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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 영애 집착을 시작합니다 (75)화 (75/130)

75화

황자의 뒤를 잇듯 들어온 대공 부군, 호시엘이 다급히 다가와 그녀의 손을 덮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분하군.”

“유가티스…….”

같은 마음이었다.

그들에게는 오스틴에 대한 심증이 있었다. 원래대로였다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막내에게 해를 끼친 놈은 껍질을 벗겨 구워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황실의 자손이기 때문에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것이 분하고 또 분했다.

하지만 대공은 감정을 폭발시키는 대신에 켜켜이 쌓아두었다.

“빙하는 하루아침에 생기는 것이 아니지.”

“하루아침에 사라지지도 않고요.”

카르이넨은 빚을 잊지 않는다. 어느새 부부는 비슷한 얼굴로 싸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황자는 곧 사고를 칠 겁니다.”

“알고 있다.”

“폐하께 고하지 않으실 테지요?”

“구해 드리면 그만이지.”

겨울이 긴 땅에서 사는 사람들의 참을성을 우습게 보면 안 되는 법이다.

오스틴이 똑똑해서 증거를 없애고, 덕분에 황제에게 고할 수도 없다면 직접 야심을 드러낼 때까지 기다리면 된다. 미뉴엘에게 황위 운운한 것을 보면 그때가 멀지 않은 듯했다.

* * *

오스틴 일행이 떠나기 전, 몰래 미뉴엘의 침실에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미뉴엘 옆에 길게 누워 있던 에사디엔의 고개가 슬쩍 들렸다. 침대가 크기만 할 뿐 아니라 튼튼하다는 것을 깨달은 후 그는 아예 그녀의 옆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엄마야, 깜짝이야…….”

그러나 미뉴엘의 품에서 놀던 작은 고양이가 급작스럽게 커졌다는 사실을 몰랐던 라페슈는 에사디엔과 눈이 마주치자 다리에 힘이 풀려 문고리에 매달렸다.

“저게 대체 뭐……?”

에사디엔은 잠시 라페슈를 달갑지 않은 눈길로 보다가 다시 눈을 감았다.

만약 그녀가 잠든 미뉴엘에게 해를 끼치려고 찾아왔더라면 저렇게 주춤대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쉬지 않고 쫑긋거리는 귀는 그가 완전히 주의를 놓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었다.

그렇지만 라페슈로서는 맹수의 시선이 닿지 않는 것만으로도 움직일 여유가 생겼다.

주춤주춤 발걸음을 옮겨 가까이 다가서도 에사디엔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라페슈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미뉴엘의 침대 가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저기, 이제 떠나게 됐거든요.”

라페슈는 운을 떼고도 한참 손가락만 만지작거렸다. 이런저런 일을 거치며 감정이 좋지 않아졌는데도 미뉴엘이 창백한 얼굴로 눈만 감고 있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싱숭생숭해졌다.

“지난번에 제안해 준 거 생각해 봤는데… 역시 난 치트룸으로 가려고요.”

미뉴엘은 꼭 최고에게 배워야만 마법사가 될 수 있느냐고 했지만 그래도 브라시다스가 거두지 않은 것을 후회할 만큼 크게 성공하고 싶었다.

“당신도, 황자님도 제국의 국력에 대해 말했지만 애초에 난 여기 사람이 아닌걸. 어느 나라가 잘되든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야.”

고요한 가운데 긴장이 조금 풀렸는지 라페슈의 말투가 편해졌다.

반면 그녀의 이야기를 들은 에사디엔의 귀는 움직임을 딱 멈췄다.

‘여기 사람이 아니라고?’

이상한 말이었다. 라페슈의 본래 가문인 템페스트 남작가는 건국 초기부터 남부에 뿌리내린 집안이었다. 비록 지금은 몰락했다고 해도.

아리송했지만 라페슈는 그 이야기를 더 이어가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난 추운 게 정말 싫어.”

못을 박듯이 꾹꾹 눌러 발음한 라페슈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쫓기는 사람처럼 종종걸음으로 문 앞까지 간 그녀가 문득 뒤를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고마워.”

* * *

종일 느긋하게 늘어져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에사디엔의 상태도 가히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근육과 뼈 사이가 찌릿찌릿하게 울리는가 하면 더위를 먹은 것처럼 속이 울렁거려 식사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미뉴엘이 이 꼴을 보면 참 잘했다고 하겠습니다.’

