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네.”
라페슈의 얼굴이 그녀의 머리카락만큼이나 붉게 달아올랐다. 그제야 오스틴은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럼 쉬도록, 미래의 대마법사님.”
인사를 남긴 그는 미련 없이 로브를 들고 방에서 나갔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와 동시에 라페슈는 침대 위에서 그대로 두 바퀴를 굴렀다.
나는 그대를 떠나지 않아.
그대를 걱정시킬 일도 없어.
미래의 대마법사님.
‘꺄아아악!’
그녀는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지르며 허공에 대고 발을 동동 굴렀다.
‘미뉴엘은 왜 저런 남자가 싫다고 한 거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오스틴이 카르이넨 일족에게 조금 거만하게 굴기는 했지만 황족이니 그 정도는 용납할 수준 아닌가?
게다가 미뉴엘이 오스틴의 얼굴에다 피를 토했는데도 그는 너그럽게 용서했다.
“마음도 넓다. 최고야…….”
청혼을 거절당했지만 상처받은 기색이 없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곧바로 자신에게 사근사근하게 대했다면 꿩 대신 닭 취급으로 꼬시는 것 같아 기분 나빴겠지만 무관심한 듯 담백한 친절함은 오히려 호감도를 더 올리는 계기가 되었다.
“완전 백마 탄 왕자님……. 아니지. 사막이니까 낙타 탄 왕자님이려나?”
키득거리던 라페슈는 긴장이 풀리자 그대로 잠들었다.
한편 그녀에게 배정해 준 방에서 빠져나온 오스틴은 코웃음을 쳤다. 맹한 얼굴로 쉽게도 그에게 빠져드는 꼴이라니.
“미뉴엘 카르이넨과는 너무 다르군.”
그녀를 생각하면 짜증이 나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아쉬움이 남았다.
같은 편으로 끌어들일 수만 있었다면 카르이넨은 엄청난 전력이 되어주었을 텐데.
개인적으로도 나쁘지 않은 결합이어서 더 아쉬웠다.
그에게 바락바락 대드는 여자는 처음이어서 더 그랬다. 그 기 센 여자를 톡톡 건드리다 보면 지루한 삶도 그런대로 살 만해질 것 같았는데 말이다.
“쯧.”
그러나 오스틴은 혀 한 번 차는 것으로 남은 아쉬움을 털어냈다.
카르이넨과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틈틈이 자객을 보내기야 하겠지만 썩 기대하지는 않았다. 남은 것은 정면 승부뿐이라고 본능이 말하고 있었다.
어느새 거대한 돌 문 앞에 도착한 그가 수정구 가운데에 손을 짚었다. 그러자 소리 하나 없이 문이 열리며 치트룸에서는 기대하기 힘든 냉기가 흘러나왔다.
“오셨습니까.”
밤이라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예상한 것과 달리 안에서 오스틴을 맞는 사람이 있었다.
얼굴이며 손 할 것 없이 주름이 자글자글한데도 자세만큼은 젊은이보다도 곧아서 기이한 인상을 주는 노인이었다.
그 오스틴도 이번에는 기습당한 듯한 기분에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늦은 시각인데 쉬지도 않는가?”
“죽으면 끝없이 쉴 수 있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은 움직여야지요.”
세상의 모든 게으른 인간에게 광역 딜을 넣으면서도 노인은 아무렇지 않게 홀홀홀 웃었다.
이제는 사막 국가 치트룸에서도 잊혀가는 모래의 신. 이 노인은 그 신을 모시는 사도이자 최후의 신도다. 오스틴이 갓 치트룸에 도착했을 때 그에게 불의 정령에 대해서 알려준 것도 이 사람이었다.
“그래. 수확은 있었습니까?”
“그대가 빌려준 것으로 대어를 낚았지.”
오스틴은 품에서 녹색 보석 펜던트를 꺼내 휙 던졌다.
모래 신의 사도는 놀라지도 않고 그것을 받아 품에 넣었다. 라페슈는 그의 어머니가 남긴 유품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펜던트가 원래 주인에게로 돌아왔다.
