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잠을 못 자는 고문이라도 당한 듯 퀭한 눈을 하고서도 신성력을 아낌없이 불어 넣는 라망드에게 에사디엔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 우리를 찾은 기사들이 그대의 조로 연락을 넣는다고 했는데 받지 못했나 보군. 무슨 일이 있었나?
“당신이 알 바 아니잖습니까.”
- …….
묵묵히 바라보는 에사디엔의 시선에 라망드는 쓸데없이 예민하게 반응했음을 깨닫고 사과했다. 그것조차 너무 피곤한 나머지 몇 초 후에야 알아챘지만.
“…미안합니다.”
- 아니다. 일단 가서 쉬는 편이 좋겠군.
“그럴 수는 없습니다.”
파리한 미뉴엘의 낯을 바라보는 시선이 고집스러웠다. 절대 움직이지 않겠다는 듯 라망드는 그녀의 손을 잡은 채 침대 곁에 무릎을 꿇었다.
에사디엔도 그의 옆에 앉아 침대 위로 머리를 올렸다. 곧바로 찌릿한 눈초리가 따라붙었다.
“침대에 올라갈 생각하지 마시죠, 변태 황자.”
- 억울하군. 미뉴엘의 잠을 방해할 생각은 없다.
물론 올라가고 싶은 마음은 폭발할 정도로 컸지만 에사디엔도 그 정도는 말하지 않고 삼킬 줄 알았다.
“그쪽이야말로 무슨 일이 있었기에 애 속이 이렇게 너덜너덜해졌습니까?”
잠을 쫓으려는 듯 어느새 가물가물해진 눈으로 라망드가 물었다.
에사디엔은 그와 헤어져 동물들의 힘을 빌린 일과 위급해진 나머지 정령의 힘을 빌려 오스틴을 죽인 일, 그리고 성에 돌아와 있었던 일까지 모두 설명해 주었다.
라망드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는 ‘으르르’ 소리로 들릴 것을 알면서도 최대한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그의 말이 이어질수록 라망드의 눈에서 졸음이 걷혔다.
“미뉴엘은.”
조금 갈라진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라망드는 피딱지가 말라붙은 입술을 축이고 다시 말했다.
“미뉴엘은 대사제님께서 보내주신 수호부를 제게 줬습니다.”
‘정령석을 찾으러 갈 때 무슨 일이라도 있을 줄 알았는데……. 이제 네가 가지고 있어. 나한테는 개비가 있잖아.’
아니라고, 괜찮다고 했지만 그가 미뉴엘의 고집을 꺾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이런 건 중요한 사람이 가지고 있어야지.’
‘뭐래? 라 첨지, 너만큼 중요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래!’
확신에 찬 말을 들으니 정말로 그녀에게 중요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너는 기사단하고 자주 같이 다니잖아. 혹시 모르니까 몸에서 떼지 말고. 알았지?’
직접 안주머니 깊숙이 넣어주는 손길을 밀어낼 수 있을 리 없었다.
“결과적으로는 미뉴엘의 말이 맞았습니다.”
에사디엔이 떠난 뒤, 기사들도 다시 두 조로 나뉘어 주변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라망드가 포함된 조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수상한 무리와 마주쳤다.
하나같이 검은 로브를 깊게 뒤집어쓴 음침한 모습에, 마법 스크롤을 쓰는 자들은 물론이고 기괴한 손 모양으로 수인을 맺는 자들도 있었다.
그 말을 듣고 에사디엔은 이를 드러냈다.
- 형님에게 숨은 일행들이 있었나 보군.
“오스틴 황자가…….”
후, 짧게 숨을 내쉰 라망드는 뻑뻑한 눈을 조용히 내리떴다.
기사들의 엄호 사이를 날카롭게 찔러 들어오던 검격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미뉴엘이 억지로 넣어줬던 수호부가 아니었다면 그 자리에서 죽었을 것이다.
“미뉴엘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라망드의 손은 목소리만큼이나 떨리고 있었다. 에사디엔은 그것을 보지 못한 척 조용히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그냥 자기가 갖고 있었다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군요.”
그랬다면 이렇게 큰 부상도, 중독도 당하지 않았을 텐데. 아니, 애초에 마차에서 끌어 내려 해코지조차 하지 못했을지 모른다.