라망드는 에사디엔 몫으로 나온 고기가 그대로 있을 때마다 혀를 찼다.

그래도 에사디엔은 들리지 않는 척 미뉴엘의 어깨 옆으로 코를 밀어 넣기만 했다. 개비가 말했던 부작용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가끔은 배 속에서부터 신음이 우러나올 때도 있었지만 에사디엔은 절대로 후회하지 않았다. 이보다 더한 부작용이 생겼더라도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부작용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윽, 하…….”

며칠간 눈이 내리다 찾아온 맑은 밤이었다. 달빛이 드리운 침대 위. 미뉴엘이 끙끙 앓는 소리가 들려오자 옆에 누워 있던 에사디엔도 덩달아 눈을 떴다.

‘또 열이 오른 건가.’

체온을 확인하려 몸을 일으켰지만 뭔가 이상했다.

‘눈이…….’

시야가 가물가물하고 흔들렸다. 에사디엔은 눈을 꾹 감고 머리를 파르르 털었다. 그러자 아까보다는 조금 나아졌지만 여전히 선명하게 보인다는 느낌은 없었다.

이상했지만 오래 굶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지금 중요한 것은 미뉴엘이다.

하지만 이상한 일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평소처럼 주둥이를 미뉴엘의 이마에 대려고 했는데 고개를 내려도 코끝이 닿지 않았다.

“…….”

그러고 보니 시야가 꽤 좁아진 것 같기도 하다.

그제야 에사디엔은 시선을 내려 자신의 몸을 확인했다.

“……!”

미뉴엘의 머리 옆을 짚은 것은 두툼한 앞발이 아니라 달빛에 반사되어 하얗게 빛나는 인간의 손이었다.

‘인간으로 돌아왔다.’

그 사실을 인식한 순간 에사디엔은 고삐가 풀린 것처럼 미뉴엘의 머리칼이며 볼을 어루만졌다. 손바닥에 닿는 피부의 감촉이 꿈만 같았다.

“미뉴엘, 미뉴엘.”

오랫동안 말을 하지 못한 탓인지, 울기 직전이라서인지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지만 그는 반복해서 불렀다.

그동안 얼마나 짐승의 울음소리가 아니라 인간다운 발음으로 부르고 싶었던지.

그러는 와중에도 꼼꼼하게 미뉴엘의 상태를 확인하는 건 그간 곁에서 라망드가 하는 것을 주의 깊게 지켜봐 온 덕분이었다.

“열은 없어서 다행인데. 어디가 아픈 것인가.”

포션이라도 먹이려 머리맡 협탁으로 손을 뻗었을 때였다. 에사디엔은 새삼스럽게 천 한 장 걸치지 않은 자신의 몸을 보며 기겁했다.

“지, 지, 지금…….”

시선을 조금 더 아래로 내렸다. 아무렴 당연히 그렇겠지만 아무것도 입지 않은 상태였다.

“으응…….”

그때 미뉴엘이 긴 숨을 내쉬며 잠꼬대하듯 입술을 달싹였다. 단 숨결이 맨살에 닿자 에사디엔의 어깨 부근부터 이마까지 모조리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미, 미뉴엘.”

기절할 정도로 부끄러웠지만 한편으로 그 접촉은 에사디엔이 제정신을 차리도록 도와주었다.

짐승으로 있을 때야 옆을 지킨답시고 다들 신경 쓰지 않았더라도 인간은 이야기가 다르다.

만약 미뉴엘과 자신 사이에 딸이 있는데 웬 놈이 헐벗고 딸의 침실에 있다면?

상상이었을 뿐인데도 에사디엔은 이를 뿌득 갈았다.

“죽여버린다.”

그 사람이 바로 너예요.

“윽.”

마음 저편의 소리에 그가 괴로워하던 중이었다. 미뉴엘이 다시 한번 소리를 내며 눈살을 찌푸렸다. 속눈썹까지 파르르 떨리는 것이 아무래도 눈을 뜨려는 듯했다.

잠시 얼어붙었던 에사디엔은 다급하게 침대 밑으로 몸을 굴렸다.

두툼한 카펫 덕분에 쿵 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미뉴엘이 완전히 깨어나기에는 충분했다.

“에사디엔?”

눈을 뜨자마자 자신을 부르는 미뉴엘의 잠긴 목소리에 에사디엔은 복합적인 감정을 느꼈다.

