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에게.”
- 너무 실망하는 것 아니냐?
“그 고생을 했는데?”
- 쉽게 찾을 수 있었으면 내가 인간에게 계약까지 당해 가면서 이 수모를…….
“뭐어?”
- 흠흠. 아무튼 아직 멀었다. 너무 조바심 내지 말고, 혹여나 급하다고 요시초 가루 덥석덥석 먹지 말고.
어쩌고저쩌고. 한참 잔소리를 하던 개비는 내가 반응 없이 듣고만 있자 내 눈앞으로 불쑥 날아왔다.
- 어디 아프냐?
“아니거든.”
- 얌전히 있으니까 이상해서 그러지.
별거 아니라고 하려 했지만 개비가 나와 연결되어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거짓말 정도는 알아챌 것이었다.
“나, 3년밖에 안 남았다면서. 그 안에 끝낼 수 있을까 싶어서.”
- 뭐?
내내 공중에 떠 있던 개비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가 천천히 다시 날아올랐다.
- 이봐, 그거야 계약하기 전의 이야기고.
“그럼 지금은 시한부가 아닌 거야?”
- 5년 정도 남았으니 아니라고는 할 수 없지만……. 너 그래도 많이 건강해졌잖아?
그거야 그렇다. 조금 흥분하는 것만으로도 속에서 핏덩어리가 울컥 올라오지 않는다는 사실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하지만 3년이나 5년이나 시한이 정해진 삶인 건 마찬가지였다.
오스틴이 벌인 판이 점점 커지는 마당에 그 시한에 맞춰 개비에게 힘을 돌려줄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물론 나는 죽고 싶지 않다. 분홍 머리 파 뿌리 될 때까지 건강하게 살다가 아프지 않게 잠자다 세상을 뜨고 싶단 말이다.
조금 침울해하는 내 앞에서 개비가 마치 벌처럼 가로로 눕힌 8자 모양을 그리며 빙글빙글 돌았다.
- 내가 힘을 다 찾으면 너도 멀쩡한 사람처럼 살 거야. 정령하고 계약한 인간치고 병으로 죽은 사람 없다.
그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에 그만 웃음이 풋, 하고 터져버렸다.
“위로해 주는 거야? 진짜 안 어울려.”
- 해줘도 꼭…….
부루퉁해진 개비가 내게 뭐라 한 소리 하려던 때였다. 손에 축축한 것이 닿아 내려다보자 아직도 이름을 정하지 못한 개가 어느샌가 곁에 와 앉아 있었다.
“우리 멈무, 아직 안 자니?”
이 개는 ‘멍멍이’나 ‘야옹이’처럼 멈무라고 불리는 중이었다.
엘을 만났을 때와 달리 마땅한 이름이 금방 떠오르지 않은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개가 붙이는 이름을 족족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개중에 심드렁하게나마 반응해 주는 것이 ‘멈무’였고.
‘이게 이름이 되어버리기 전에 어서 멀쩡한 이름을 정해야 하는데.’
부들부들해진 흰색 털을 쓰다듬자 단단한 몸이 손바닥 밑으로 느껴졌다.
고양잇과 동물의 슬라임 같은 유연함에 익숙해진 내게 멈무는 딴딴하게만 느껴져 아직도 생소하기만 했다.
멈무가 엘하고 다른 점은 그 외에도 많았다. 코가 축축한 것도 그렇고, 눈 전체를 채운 것 같은 동공도 그렇고…….
“왕!”
그런데 평소에는 좀처럼 짖지 않는 멈무가 뭔가 말을 하듯 여러 차례 짧게 짖으며 치맛자락을 물어 당겼다.
“어어? 왜 그래? 엘하고 같이 나가더니…….”
조금 전에 엘과 함께 사라지기에 밤 산책이라도 하는 줄 알았는데 왜 엘은 없이 멈무 혼자만 돌아온 걸까.
내 의문을 알아챈 듯 멈무가 조금 더 크게 짖었다.
“왕왕! 왕!”
“혹시 엘한테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왕!”
나는 나 자신도 놀랄 정도로 격한 기세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개비… 어라?”
지난번에 엘과 대화하는 모습을 봤으니 멈무의 말도 통역해 달라고 부탁하려 했는데 어느새 개비의 모습이 사라져 있었다. 정령석 안으로 돌아간 모양이었다.