- 미뉴엘이라면 그대가 무사하니 되었다고 하겠지.
“…압니다.”
잘 아니까 이토록 가슴이 아픈 것이다.
떨리는 손으로 미뉴엘의 머리를 쓰다듬던 라망드는 어둠 속에서도 어렴풋이 분홍빛을 띠는 머리칼을 한 줌 쥐어 입술에 눌렀다. 하루 만에 조금 수척해진 뺨에 흐릿하게 빛나는 선 하나가 그어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에사디엔의 눈에 어쩔 수 없는 질투심이 어렸다. 그에게도 손이, 입술이, 인간의 몸이 있다면 이대로 두고 보지만은 않을 터인데.
- 사제여, 그대는 어째서 미뉴엘에게 마음을 드러내 보이지 않는 것인가?
“…….”
잠시 라망드는 아무런 말 없이 앉아 있기만 했다. 그 모습은 할 말을 정리하는 것 같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피곤을 이기지 못해 앉은 채 잠이 든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답을 포기한 에사디엔도 거의 잠이 들려던 찰나 라망드의 입이 열렸다.
“미뉴엘이 원하는 사람으로서 있을 뿐입니다.”
- 원하는 사람?
“서로의 모든 면을 알고, 보고, 겪은 사람. 언제나 곁에서 챙겨주는 든든한 친구. 언제고 기댈 수 있는 존재.”
에사디엔은 잠시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이상합니까?”
라망드는 흐릿하게 웃었다.
- 이상하다기보다는… 그대를 너무 죽이는 것 같아서.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은 없군요. 더군다나 옆에 있고 싶다고 인간이기마저 포기한 분께 이런 말을 듣다니.”
- …….
유구무언이었다. 에사디엔은 딱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입을 닫았다.
“뒷골목에서 굴러먹다 죽기 직전이었던 저를 구한 사람이 미뉴엘입니다. 제게 존재 의의를 준 것도 그녀고요.”
그렇게 말은 하지만 라망드라고 처음부터 미뉴엘이 좋았을 리 없다. 귀한 집안의 영애라는 말을 듣고도 고까웠을 뿐이었다.
그냥 죽게 두지. 이런 세상에서 더 살아보아야 뭐가 좋다고.
그런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으니까.
하지만 툭하면 열이 오르고 아픈 몸으로도 미뉴엘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빨빨거리며 돌아다니기 바빴다.
웃고, 앓고, 화내고, 더 심하게 앓고. 그런 모습 하나하나가 쌓이던 어느 날, 몸 상태가 좋지 않자 자연스럽게 자신을 찾는 미뉴엘을 보며 라망드는 깨달았다.
‘이 아이에게는 내가 필요해.’
나만이 이 귀한 아가씨를 살게 한다.
뒷골목. 그 사회의 밑바닥에서도 버러지, 쓸모없는 놈으로 불리며 살았던 아이에게 그것이 얼마나 짜릿한 깨달음이었는지.
“분명… 처음에는 그랬는데 말입니다. 10년은 참 긴 세월이더군요.”
돌아보면 혀 차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모났던 감정은 미뉴엘의 곁에서 구르고 닦이고 연마되면서 반들거리는 조약돌처럼 변했다.
- 그대는 내게, 미뉴엘이 다른 사람과 결혼해도 괜찮겠느냐고 물었지.
라망드는 고개를 살짝 까닥였다. 기억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 그대는 어떤가? 견딜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라망드는 이번에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황자님은 독차지하는 것만이 사랑이라고 생각하시는군요.”
- 그건… 그게 당연한 것 아닌가?
에사디엔은 조금 당황한 채 대답했다. 독차지한다고 하면 말이 조금 거셀지 모르지만 사랑하는 사이라면 오롯이 서로만 바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미뉴엘은 친구 한 명도 없이 당신만 바라보고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까?”
- 너무 극단적인 예시 같다.
“그건 그렇지요.”
라망드가 선선히 받아들여 버린 탓에 에사디엔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으응…….”
미뉴엘이 끙끙거리자 라망드는 그새 이마에 돋은 땀을 닦고 신성력을 흘려 넣어주었다. 잠시 후 그녀의 호흡이 안정된 것을 확인한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아무튼 미뉴엘이 누구를 좋아하든, 누구와 함께 있든 즐거워하고 행복하다면 그만입니다.”
