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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 영애 집착을 시작합니다 (73)화 (73/130)

73화

“윽!”

단번에 숨통을 끊으려 했으나 오스틴도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마지막 순간 몸을 튼 탓에 등에 깊은 상처만 남겼다.

“이런 곳에 맹수가…….”

미뉴엘과 에사디엔을 번갈아 보던 오스틴이 손가락을 튕겼다.

곧장 피어난 화염은 개비가 흡수하며 에사디엔을 엄호했지만 눈속임이었다. 불꽃에 시야가 가려진 한순간을 노리고 오스틴이 달려들고 있었다.

파앗!

그러나 에사디엔도 손에 꼽는 기사로서 칼 든 자의 움직임을 놓치는 실수는 범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지금은 인간보다 훨씬 감각이 예민한 몸.

길이가 짧은 단검으로 노릴 수 있는 곳은 곧 한 방으로 끝낼 수 있는 부분, 즉 큰 혈관이 지나는 목덜미와 정수리, 눈이었다.

목표를 알면 방어는 훨씬 간단해진다. 에사디엔은 덩치를 보고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날래게 피한 뒤 성인 머리통만 한 앞발로 오스틴을 후려쳤다.

“컥!”

그러고는 엄청난 충격에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그의 목덜미를 자비 없이 물어뜯었다.

꿀럭, 꿀럭.

무서울 정도로 피가 흘러나오며 마침내 오스틴의 숨소리가 완전히 멎었다.

증오하는 상대였지만 그래도 형이었는데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그러나 지금 급한 쪽은 미뉴엘이라 그 생각을 곱씹을 틈도 없이 에사디엔이 돌아서려던 찰나였다.

화르르!

누가 불을 붙인 것처럼 오스틴의 시신이 타올랐다. 더 이상한 점은 재 한 점 남기지 않고 자리가 깨끗해졌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개비가 한 일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황족을 해했으니 차라리 모든 증거를 없애버리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령이 그런 정치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을까?

- 정령이여, 당신께서…….

- 아냐.

혹시 몰라 운을 띄워봤지만 개비는 단번에 부정했다. 그 기세가 너무 딱딱해서 에사디엔은 더 물을 엄두도 나지 않았다.

- 일단 미뉴엘을 데리고 나가야겠다. 피가 멈추질 않아.

- 미뉴엘의 귀걸이는 플렌드나의 신성력이 담긴 포션입니다. 그걸 좀 빼주십시오.

덩치가 커진 에사디엔이 주둥이로 물었다간 미뉴엘의 머리 전체가 입 안에 들어갈 판이었다.

- 이거야?

- 예.

대답하던 에사디엔은 문득 개비의 덩치가 눈에 띄게 줄었다고 생각했다.

조금 전만 해도 여섯 살은 되어 보였는데 지금은 잘 봐줘야 너덧 살 정도일까.

하지만 지금은 미뉴엘의 상처가 더 급했다. 정신을 잃은 그녀의 숨소리가 시시각각 가늘어지는 것 같아 에사디엔은 불안함을 가눌 수 없었다.

- 자, 어서 칼을 뽑아!

그래도 개비의 신호에 맞추어 제대로 배에 박힌 단검을 뽑아내기는 했다.

기이할 정도로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단검이 저쪽으로 던져지고, 미뉴엘의 배에서는 말 그대로 새까만 피가 울컥울컥 튀었다. 개비가 포션을 붓자 치익, 소리와 함께 연기가 피어올랐다.

- 독…….

- 그래. 화염이 태우며 정화할 테지만 이건 정도가 너무 심하구나.

- 어서 성으로 데려가야 합니다!

에사디엔은 조금 전에 개가 그랬듯 미뉴엘을 등에 휙 태우고 달려나갔다.

- 이제 본인에게 달렸어.

개비의 그 말을 못 들은 척하며.

건물 복도에서 마주친 카르이넨의 기사들은 미뉴엘을 업은 에사디엔을 보고 기겁했다.

뒤늦게 따라온 개비가 모습을 보이며 상황을 설명하고, 미뉴엘에게 포션을 몇 병 더 들이붓도록 하자 일단 겉으로 드러난 상처는 아물었다.

“일단 마차에 눕혀 모시도록 하자.”

