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이 안에서 10년이나 살고 있음에도 이 광경을 보니 새삼스럽게 여기가 로판 세계라는 사실이 다시 와닿았다.
‘음, 요즘 들어서는 로맨스보다 판타지 소설에 가까워지는 것 같기는 한데.’
남녀 주인공들이 완전히 돌아섰는데 이 소설, 대체 어떻게 흘러가는 걸까.
현재 주제와 완전히 상관없는 생각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들리는 내 이름에 움찔하며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로콰이트의 현 상황은 한 시간 후 쥬엘라가 알려주기로 했으니 미뉴엘, 네가 듣고 정리하도록 하고.”
“아, 넵!”
내게 부여된 첫 과제에 두근거렸다. 양손을 꼭 쥐고 대답하자 언니가 피식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 * *
쥬엘라 언니도 엘가 언니만큼이나 언제나 바쁜 사람이었지만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빠르게 시간이 잡혔다.
약속한 시간에 맞춰 엘가 언니가 빌려준 회의실에 들어서자 만면에 환한 웃음을 띤 마법사가 나를 맞이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아가씨! 하하하.”
이분, 왜 이러는 걸까요?
영문을 몰라 떨떠름했지만 곧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번에 새로 들어온 통신구랍니다! 목소리뿐만 아니라 쌍방향으로 얼굴을 볼 수도 있고 여러 명이 동시에 접속할 수도 있습니다.”
이 마법사는 새 장비가 들어와서 기쁜 거였다. 신상 자랑은 못 참지, 아무렴.
“그럼 저는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밖에서 대기할 테니 문제가 발생하면 언제든 불러주십시오.”
“고마워, 경.”
얌전히 대답은 했지만 솔직히 내가 봐도 꽤 놀라웠다.
‘마법으로 안 되는 게 없구나.’
화상 회의라니.
감탄하던 중 투명한 구슬이 파란색으로 깜빡이기 시작했다. 통신이 시작된다는 뜻이었다.
구슬에서 빛이 두 줄기 뻗어나가며 좌우로 상이 하나씩 맺혔다. 왼쪽이 쥬엘라 언니, 오른쪽이 테오도르였다.
‘오오, 3d 영상……. 오오오……!’
현대 과학, 아니 마법 만세였다.
- 오랜만입니다, 미뉴…….
- 우리 아기!!
테오도르가 먼저 인사를 건넸지만 쥬엘라 언니의 외침에 묻혔다. 통신용 수정구를 붙들고 들여다보는 건지 갑자기 얼굴이 확 커져서 나도 모르게 몸을 움찔하며 뒤로 물렸다.
“아니, 수정구 안에 내가 비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러는 거야.”
할 수만 있다면 이쪽으로 넘어올 기세야, 아주.
- 너무해! 이 언니는 우리 아기가 다쳤다는 말에 잠도 제대로 못 잤단 말이야!
쪼금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 쥬엘라 언니는 극성이 되어 있었다.
“멀쩡해. 그리고 테오도 듣고 있는데 그렇게 부르는 건 좀…….”
굳이 아기라고 부르지 않아도 언니가 날 사랑하는 건 충분히 티가 난단 말이야. 괜히 뺨이 홧홧해져서 손부채질을 하자 테오도르가 웃었다.
- 하하, 괜찮습니다. 대공녀들의 우애는 워낙 정평이 나 있으니까요.
- 그렇다잖아, 냉정한 아기야.
으으. 쥬엘라 언니는 장난스럽게 화를 내는 거였다. 내가 자처해서 위험한 곳으로 향했고, 오스틴도 막지 못했으니까.
언니가 뾰로통해진 건 진귀한 모습이었지만 지금은 일을 해야 할 때였다. 그리고 나는 언니가 바라는 말을 하지 않으면 이게 끝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음부터는 다치지 않겠습니다! 나도 사랑해, 언니!”
- 후후.
- 아름다운 광경입니다.
테오도르가 박수까지 치자 부끄러워서 앞구르기라도 하고 싶어졌다. 가족 말고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창피할 수가.
“흠흠. 아, 아무튼. 테오, 요즘 남쪽은 어때?”