“대어? 그 정도입니까?”
“그 펜던트가 환하게 빛날 정도라면 믿겠나?”
“굉장하군요.”
펜던트의 출처는 거짓이었지만 적어도 마력을 감지한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어지간한 마법사의 마력 정도로는 반응이 없다고 말해 주지 않았을 뿐.
노인이 흐뭇하게 말했다.
“좋은 양분이 되겠군요.”
오스틴은 부정하지 않은 채 시원한 온도를 만끽하며 내부를 둘러보았다. 천장까지 계단을 이루며 빼곡히 조성된 밭에 요시초가 가득 자라고 있었다.
더워서 재배하지 못한다면 온도를 내리면 된다. 10년 전 불의 정령 때문에 벌어진 사막의 혹한을 참고하여 시도한 방법이 제대로 맞아떨어졌다.
“어찌 보면 요시초밭을 계약한 것도 그녀의 공이지. 보답으로 한 방울의 마력도 허투루 쓰면 안 될 거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정도의 요시초를 들이부으면 보통 사람도 정령사가 될 테니까요.”
하지만 그렇게 만든 정령사는 한두 번밖에 써먹을 수 없으므로 라페슈에게 적용할 계획은 아니었다.
요시초를 남용하면 자연력에 휩쓸려 인간으로서의 자아를 잃어버리고 자연에 동화된 무언가로 전락한다. 지금은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먼 옛날에는 흔했던 정령사가 쇠락하고 정령에 대한 정보도 모두 묻힌 이유였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단번에 갈라서야 되겠는가.
* * *
미뉴엘은 바빴다. 부모님이나 언니와 함께 황제 구출 계획을 짜느라, 그리고 짬이 난다 싶으면 불을 자신의 생각대로 구현하려 연습을 거듭했다.
조금 더 빠르게 운용할 수는 없는지, 힘의 낭비를 줄일 방법은 없는지 고민하는 미뉴엘을 보며 에사디엔은 여러 번 놀랐다.
‘건강해졌다고 이렇게 몸을 혹사하다니.’
사실 미뉴엘은 과로 DNA가 새겨진 K―노동자로서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것뿐이다. 왕부터도 새벽부터 새벽까지 일하는 민족이 아니던가.
그러나 에사디엔에게는 별생각 없이 삶을 즐기던 사람에게도 이런 면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둘째 공녀의 결혼식 때도 일을 도맡아 열심히 했다고는 들었지만…….’
옆에서 보는 것과는 느낌이 확연하게 달랐다.
그러고 보면 예전에 안다고 생각했던 미뉴엘의 모습과 다른 것은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아름답기만 한 줄 알았던 그녀에게도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흉터가 있었다. 활기찬 모습 이면에는 연약하다는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천형이 있었다.
세상에 그늘 없는 사람은 없다. 에사디엔은 자신의 그늘이 너무 짙다고 생각해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원치 않게 동물이 되면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 보는 순간 시야가 넓어졌다.
‘부끄러울 따름이다.’
에사디엔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너무나 오래 그늘 안에만 갇혀 있던 탓에 빛을 받아들이는 방법을 몰랐다.
밀어내기만 하는 그에게 미뉴엘은 어떤 마음으로 계속해서 다가왔던 것일까. 부끄러운 한편으로 미안하기도 했다.
- 미뉴엘.
지금 그가 줄 수 있는 도움이 없는 것도 미안했다. 짐승의 몸으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책상에 엎드려 잠든 그녀의 옷을 잡아당기는 것뿐이었다.
- 침대에 누워서 편히 자야 한다.
“으응, 응……. 알았어…….”
반만 눈을 뜬 미뉴엘이 손을 앞으로 휘저으며 겨우겨우 침대에 기어 올라갔다. 콧등으로 그녀의 몸을 받쳐 올려준 에사디엔이 함께 몸을 누이려던 때였다.
“아냐, 엘. 너는 밑에서 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비몽사몽 상태였는데도 똑 부러지는 명령이었다. 이런 일은 처음이라 에사디엔이 반쯤 몸을 올린 상태로 굳어 있자 다시 한번 같은 명령이 날아왔다.