“아가씨 전용 마차가 아니라 흔들림이 있겠지만 어쩔 수 없군요.”

“사제님은 몇 조와 함께 계시지? 빨리 연락을 넣어. 성에서 합류하도록!”

“알겠습니다!”

기사들이 정신없이 조치를 하던 와중 미뉴엘이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눈을 떴다.

“아오, 쓰읍…….”

연락을 위해 달려나간 기사 몇 명 외에는 모두 반색하며 그녀를 둘러쌌다.

- 미뉴엘!

- 미뉴엘!

“아가씨!”

하지만 그 귀한 아가씨의 입에서 나온 독기 어린 첫마디는 모두를 얼어붙게 하기에 충분했다.

“개만도 못한 황자놈 어디 갔어.”

“아, 어, 아가씨?”

“그 망할… 태워도 유해 물질밖에 안 나올 놈이……. 나한테 칼침을 놔?”

“…….”

어디서 10년은 칼 밥 먹고 굴러다닌 용병 같은 말투였다.

만약 세상에 분홍색 양이 있다면, 신전에서 좋은 것, 고운 것만 보고 배운 막내 아가씨, 여리디여린 우리 미뉴엘 아가씨 같을 거라고 생각했던 기사들은 뒤늦게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양은 성격이 더럽다.

거의 울기 직전인 기사들을 보다 못한 개비가 미뉴엘에게만 들리게 말해 주었다.

- 그놈은 죽었다.

“뭐?”

- 네 짐승이 네가 다친 걸 보고 눈 돌아가서 해치웠어.

“무슨 소리야? 아직 다 자라지도 않은 애가 누구를 어떻게, 뭐?”

엘을 찾으려고 머리를 들던 미뉴엘과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돌린 에사디엔의 눈이 딱 마주쳤다.

“……?”

“그르렁.”

이건 또 뭔가, 내가 왜 동물 위에 누워 있나, 싶었던 미뉴엘은 이상한 느낌에 눈을 가늘게 떴다.

윤기가 잘잘 흐르는 털 하며 터키석과 비슷한 색의 눈동자. 왠지 모를 친근감까지.

“설마, 너?”

“무응.”

“네가 엘이라고?”

주둥이 양옆이 위로 살짝 들리는 걸 보아 웃으려는 듯했다.

‘개비가 아니라고 하지 않는 걸 보면 정말 얘가 엘이라는 거겠지.’

“고마워.”

미뉴엘은 작게 속삭이며 기특한 짐승의 콧등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놀라며 잠시 숨을 참았던 탓일까. 머리가 지끈거리며 어지러워졌다.

“으…….”

“아가씨, 이만 마차에 오르십시오. 조금만 참으시면 됩니다.”

“그래. 고마워, 경.”

애써 기사들에게 웃어준 미뉴엘은 마차 문이 닫히자마자 드러누웠다. 속이 독과 열기로 버무려져 뜨거웠다.

* * *

“미뉴엘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불안하게 술렁이던 성의 분위기가 착 가라앉나 싶은 것도 잠시. 몇 초 후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라망드가 아직 돌아오지 못한 탓에 급하게 의사가 준비되었고, 대공 부부와 소공작도 하던 일을 내팽개치고 뛰쳐나왔다.

“미뉴엘, 괜찮으냐!”

“괜찮아요. 그냥 조금 피곤하기만 해요.”

미뉴엘은 달달 떨리는 다리에 힘을 주며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정령이나 이황자에 관련한 일은 사람이 많은 곳에서 발설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미뉴엘 양, 돌아왔군그래?”

어느새 익숙해진 여유로운 말투가 들렸다. 동시에 얼굴이 희게 질리며 푹 주저앉으려는 미뉴엘의 몸을 대공이 단단히 받쳤다.

“아가?”

“어, 어떻게…….”

말투만큼이나 여유로운 태도로 미뉴엘 앞에 다가와 선 사람은 분명 죽었다던 오스틴 로콰이트였다.

“그러게. 기분이 좋지 않다면서 먼저 돌아가더니 어떻게 나보다 늦게 왔을까.”

“제가 먼저 자리를 떴다고요?”

“그랬지. 기억이 나지 않는 건가?”

“기억…….”