- 마적의 습격은 몇 차례 있었지만 불의 교단은 거짓말처럼 잠잠합니다.
“으음…….”
- 미뉴엘 양, ‘그분’이 정령의 힘에 대해 알고 있었다고 했지요?
우리 셋 모두 혼자서만 통신구 앞에 앉았지만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황족의 이름은 입에 담지 말자는 무언의 합의가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협조하면 힘을 돌려주겠다고도 했어. 그러니까 단순히 아는 것뿐만 아니라 그 교단 안에서도 직접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고위층이 분명해.”
덧붙여 모처에 납치당했을 때의 일도 자세하게 말해 주었다.
힘을 빨아들이던 제단이나 오스틴이 치트룸에 남은 자료로 정령의 힘을 이용하게 되었다는 것 등을.
“그리고 정령의 힘이 아직 일정 부분 봉인되어 있어서 그런 건지……. 한정된 힘을 가지고 줄다리기하는 것 같다는 느낌도 받았어.”
- 그러면 이런 추측도 가능하겠구나. 그놈이 교단의 고위층 정도가 아니라 핵심이어서, 그가 없으면 교단의 운신도 제한되는 거지.
- 그렇다면 교단이 갑작스럽게 활동을 그만둔 이유가 설명이 됩니다.
“정령의 힘 말고 다른 힘도 쓰는 것 같기는 한데, 내가 마법사가 아니라서 정확히는 모르겠어.”
- 그분에게 마력이 있었다면 이미 유년기에 황실 마법사들이 보고했을 겁니다.
그럼 대체 뭘까.
나는 미간에 잔뜩 주름을 지었지만 이어지는 테오도르의 말에 번쩍 고개를 들었다.
- 다만 미뉴엘 양의 이야기를 듣고 떠오른 게 있는데요.
“뭔데?”
- 사막 너머에는 ‘모래의 신’을 모시는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모래? 모래는 땅의 정령에게 속하는 것이 아닌가?
- 아……. 그러고 보니 나도 예전에 거래하던 치트룸 상인한테서 얼핏 들었던 것 같아. 프레세리아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신이지.
- 예. 세가 약해지기는 했지만 옛날에는 보편적으로 믿는 신이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모래의 신에 얽힌 이야기를 몇 가지 들은 나는 입을 딱 벌릴 수밖에 없었다.
모래로 빚은 분신이라니.
그거라면 같은 시간대에 동시에 존재한 두 명의 오스틴도, 시신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도 설명이 가능했다.
- 미뉴엘, 너무 그렇게 흥분하지 마. 아직은 가설이니까.
“응, 그렇지.”
나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한껏 치켜 올라갔던 어깨에서 힘을 풀었다.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듯 언니는 손가락을 두어 번 튕기며 빙긋 웃었다.
- 자, 그럼 로콰이트의 근황에 대해 말해 보실까?
“와아아.”
은근히 기대하는 듯한 표정에 짝짝짝, 박수를 치자 역시나 언니는 오페라 가수처럼 과장되게 인사를 해 보였다.
하지만 그렇게 전해 준 소식은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 먼저, 미뉴엘은 여기 없는데도 화제의 중심이야. 내 동생다워.
“그게 무슨 소리야?”
- 황자 두 명을 다 찬 당찬 아가씨라고.
라임 보소.
“…….”
불만스러웠지만 안 찼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라서 할 말이 없었다.
하여튼 남의 사생활에 관심이 많은 건 어느 세상이나 다 똑같단 말이지.
- 그놈이 참 영악한 게, 자기는 입도 뻥긋하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소문의 출처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놈과 연관이 있는 자들이거든.
치졸한 복수였다. 자기 편이 되지 않을 거라면 아예 짓밟겠다는 생각이야 죽이려고 들 때부터 알아봤지만 이렇게 좀생이 같을 줄이야.
- 제일 윗분과의 사이도 이보다 좋은 적이 없었어. 너를 보호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질책만 조금 들은 모양이야.
잘 커서(최소한 그렇게 보이는) 돌아온 아들을 내버리지 못하는 걸 보면 황제도 어쩔 수 없는 아버지였다.
