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짜증 나는 오스틴을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된다는 점은 좋았지만 라페슈가 끝내 내 제안에 응답하지 않고 오스틴 쪽으로 가버린 건 아쉬웠다.
깨작거리는 나를 보며 라망드가 혀를 찼다.
“배 안 고파? 너도 잘 먹어야 할 것 아냐, 저 녀석들처럼.”
라망드의 손짓을 따라 내려다본 곳에서는 무시무시하게 덩치가 커진 엘과 함께 거의 은발처럼 빛나는 흰색 털의 개가 고기를 챱챱챱 맛있게 먹고 있었다.
엘이야 드문드문 잠에서 깼을 때도 계속 옆에 있었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엘이라는 확신이 들어서 커진 걸 보고도 딱히 놀라지 않았다.
그런데 개라니. 아직도 내가 녀석에게 적응하지 못한 것을 알아채고 라망드가 키득키득 웃었다.
“저 개가 널 찾을 때 도움을 줬다나 봐.”
그래서 데려왔는데 내가 일어나지 않는 사이에 어찌어찌 사람들과 정이 붙어 눌러앉게 된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저 개, 검은색에 가까웠어. 아무리 헹궈도 맑은 물이 안 나와서 하녀들이 어디서 염색약을 뒤집어쓰고 온 건 아니냐고 했다더라.”
“아이고, 저런. 다들 고생했겠다. 금일봉이라도 주라고 해야겠는걸.”
참고로 새 식구는 개뿐만이 아니었다. 시선을 돌린 창가에서 참새만 한 새 세 마리가 쪼르르 앉아 모이를 먹고 있었다.
“어째 내 침실이 점점 동물 농장으로 변하는 것 같은걸.”
“쟤들도…….”
“알아, 알아. 그냥 백설 공주가 된 기분이라 그래.”
“백설 공주가 뭔데?”
이럴 때 당황하면 안 된다.
“응, 동화야. 동물들이 잘 따르는 공주가 나오거든.”
그리고 잽싸게 화제를 돌린다.
“그런데 라망드, 너는 나보다도 늦게 귀환했다며? 저 멍멍이가 도움을 준 건 어떻게 알았어?”
“너와 함께 돌아온 기사들한테 들었지.”
“기사들보다 엘이 먼저 와 있었다던데.”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라망드는 자애로운 ‘사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모았다.
“사제가 경지에 다다르면 동물의 말도 알아듣는 법이라네.”
돌리틀 선생님처럼?
그러면 엘이 갑자기 자란 이유도 물어봐 달라고 부탁하려는데 라망드가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엘 저 녀석, 정말 잘 먹네. 미뉴엘 네가 일어나기 전에는 물도 입에 대지 않더니.”
“헉, 정말……?”
엘이 나를 좋아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본능을 누르고 식음을 전폐할 정도였다니.
가슴이 찌잉, 하고 울리던 찰나,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익숙한 패턴인데?’
어쩐지 눈을 피하더라! 라망드의 태도가 어찌나 경건했던지 하마터면 나도 깜빡 넘어갈 뻔했다.
“야, 너 장난친 거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장난이야?”
“글쎄? 엘한테 물어보든지.”
아오, 싱글싱글 웃는 애를 꼬집을 수도 없고.
“엘이 굶은 건 진짜야?”
“응.”
“그래서 침대에서 굴러떨어진 건가…….”
걱정스러워져서 중얼거리는 내게 라망드가 눈썹을 구기며 물었다.
“저 녀석이 침대에서 떨어졌다고?”
“응. 눈 뜨는데 쿵 하는 소리가 나서 깜짝 놀랐어.”
“미뉴엘, 깊게 자다가 깔린 것도 몰랐던 거 아니야?”
“깔리기는. 내가 아무리 둔하다고 해도…….”
‘저 덩치가 짓누르는데 못 느끼면 압사하지 않겠니?’라고 받아치려는데 문득 머릿속에 다시 한번 에사디엔의 목소리가 스쳤다.
‘열은 없어서 다행인데.’
‘어라?’
분명히 그때, 누군가가 머리 옆을 짚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것 있지 않은가? 눈을 감고 있어도 느껴지는 기척. 몸 위에 무언가 널찍한 것이 드리워지는 듯한 기분.
머릿속에서 그것들이 합쳐지며 마침내 내 침대 위에 있는 에사디엔의 모습을 그렸다.
‘아악, 미쳤다! 미쳤어, 미뉴엘!’
고개를 휘휘 저어 망상을 털어냈다.