“착하지. 내려가.”
말투는 상냥했지만 목소리에서는 경계심이 묻어 나왔다. 에사디엔은 동물답게 본능적으로 그 점을 알아채고 굉장한 충격을 받았다.
- 미뉴엘…….
끙끙 소리가 났을 텐데도 미뉴엘은 에사디엔이 침대 밑으로 내려간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이불을 뒤집어쓰고 깊게 잠들었다.
어쩔 수 없이 에사디엔도 앞발 사이에 얼굴을 묻고 잠을 청했다.
‘피곤하니까 옆에 뭔가 있는 게 거슬리는 거겠지.’
아무리 침대가 크다지만, 그의 덩치도 엄청나게 커졌으니까. 애써 그렇게 생각하려 했지만 아무래도 예감이 좋지 않았다.
다시 해가 뜨고 미뉴엘이 바쁘게 나가자마자 에사디엔은 개비를 몰래 찾았다.
- 정령이여, 제가 다시 작아지는 방법은 없겠습니까?
새들과 한창 놀아주던 개비가 오만상을 찌푸렸다.
- 인간들이란. 태어난 새가 알로 들어가는 일이 있더냐? 잿더미가 나무로 돌아가는 일도 있더냐?
혼을 내기는 했지만 개비도 에사디엔이 간절한 것을 알아 ‘그러게 빨리 고백하라고 하지 않았냐.’라고는 하지 않았다.
- 미뉴엘 고것이 하도 열심이라 연결이 전보다 훨씬 단단해져서, 내가 거짓말하려고 하면 족집게처럼 알아챈단 말이다. 나한테 뭘 부탁하면 더 위험해지는 거야.
- 죄송합니다.
- 나 말고 사랑을 관장하는 자의 종이 근처에 있지 않으냐?
에사디엔은 개비의 조언에 따라 플렌드나의 사제, 라망드를 찾았지만 이쪽도 한숨을 쉬기는 마찬가지였다.
“저는 사제지 신이 아닙니다.”
에사디엔은 한껏 풀이 죽어 고개를 숙였다.
‘역시 완전히 들키기 전에 떠날 수밖에 없나.’
마침 다들 바쁜 때였다. 순찰 시간도 알고 있으니 어둠을 틈타면 얼마든지 몸을 빼낼 수는 있었다.
하지만 망설이는 것은 미뉴엘이 그를 안아주며 속삭였던 말 때문이었다.
‘우리는 헤어지지 말자.’
에사디엔도 정말로 그러고 싶었다. 지금 도망치면 에사디엔으로서도 엘로서도 그녀를 저버리는 것 같아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왜 그러는 겁니까?”
- 그것이…….
예기치 못할 때 인간으로 잠깐씩 돌아온다는 말을 듣고 당장 라망드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당신, 그러고도 미뉴엘하고 같은 침실을 씁니까? 파렴치한 것도 정도가 있지!”
차마 다 소리로 나오지는 않았지만 움직이는 입술 모양은 분명 욕의 형태를 그려내고 있었다.
- 그대가 생각하는 일은 없다. 정말로 아주 잠깐이고, 굉장히 고통스러워서… 창피한 일이지만 기절한 적도 있다.
설명했지만 라망드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최근에 저런 눈빛을 본 적이 있는데, 오스틴을 보던 미뉴엘의 눈이 딱 저랬다.
‘그냥 죽어.’
그런 뜻이었지, 아마.
“됐고, 당장 침실 옮기십시오.”
- 그렇지 않아도 그래야 할 것 같다…….
침울하게 중얼거린 에사디엔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 혹시 인간으로 변하지 않도록 이 상태를 고정할 수는 없나?
라망드는 어림도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신성력으로 저주를 풀 수는 있어도 걸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그 상태를 되돌릴 수 있었다면 대공저에 굴러 들어온 날 바로 해치우고 쫓아냈을 겁니다.”
- 역시 그런가.
에사디엔은 길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정말로 두 개의 길밖에 남지 않았다.
떠나느냐, 들키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