말도 진짜였던 걸까.

‘대체 이 사람은 어떻게 정령에 대해 알고 있는 거지?’

오스틴은 내가 아무리 책을 뒤져도 나오지 않던 사실들을 당연하다는 듯 알고 있었다.

마치 내 머릿속을 읽은 것처럼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치트룸에는 많은 것이 남아 있지.”

그 말은 많은 뜻을 내포했다. 특히나 정령에 대한 기록이 프레세리아에서는 지워졌다는 사실을.

대마법사인 브라시다스는 물론이고 백 년 넘게 살았다는 플렌드나의 사도님도 정령에 대해서는 모르는 눈치였으니 최소한 백 년도 더 전의 일이었을 것이다.

‘그게 치트룸에는 있다고.’

그렇다면 10년 전 개비를 노렸던 것도 그 사막 국가였을 터다. 정령의 힘을 손에 넣고 그것을 발판으로 프레세리아까지 잡아먹으려던 속셈이었을까.

10년 전의 속셈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오스틴을 보니 현재의 속셈 정도는 알 것 같았다.

야망을 품은 국가와 쫓겨난 황자의 만남.

나는 다시 한번 불길을 일으켜 오스틴을 밀어내며 물었다.

“총독 자리라도 약속받았나 봐?”

“글쎄.”

발하는 족족 삼켜지는 탓에 오스틴은 이제 한 올의 불도 두르지 않았다.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혹은 내게 가까워지는 것이 유일한 목표인 것처럼 그는 내게 전진했다.

“목이 꺾일 꽃에 대고 이야기해 줄 이유는 없지.”

“끝까지……!”

사람이 아니라 꽃 취급하는 행태에 나는 이를 악물며 기사 호출기를 눌렀다. 불태울 수는 없더라도 뼈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에게 칼이 들어가지 않을 리는 없으니.

그러나 그 생각을 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

불길의 저항을 견디느라 천천히 가까워지는 것 같던 오스틴이 말 그대로 눈 한 번 깜빡할 찰나를 넘어 내 앞에 서 있었다.

푸욱!

“어……?”

그리고 뭔가가 뚫리는 소리와 함께 배가 불타는 것처럼 뜨거워졌다. 동시에 개비가 내 이름을 외쳤지만 먼 곳에서 부르는 것처럼 들리기만 했다.

“나는…….”

이제 불을 뜨겁게 느끼지 않는데.

의아해져서 배를 내려다보려 했지만 오스틴의 손이 내 턱을 붙잡으며 이죽거렸다.

“그대의 발이 두 개이듯 내 검도 여러 자루일 거라는 생각을 했어야지.”

“커…흑.”

비릿한 것이 목구멍을 타고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나를 괴롭히는 것은 뚫린 배의 고통뿐만이 아니었다. 나와 연결된 개비가 비슷한 통증을 느끼며 약해지고 있는 것이 시시각각 전해져 왔다.

‘약속했는데.’

힘을 되찾아 주겠다고.

3년 안에 끝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석 달도 안 되어서 이런 식으로 계약이 파기될 줄이야.

‘자존심… 상해…….’

불의 힘을 빌려 견뎌보려 했지만 시야는 시시각각 흐려질 뿐이었다. 그 사이로 붉은 빛을 반사하는 단검이 또 한 자루 보였다.

이번에는 배가 아니라 목에 박히겠지.

“미안, 해.”

덜덜 떨리는 입술로 개비에게 마지막 말을 남겼다.

첫 만남은 좋지 못했지만 끝에 다다르니 알 수 있었다. 개비도, 나도 자유로워지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대답한 것은 개비가 아니라 망할 오스틴이었다.

“미안하지만 애원해도 소용없어. 그대를 죽이기로 정했으니.”

당신한테 말한 거 아니거든.

짜증이 확 치솟자 다시 한번 피가 울컥 흘렀다. 익숙한 반응이 돌아온 것에 웃음만 나왔다.

이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주마등은 없었다. 그저 이번에야말로 환생이나 빙의 같은 것 없이 죽는 걸까. 그렇다면 그것도 나름대로의 자유 아닌가 싶은 생각이 스쳤다.

- 미뉴엘!

‘하아…….’

마지막 순간 떠오른 게 왜 하필이면 에사디엔의 목소리인지. 나도 참 구제 불능이었다.

* * *

‘어디냐. 대체 어디 있는 거지?’

목적을 위해서 무슨 짓이든 하는 오스틴을 알기에 에사디엔은 마음이 급했다.