“잠 안 자도 상관없으면서 어떻게 엘보다도 오래 자는 것 같아.”
어쩔 수 없지.
투덜거리면서도 나는 멈무를 앞세워 엘을 찾으러 나섰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살이 에일 듯 차가운 공기겠지만 내게는 적당히 선선한 정도였다.
요 며칠 내린 눈에 달빛이 반사되어 램프를 들지 않아도 주변을 구분할 정도는 되었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경이었지만 내가 잘 오는지 자꾸만 돌아보며 확인하는 멈무를 따라가느라 마냥 감탄할 여유는 없었다.
그러다 정원의 중심인 고목나무가 가까워지자 멈무가 길게 우는 소리를 내며 달려갔다.
“앗, 잠깐만!”
흰 털을 가진 아이다 보니 눈 쌓인 풍경이 본의 아니게 보호색 역할을 했다.
하필이면 그때 달도 구름에 가려지는 바람에 나는 금방 멈무의 움직임을 놓쳐버렸다.
“멈무야, 엘! 이쪽인가?”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으니 일단은 두리번거리며 가던 방향 그대로 발을 옮기던 도중이었다.
“으…윽.”
뽀드득, 뽀드득, 눈 밟히는 소리에 섞여 흐릿한 신음이 들렸다.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서서 귀를 기울였지만 이제는 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심지어 멈무의 기척조차도.
“…….”
나는 입술을 깨물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뽀득뽀득 소리가 얼마나 이어졌을까.
“읏, 하아……. 큭.”
‘분명히 들렸어.’
그것도 매우 고통에 찬 소리였다. 엘이, 혹은 누군가가 다친 모양이었다.
정신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내 눈에 고목나무 주변에 둘린 회양목 울타리 아래로 언뜻 금빛 털이 스쳤다.
“에……!”
엘, 하고 부르려던 나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입을 막았다.
때마침 구름이 흘러가며 강하게 내려오는 달빛에, 엘의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털이 오팔 가루를 뿌린 것처럼 빛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로콰이트 황가의 상징!
죽기 직전에 주마등은 안 보이더니 지금은 온갖 가정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잠시 멍하니 서 있던 나는 주먹을 꽉 쥐고 그쪽으로 성큼성큼 나아갔다.
만약 저게 오스틴이면 (다쳤으니까) 아예 숨통을 끊어버릴 생각이었다.
‘에사디엔이면?’
그건…….
그건 아직 정하지 못한 상태로 회양목 울타리 앞까지 도달한 나는 나무 사이를 거칠게 헤집으며 반대편으로 넘어갔다.
정원사에게는 미안하지만 미처 반대편으로 돌아갈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급했다.
“멈무야, 거기 있으면 대답해!”
이번에는 답이 돌아왔다.
“끼잉…….”
앓는 듯한 소리에 조바심이 났다. 무릎 위로 치마를 걷어 올린 탓에 종아리에 작은 생채기를 몇 개 얻고 나서야 나는 건너편에 도달할 수 있었다.
“황자… 어?”
하지만 2든 3이든 분명히 황자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돌진한 곳에서는 엘이 길게 드러누운 채 기진맥진한 것처럼 밭은 숨을 내뱉고 있었다.
“…엘.”
허탈함과 안도감을 동시에 느끼며 나는 엘을 위로하듯 주둥이를 비비는 멈무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길지 않은 털을 한 줌 쥐어 달빛 아래서 똑똑히 보았지만 윤기가 흐르는 꿀빛 그대로였다.
‘잘못 본 거였나.’
갑자기 밝아진 바람에 눈 결정이 반사되어 착시 효과가 생긴 것일 수도 있다. 나는 한숨을 삼키며 엘의 머리를 내 무릎 위에 올리고 천천히 포션을 입 안에 흘려 넣어주었다.
“아프지 마, 엘.”
겉으로 보이는 상처가 없는데 이렇게 아파하는 이유로 짚이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정령의 힘으로 억지로 성장했다는 것.
“나 때문에 네가 괴로워하면 나는…….”
죄책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 엘은 나를 지키려고 개비에게 부탁한 것이니까.
- 그런 소리 마라.