“미뉴엘?”
“아, 그러니까. 눌리는 느낌이 없었던 걸 보면 엘이 엄청 얌전히 있었나 보다, 싶어져서.”
“흐음.”
‘흐음’은 뭐가 ‘흐음’이야.
“그나저나 이황자가 무슨 수로 나보다 먼저 성에 돌아왔을까?”
아무리 단검이라지만 칼자루가 닿을 정도로 깊이 찔렸다. 개비가 어찌어찌 포션을 하나 부어줬다고는 해도 지혈만 겨우 될 만한 중상.
그러니까 내가 살아난 걸 보면, 기사들이 나를 찾으러 올 때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을 거라는 추측이 가능했다.
나는 벽난로로 시선을 던졌다.
개비는 아직 잠에 빠져 있었다. 녀석이 잠들어 있는 벽난로의 불은 이제 장작을 넣지 않아도 꺼지지 않고 타오르며 푸른색과 보라색 사이를 넘나드는 중이었다.
내가 칼에 찔리고, 기사들이 올 때까지 있었던 일은 개비가 일어나면 듣기로 하고.
“여러 번 이야기를 들었지만 시간이 맞질 않아.”
“실은 나도 그게 의문이야.”
오스틴의 이야기가 나오자 라망드도 장난스러운 추궁을 그만두고는 자세를 바로 했다.
“삯마차를 타고 와서는, 네가 화를 내면서 먼저 가버렸다고 했다지.”
예전에 자객으로 나타났을 때처럼 스크롤로 공간 이동 마법을 사용했다고도 보기 어려웠다. 기사들이 나를 발견한 시각보다도 훨씬 빨리 들어왔다니까.
‘미치겠네, 정말.’
무슨 복제 인간도 아니고.
나는 완전히 입맛을 잃었다. 식기를 내려두고 얼굴을 감싸 쥔 내 머리 위로 따뜻한 손이 내려앉았다.
“왜 그래, 미뉴엘.”
“답답해서.”
그리고 짜증이 났다.
막다른 골목에 도달한 상황보다도.
‘차라리 처음부터 오스틴에게 넘어가는 척 꼬셔서 정보를 빼냈어야 했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사실 때문에.
그런 상태를 솔직히 털어놓자 라망드는 피식 웃으며 말할 뿐이었다.
“퍽이나 그걸 했겠다. 너는 연기에 소질 없어.”
“아닌데. 귀족답게 구는 거 잘하는데?”
“어른들 앞에서는 요마안큼 얌전하게 굴긴 하더라.”
라망드는 내 눈앞에 대고 엄지와 검지를 딱 2mm 벌려 보였다.
“평가가 너무 박하시네.”
“너니까 선심 쓴 건데?”
라망드의 말에 어이없이 웃으면서도 오스틴의 힘에 대한 찝찝함 때문에 마음 한쪽이 착잡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올해는 삼재가 분명했다.
뒤를 돌아보지 말고, 후회하지도 말자는 내 신조가 이렇게 자꾸만 쓰러지는 걸 보면.
* * *
오스틴과 만난 일로 그나마 얻은 성과가 있다면 내가 정령의 힘에 익숙해졌다는 점이다.
개비와 계약할 때도 뭔가 몸이 정화된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한 번에 많은 힘을 흡수하고 또 사용한 탓인지 다룰 수 있는 힘이 늘어났달까. 마치 운동할 때 혹사당한 근육이 휴식 후에는 더 튼튼해지는 것처럼.
동시에 불 공포증이 사라지면서 개비와 엮여 있다는 감각도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책을 읽던 도중 갑자기 벽난로의 불꽃이 훅 꺼지면서 개비가 걸어 나왔어도 나는 놀라지 않았다.
“잘 잤니? 게으름뱅이야.”
- 일어나기 싫을 정도로.
그럴 필요도 없으면서 기지개를 쭉 켜는 개비는 훌쩍 자라 있었다. 어림짐작으로도 열 살은 넘어 보이는 외모다.
“개비, 꽤 세졌네.”
- 누구누구가 무모하게 움직인 덕에 얻어걸렸다고 해야 하나.
“말버릇하고는.”
- 그것도 누구 덕분에.
우리는 마주 보며 씩 웃었다.
서로에게 날을 세우고 짜증만 내던 전과 달리 한층 친해진 기분이었다. 함께 겪은 일도 있었고, 꿈속에서 개비의 세계를 방문하며 정령의 존재가 좀 더 친숙하게 느껴졌다.