그는 푸른 눈을 번뜩이며 온몸의 감각을 곤두세웠다. 빳빳해진 귀와 수염 또한 주변의 정보를 정신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위치는 빠르게 파악했지만 거기까지 들어가는 길을 찾는 것이 문제였다. 대체 얼마나 오래전에 지어진 곳인지, 비밀 통로를 찾는 방법이 지금은 전혀 이용되지 않는 방식이었다.

그래도 에사디엔은 끝내 길을 찾아냈다.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발바닥이 화끈거렸지만 그 정도 고통으로 머뭇거릴 수는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미뉴엘이 있는 곳에 도달한 에사디엔은 작은 벽돌이 빠진 틈새로 목격해 버렸다.

“이 기생충아.”

어마어마한 기세로 오스틴의 뺨을 때리는 미뉴엘을. 얼마나 세게 쳤던지 온통 불길에 휩싸인 와중에도 가무잡잡한 피부가 붉게 달아오른 것이 보였다.

- 형님을…….

오스틴을 이렇게 대한 사람은 단연코 미뉴엘이 처음이었다.

한 사람의 기사 몫을 하게 된 후로도 오스틴을 싫어하면서도, 에사디엔은 어린 시절 짓눌렸던 기억 때문에 아직도 먼저 그에게 대들고 나서지 못했다.

“당신은 억지를 부리는 거야.”

저것이야말로 어릴 적 에사디엔이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노라고. 왜 나에게 화를 내느냐고.

그 시절을 떠올린 에사디엔의 꼬리가 바르르 떨리며 부풀었다. 미뉴엘처럼 자신도 오스틴에게 한 방 먹이고 싶었지만 지금 상황에 난입한다면 미뉴엘이 그에게 신경 쓰느라 빈틈이 생길 수도 있었다.

- 참자.

- 왔느냐? 아이고, 저 인간이 정말.

에사디엔의 등장을 알아채고 잠시 알은척했던 개비가 바삐 사라졌다.

오스틴이 미뉴엘에게 칼을 휘둘렀다는 사실을 뒤늦게 안 에사디엔이 그 자리에서 튀어 올랐다.

- 정령이여, 정령이여!

- 아, 왜 정신없이 난리인데.

개비는 마치 미뉴엘처럼 말했다. 평소였다면 흐뭇해했겠지만 지금은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 미뉴엘의 불이 통하지 않는 것 아닙니까? 저쪽에는 무기가 있습니다. 제가 도울 수 있게 해주십시오!

- 그 몸으로?

- 당신은 정령이잖습니까. 제가 상상하지 못할 힘을 가진.

미뉴엘이 들었다면 ‘그래서 방법도 내가 생각해 내라고요?’라며 혀를 찼겠지만 개비는 이런 떠받듦에 목마른 정령이었다.

- 아무래도 그런 편이지!

웃음 섞인 목소리를 에사디엔은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개비는 정색하고 거절했다.

- 하지만 안 돼. 불은 거침없는 생명력을 가졌지만 동시에 소멸을 뜻하기도 한다. 그렇지 않아도 네 육신은 불안정한데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그러나 곧 미뉴엘이 칼을 맞게 되면서 개비도 고집할 수만은 없게 되었다.

- 정령이여, 무슨 일이 벌어지든 그것은 제가 감내할 몫입니다. 지금도 몸이 이리된 판에 무엇을 더 망설이겠습니까?

- 인간의 무모함은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변하지 않는구나. 좋아. 뜻대로 해주마.

에사디엔이 미처 감사의 말을 건넬 겨를도 없이 푸른 불꽃이 그를 감쌌다.

‘뜨거…워.’

에사디엔은 이를 악물었다. 이것은 털이나 가죽이 아니라 마치 몸 안쪽이 타오르는 듯한 고통이었다.

우둑, 우두둑.

에사디엔이 눈을 꽉 감고 고통을 감내하는 동안 그의 육신은 엄청난 변화를 겪는 중이었다.

뼈가 부러지고 다시 붙는 듯한 소리가 이어지더니 불꽃이 사라진 자리에는 덜 자란 고양이가 아니라 거의 전투마와 덩치가 비슷한 맹수가 서 있었다.

그러나 에사디엔 본인은 무슨 변화가 일어났는지 둘러볼 틈도 없이 고통이 잦아들자마자 벽을 부수고 뛰어들었다.

오스틴이 미뉴엘의 목에 또 다른 단검을 찔러 넣으려 하고 있었으므로.

- 미뉴엘!

인간들에게는 커다란 포효로밖에 들리지 않겠지만 에사디엔은 그녀의 이름을 외치며 달려들었다. 발톱 집에서 하나하나가 낫과 같은 발톱들이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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