나는 흡, 하고 숨을 삼켰다. 나도 모르게 엘을 꼭 붙들고 뒤를 돌아보았지만 환히 빛나는 눈 위에 사람 그림자라고는 없었다.
하지만 아까 그건 분명 에사디엔의 목소리였다. 꿈 같은 것이 아니었다.
“멈무야, 너도 들었어?”
“왕!”
멈무는 작지만 높은 소리로 짖으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지만 애석하게도 무슨 뜻인지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엘은 포션을 다 마시고 기절하듯 잠든 상태였다. 이제는 내 손보다도 큰 이마를 천천히 문지르며 나는 그 위에 입을 맞췄다.
‘설마 엘… 너는 아니겠지.’
마음에 한 점의 의혹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 * *
‘정말 신기하다.’
라페슈는 갑갑한 로브를 벗어 던지는 오스틴의 모습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그 노골적인 시선을 알아챈 그가 날카롭게 물었다.
“왜 그러지?”
오스틴은 라페슈가 그의 손을 잡은 후로 더는 존대하지 않았다. 그게 조금 섭섭했지만 아랫사람이 되었으니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정도는 그녀도 알고 있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말했을 텐데.”
셔츠의 단추마저 툭툭 풀며 이쪽으로 다가온 오스틴이 라페슈의 턱을 손가락으로 들었다. 한쪽 눈썹만 추킨 표정이 지독하게 오만하면서도 그와 잘 어울렸다.
“함께하는 이상 내게 거짓을 고해서는 안 된다고.”
“…….”
“기억 안 나나?”
“…납니다.”
“그러면 다시 대답을 해야겠지.”
라페슈는 잡힌 턱 대신에 눈동자만 데굴 굴려 오스틴의 시선을 피했다. 이게 뭐라고 부끄러워서 얼굴이 뜨거워졌다.
“그저… 신기해서요.”
오스틴이 그녀의 말을 곱씹듯 천천히 따라 했다.
“신기하다?”
그의 얼굴은 무표정했지만 라페슈는 그가 혹시 부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인 것일까 싶어져서 서둘러 변명했다.
“그게! 그, 안 좋은 뜻이 아니라 너무 대단하셔서……. 어떻게 같은 분이 두 장소에 계실 수 있는 것인지…….”
라페슈가 다른 일행들과 떨어져 나온 건 로콰이트에 도착하기 직전이었다. 밤늦은 시각 그녀를 불러낸 오스틴은 연달아 순간 이동 스크롤을 찢어가며 나라와 사막을 횡단했다.
설명은 짧았다. 사교계에서 시간을 허비하는 것보다 어서 마법사의 제자로 들어갈 준비를 하는 편이 낫다는 것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으므로 라페슈도 흔쾌히 동의했다. 그녀는 자신보다도 오스틴이 더 걱정이었다.
‘저를 데려다주신 후에 황자님께서는 다시 로콰이트로 가시는 건가요? 피곤하실 텐데…….’
‘무슨 소리지?’
‘네?’
‘나는 그대를 떠나지 않아.’
그 말을 들은 순간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마음을 얻으려는 듯 구태여 짓는 미소 같은 것이 없어서 더 그랬다.
게다가 이 일 때문에 그와 똑같이 생긴 더미(dummy)까지 만들었다니.
라페슈는 이미 들었음에도 자꾸 물었다.
“어느 쪽이 진짜인가요?”
“당연히 이쪽이지.”
“그럼 황성에 들어간 건…….”
이 질문에는 더욱 걱정이 실려 있었다. 혹시라도 오스틴이 황제의 노여움을 사 처형되기라도 하면 라페슈는 정말로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되는 것이니까.
오스틴은 지루한 기색도 없이 반복해서 대답해 주었다.
“그대가 더 중요해.”
“하지만…….”
“하지만은 없다. 내가 그대를 걱정시킬 일도 없어. 그대는 앞으로의 일에만 집중해서 잘 해내면 돼.”
생각이 없는 것 같으면서도 걱정은 많은 라페슈와 달리 오스틴은 확고하기만 했다.
라페슈의 숱 많은 고수머리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 넣은 그가 코끝이 맞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그녀의 머릿속에 새겨 넣듯 말했다.
“알겠나? 내가 그대에게 기대하는 단 한 가지는 그것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