개비는 엘을 보며 길게 콧소리를 흘렸다.
- 흐응― 역시 몸집이 되돌아오지 않았나.
“맞아. 엘이 커졌더라? 내가 기절한 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 기억나는 건 없어?
“응. 꼭 누가 잘라낸 것처럼… 딱 귀환했을 때까지의 기억이 없어.”
- 어휴, 인간아.
“…….”
지그시 노려보자 개비는 흠흠, 목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 저 녀석이 애원해서 키워준 거야. 네가 쓰러지고 나서 황자라는 놈을 해치운 것도 저 녀석이고. 시간이 지나면 되돌아올 줄 알았는데 상태가 불안정하네.
“어…….”
엄청난 이야기를 들어버렸다. 궁금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일단 하나씩 물어보기로 했다.
“해치웠다는 건, 죽였다는 거야?”
- 그래. 나도 그놈이 여기서 산 채로 나타나는 건 봤어. 어쩐지 시체가 불타서 사라졌을 때 낌새가 이상하다 했지.
의문이 풀리기는커녕 더 놀라운 이야기를 들어버렸다. 복제 인간, 혹은 분신술설에 무게가 실리는 순간이었다.
“엘의 상태가 불안정하다는 건?”
- 말 그대로지. 갑자기 성장하게 상태를 틀어버렸는데 멀쩡하겠어? 대나무처럼 쑥쑥 자라는 것도 아니고.
술술 대답하는데도 이상하게 개비가 어딘지 망설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왜 그래?”
- 뭐가.
“말 안 한 게 있나, 싶어서.”
- 어……?
그냥 감이 이상해서 물어봤을 뿐인데 개비의 콧등을 타고 작은 불티 하나가 또르르 떨어졌다.
“…….”
- …….
“너 진짜 뭐 숨기는 거…….”
- 아니거든! 그, 그렇게 두루뭉술하게 말하니까 뭘 말하는지 몰라서 그런 거야!
“변명은! 개비, 너 이리 와. 빗자루가 어디 있지?”
비 오는 날 잿가루 날리게 한번 맞아볼 테야?
하지만 개비는 내가 두리번거리는 사이를 틈타 펄쩍펄쩍 뛰어 달아났다. 그 뒤를 쫓으려 팔을 걷어붙이는데 엘이 다가와 콧등으로 날 툭 밀었다.
“어억!”
전에 비해 건강해졌다고는 해도 종잇장 몸이 어디 가지는 않았다. 방심한 탓에 팔랑팔랑 무너지며 소파 위로 쓰러지자 엘도 놀랐는지 상체를 번쩍 일으키며 내 얼굴 옆을 짚었다.
‘아, 또다.’
밤에 느꼈던 그 감각이 다시금 찾아왔다. 역시 그건 엘이었던 걸까?
이성은 당연히 그렇다고 말하는데 감은 뭔가 다르다고 하는 것 같아 혼란스러웠다.
그런 내게 엘이 사과하듯 얼굴을 부볐다.
“크아웅.”
“엘, 갑자기 그러면 어떡해.”
갑자기 몸이 커져서 적응이 잘되지 않는 거겠지. 안쓰러웠지만 따끔하게 말한 뒤, 이제는 안으면 내 품에 꽉 차는 목을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고마워. 덕분에 살았어.”
내가 깨어난 후로 카르이넨 성은 긴장을 벗고 일상으로 돌아가 조용한 나날이 이어졌다.
…는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었고 물밑으로는 모종의 일을 대비하여 차곡차곡 준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다시 한번 로콰이트로 가야겠구나.”
오스틴이 벌일 일에 대항하기 위함이었다. 어머니의 말씀에 엘가 언니와 나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뉴엘에게 대놓고 황위를 계승하겠다고 했지만 틀어진 후 입막음에 실패했으니 우리가 대놓고 병력을 이동시키기만 바라고 있을 겁니다.”
“치트룸에서 원조를 받는 것 같기도 해요. 그래서 저는 군나르 왕자가 후궁을 자처하며 온 것도 조금 의심스러워졌어요.”
어머니는 우리가 그렇게 생각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계셨는지 짧게 웃으시고는 언니를 향해 물으셨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단순히 명령을 하달하는 게 아니라 소가주를 교육하는 장면을 엿본 것만 같았다.
‘머, 멋있어……!’
나는 입을 살짝 가리며 속으로 오두방정을 떨었다. 어머니뿐만 아니라 머뭇거리지 않고 대답하는 언니도 너무 멋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