게다가 황태자도 후궁으로 들어온 군나르 왕자와 화기애애해서 랑베르 공이 은근히 저기압이라는 이야기까지.
- 요즘처럼 살롱이 자주 열리는 때도 없는 것 같아.
“다들 신났구나.”
우리는 조마조마한데.
- 사막 너머에서 오신 분께서 꽤 인기를 끄는 모양이더군요. 저희 어머니께서도 생각보다 예의 바른 청년이라고 하시는 걸 보면.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듯 테오도르는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 들으셨겠지만 저도 조만간 로콰이트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제일 윗분’께서 ‘가출한 아들’을 찾아달라고 하셨거든요.
에사디엔 이야기였다. 황제의 조사관들도 끝내 그를 찾아내지 못한 모양이었다.
‘하늘로 솟은 건지, 땅으로 꺼진 건지…….’
“테오, 이제 파견은 끝난 거야?”
- 당장은 안정되었으니까요. 물론 이대로 두고 가는 것은 불안하지만 남아 있는 지휘관들을 믿으려고 합니다.
“건실한 청년 같은 대답이네.”
- 하하. 친구가 걱정되기도 하고요.
굳이 말을 꺼낼 필요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나는 끝내 참지 못하고 물었다.
“짚이는 곳은 있어?”
- 음……. 글쎄요. 아직은 저도 잘 모르겠군요.
“그래…….”
잠시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가만히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쥬엘라 언니가 이 틈을 타 자리를 마무리했다.
- 그러면 오늘은 이만하자. 트레고스난 경, 다음에 보죠.
- 언제나 평안하시길.
살짝 고개를 숙인 테오도르의 모습이 사라졌지만 언니는 그대로였다. 무슨 할 말이 남아 있는 건가 싶어 나도 일어서려다 자리에 다시 앉았다.
“언니, 왜 그래?”
- 우리 막내, 약혼자가 그리워진 거니?
“아니거든?! 그냥…….”
- 그냥?
꿈에 나왔다는 소리를 하면 빼도 박도 못하는 긍정이겠지.
“그, 그냥 이상해서 그러지. 황성 안에서 갑자기 사람이 사라졌다는 게.”
- 어머나, 그래? 그렇구나. 다행이다.
“뭐, 뭐가?”
- 이 언니가 우리 아기를 위해 준비한 선물이 있거든. 마음 놓고 선보일 수 있어서 다행이야.
붉은 눈이 호선을 그리며 화사하게 휘었다. 아름다운 모습인데도 등줄기를 타고 올라오는 불안감에 더듬더듬 물었다.
“무슨, 선물……?”
- 호호. 비밀.
“어, 언니?”
- 나중에 보자, 우리 귀염둥이!
“언니! 언니! 잠깐만!”
이건 뭔가 있다.
본능적으로 느낀 나는 벌떡 일어나서 통신구까지 붙들며 목 놓아 불렀지만 무정한 언니는 즐거운 웃음소리만 남기고 사라져버렸다.
“으아아아!”
나는 스르르 주저앉아 머리를 움켜쥐었다. 로콰이트로 돌아가는 게 두려워져 버렸다.
* * *
“개비.”
- 오냐.
“…….”
내가 지그시 바라보자 개비는 허공을 뱅글뱅글 돌며 놀리듯 혀를 내밀었다. 불꽃으로 이루어진 혀는 도마뱀의 것처럼 갈라지며 너울거렸다.
- 왜. 뭐. 왜.
말을 말자.
나는 잔소리를 접어두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너 말이야. 지금 얼마나 힘이 돌아온 거야?”
- ‘얼마나’라니. 너는 항상 질문을 두루뭉술하게 하는구나.
“그러니까 뺏겼던 힘에서 몇 할 정도 돌아온 것 같으냐고.”
정령석은 요시초를 장작으로 때며 용의 알처럼 불 속에서 안락하게 지내고 있었다. 요시초가 북부에서는 흔한 식물이라 다행이었다.
더군다나 지난번에 오스틴에게서 역으로 흡수한 힘도 있어서 꽤 기대하고 물어본 것이었지만 돌아온 답은 실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 음… 3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