왜냐하면, 하고 덧붙이는 얼굴은 경건하게까지 느껴졌다.
“어쨌든 미뉴엘은 제게 돌아오기 마련이니까요. 언니들보다도 더 편안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저니까.”
그때까지 눈을 마주치지 않던 라망드가 에사디엔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물론 아직 수행이 부족한지라 다른 사람이 아닌 절 사랑해 주기를 바라는 것도 사실입니다.”
- …사제인데도.
“예. 사제인데도.”
라망드는 머뭇거림이 없었다.
“사제복은 언제든지 벗을 수 있습니다. 물론 미뉴엘이 원할 때의 이야기지만.”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있어도 플렌드나의 이름을 저버리는 것은 엄청난 일이었다. 뭐니 뭐니 해도 신성력이 모두 사라져버리니까.
어릴 적부터 제 몸처럼 신성력을 다루던 그라면 아마도 자신이 검을 빼앗기는 것과 비슷한 상실감을 느끼지 않을까.
에사디엔은 그리 짐작만 할 뿐이었다.
“이런 형태의 사랑도 있는 것입니다, 황자님.”
라망드는 그렇게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에사디엔에게 당신의 생각은 어떠하냐고 묻는 일은 없었다.
* * *
미뉴엘이 며칠이고 잠에 빠져 있었으므로 카르이넨 성의 분위기는 착 가라앉은 상태였다.
라망드도, 의사도 몸속의 독은 거의 빠져나간 상태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가끔 한 번씩 눈을 떴을 뿐 곧 다시금 잠에 빠져들었다.
“음…….”
에사디엔은 언제나 미뉴엘 곁에 있었으므로 그녀가 어렴풋이 깨어날 때마다 가장 먼저 보는 것도 그였다.
크게 변한 몸집이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은 에사디엔을 볼 때마다 조금 놀라면서도 머리를 쓸어주면 그는 보답하듯 미뉴엘의 뺨을 핥았다. 그러면 그녀는 안심한 듯 다시 눈을 감았다.
개비도 계약자처럼 벽난로 안에 웅크리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요시초 가지를 땔감으로 넣어줄 때 불길이 푸르스름하게 변하면 안에 있다는 것 정도만 어림짐작할 뿐이었다.
한편 오스틴은 성의 분위기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로콰이트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채비가 마무리됐을 때쯤 대공과 독대하면서도 그의 여유로운 태도는 여전했다.
“내게 이런 모욕을 주다니 실망이군, 카르이넨 공. 폐하께서도 탐탁하게 여기지는 않을 것이네.”
“폐하께서 황자님이 제 여식에게 청혼할 것을 알고 보내셨습니까?”
“…….”
다른 가문이면 모를까 이쪽은 황제의 방식을 이미 겪은 바 있다. 황제가 알고 있었다면, 혹은 지지했다면 오스틴보다도 먼저 그의 친서가 성으로 날아왔을 터였다.
게다가 미뉴엘을 비롯한 카르이넨 가문 사람들은 그녀와 에사디엔이 파혼했다고 주장하지만, 황제는 암묵적으로 아직 파혼하지 않았다는 에사디엔의 주장을 지지하는 쪽이었다.
황실에서는 티를 내지 않으려 해도 에사디엔이 황제의 아픈 손가락인 것을 모두가 알았다.
그런 그가 모습을 감춘 지 얼마나 되었다고 청혼 소동을 벌였다는 것을 알면 기껏 회복된 부자 관계도 다시 삐걱댈 터였다.
야심만만한 오스틴의 단점이었다. 에사디엔을 깔보다 못해 무시하는 것. 다른 사람은 그러지 않을 거라는 점을 외면하는 것.
“저희도 괜한 분란을 만들고 싶지는 않습니다, 황자님.”
“…하하.”
잠시 독한 눈빛을 보였던 오스틴은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와 같이 여유로운 태도를 보였다.
“과연 프레세리아에 카르이넨과의 분란을 원하는 자가 있겠나.”
황자가 떠난 후 대공이 앉은 의자 손잡이에서 빠각, 하고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