침대 밑으로 조금 더 굴러 들어가며 최대한 기척을 죽이는 그에게 다시 한번 찌릿한 통증이 찾아왔다.

후욱, 후욱.

가까스로 신음을 삼키고는 괴로움이 어린 숨을 내쉴 때였다.

‘허억……!’

지금까지의 통증을 모두 몰아넣은 것처럼 거대한 고통이 그를 덮쳤다. 온몸이 활활 불타오르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들키면 안, 돼.’

그 와중에도 에사디엔은 그 생각 하나만큼은 놓지 않았다. 혹시라도 신음이 새어나갈까 입을 꽉 틀어막은 손 위로 금빛 털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 * *

‘미뉴엘.’

나는 멍하니 숟가락을 입에 문 채 익숙한 목소리를 떠올리고 있었다.

어젯밤, 아니 새벽일까? 누군가가 부르는 듯한 기분에 눈을 떴지만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열은 없어서 다행인데.’

처음에는 꿈인가, 하고 넘기려고 했다. 그런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마를 짚은 손길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분명히 에사디엔의 목소리였지.’

100% 확신할 수 있었다. 고생한 사람처럼 목소리가 까끌까끌하게 갈라지기는 했지만 그 사람은 에사디엔이었다.

그래. 확신하기는 하는데…….

‘꿈이 아니면 막상 그것도 좀.’

그게 현실이라면 실종되었다는 사람이 카르이넨 성까지 쫓아와서 내 침실에 숨어들었다는 소리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 정신 이상자 수준이라고.

“하아.”

그나저나 요즘 들어서 왜 이렇게 에사디엔 생각이 나는지 모를 일이다. 지난번에 칼 맞고 쓰러졌을 때도 그렇고.

나한테는 미련 같은 게 없다고만 생각했는데, 나도 모르게 마음의 어디 한구석에는 쌓여 있었던 걸까?

여전히 멍한 채로 한숨 쉬는 내 손목을 라망드가 낚아챘다.

“미뉴엘!”

“어, 어응?”

아이고, 깜짝이야.

정신을 차려보니 내 손은 입이 아니라 식탁으로 붉은 스튜를 쏟아부으려 하고 있었다.

“으아. 미안!”

그 광경을 보자 머리에 낀 안개가 싹 가셨다. 손을 놓아준 라망드는 나를 따라 하듯 한숨을 쉬며 물었다.

“너 정말……. 먹다 말고 대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으응. 그냥 꿈을 좀 꿨던 것 같아서.”

깨어난 후 나는 놀라운 이야기를 엄청나게 많이 들었다.

사실 나는 오스틴에게 찔린 후로 기억이 거의 없었다. 눈을 떠보면 침실이고, 또 눈을 떴을 때도 내 침실이고, 그게 전부였달까.

아, 처음으로 침실 천장이 눈에 들어왔을 때 이런 생각을 했던 기억은 있다.

‘이 정도면 나, 시한부가 아니라 불사신 아닌가?’

더불어 앞으로는 ‘이제 끝이구나!’ 하는 생각은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던 것도.

그런데 기사들 앞에서 험악한 소리를 지껄였다든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오스틴에게 피를 뿜었다든지 하는 소리를 듣고 얼마나 놀랐던지.

가장 놀랐던 것은 내가 그날로부터 딱 일주일 되는 날에 깨어났다는 사실이었다.

잠깐 눈을 뜨는 사이사이 잠이 들면 마치 개비가 초대한 것처럼 모든 것이 불로 이루어진 세계가 눈앞에 펼쳐졌다.

바닥이며 건물, 풀, 나무, 심지어 하늘의 구름까지 제각기 다른 온도의 불로 구성된 세계.

‘불이 이렇게 아름다웠나.’

불에 대한 공포가 완전히 사라지자 어렴풋이 떠올랐다. 예전 세상에서는 적막한 방 안에서 모닥불 타는 동영상을 틀어놓고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는 사실이.

마치 그때처럼 너울거리는 세계를 불멍하듯 바라보자면 개비가 갑자기 나타나 놀랄 때도 있었고, 오롯이 혼자 있을 때도 있었다.

그러고 있노라면 시간의 흐름도 잊혀서 나는 그냥 내가 하룻밤 자고 일어난 줄로만 알았다. 부상 때문에 얕은 잠밖에 못 자는구나, 하고.

‘그런데 그사이에 오스틴 일행은 로콰이트로 떠나 버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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