미뉴엘은 까득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 기억이라면 아주 선명했다. 억지로 자신을 끌고 나가던 것부터 배에 구멍이 나던 느낌까지.

하지만, 그렇다면 오스틴은 어떻게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인가.

‘개비.’

- 나도 당장은 이유를 알 수 없어.

“그런데 조금 실망이군.”

파리해진 미뉴엘을 보며 오스틴은 값을 깎는 사람처럼 팔짱을 낀 팔뚝 위를 툭툭 두들겼다.

“아무리 애지중지 자랐다지만 손님 대접조차 제대로 할 줄 모를 줄이야.”

그때부터 오스틴의 입에서는 온통 날조된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는 구혼자로서 의무를 다하려 노력했지만 미뉴엘은 단 한 번도 협조적이지 않았다느니, 찻집에 있던 사람들이 다 돌아볼 정도로 언성을 높였다느니.

“아무리 내가 황제 폐하의 눈 밖에 난 자식이라지만 그렇게 자리를 박차고 가버릴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지.”

그래. 여기까지는 알리바이를 만들고자 떠벌리는 거라고 넘길 수 있었다.

“도대체 여식 교육을 어찌했는지.”

하지만 부모님을 건드리면 못 참지. 미뉴엘의 혈압이 당장에 천장을 뚫고 치솟았다.

‘미뉴엘…….’

에사디엔은 그녀가 얼마나 부모님을 사랑하는지 알았다. 그가 지금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당당히 오스틴의 말에 반박할 텐데. 도와줄 수 없어 미안한 마음으로 그녀를 올려다본 푸른 눈이 휘둥그레졌다.

- 미, 미뉴엘?

그녀는 창백한 뺨을 마치 복어처럼 부풀리고 있었다.

도대체 저 형상은 무엇을 의도한 것인지 짐작조차 수 없었던 에사디엔이 얼어붙은 사이, 미뉴엘은 자신을 지탱하던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고는 곧장 오스틴을 향해 직진했다.

가뜩이나 날도 우중충한데 아무리 미인이라도 핏기 하나 없는 여자가 엉망으로 헝클어진 머리를 이리저리 휘날리며 달려들고 있었다. 제아무리 오스틴이라도 움찔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미처 몸을 빼기 전, 미뉴엘이 그의 어깨를 낚아채며 눈을 번뜩였다.

다음 순간,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눈을 의심했다.

“이 개자으우웨에엑!”

미뉴엘이 속에서 울컥울컥 넘어오는 피를 다람쥐처럼 입 안에 축적하고 있다가, 죄다 오스틴에게 뿜어낸 것이다.

‘지금 욕한 거지?’

‘우리 아가가… 개자식이라고 한 거지?’

“…….”

“…….”

그 화려한 장면이 지난 뒤 일, 이 초간 소름 끼치는 정적만 사위에 가득했다.

그리고 조금이나마 개운해진 얼굴로 미뉴엘이 픽 쓰러지면서, 누군가가 ‘얼음 땡’을 외친 것처럼 사람들은 어색한 얼굴로 평소보다 더욱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라망드와 나머지 기사들은 해가 진 후에야 겨우 성으로 귀환했다. 그러고도 보고 문제로 또 한참이나 시달린 라망드는 밤보다 새벽에 가까워진 시각이 되어서야 미뉴엘의 침실을 찾았다.

무게 때문에 침대가 버티지 못할까 봐 침대 아래에서 길게 엎드려 자고 있던 에사디엔은 침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예민하게 이를 드러냈다.

어둠 속, 형형하게 빛나는 맹수의 눈과 딱 마주친 라망드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 아, 사제였군. 미뉴엘은 자고 있네만.

“황자님입니까?”

- 그렇다.

“대체 무슨……. 하긴. 미뉴엘이 또 큰일을 당했다고 하더군요.”

상대가 낯모르는 맹수도 아니고 에사디엔임을 확인한 이상 겁먹을 필요 없었다. 라망드는 성큼성큼 걸어 들어와 미뉴엘의 상태를 확인했다.

손끝이 닿자마자 중독됐음을 알아챈 라망드가 혀를 세게 찼다. 하지만 중독된 미뉴엘만큼이나 그의 안색도 과히 좋다고는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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