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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 영애 집착을 시작합니다 (80)화 (80/130)

80화

옆에 있던 것이 없으면 굉장히 허한 느낌이 드는데, 그게 자다가도 느껴질 줄은 몰랐다.

더듬더듬.

눈을 감은 채 옆으로 팔을 휘젓던 나는 손에 아무것도 닿지 않자 벌떡 일어났다.

“엘!”

눈을 서너 번 깜박이고 나서야 잊었던 사실이 천천히 떠올랐다.

‘아, 엘은 밑에서 자고 있지, 참.’

그게 벌써 며칠째인데 아직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싫다고 낑낑거리는 녀석을 매몰차게 내려보낸 게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인데도!

‘하지만 어쩔 수 없단 말이야.’

엘을 보면 볼수록 점점 에사디엔이 떠오른다는 소리는 아무한테도 못 했다. 심지어 라망드에게도.

나조차도 내가 미친 것 같은데 다른 사람이 이해해 주기를 바랄 수는 없었고, 안쓰러워하는 눈초리도 받기 싫었다.

그렇다고 그대로 지내다 보면 괜히 나 혼자 깜짝깜짝 놀라서 엘에게 화풀이를 하게 될까 봐 무서웠다.

그래서 내려보낸 건데 옆에 없어서 놀라 깰 거라면 굳이 멀리 해야 하나, 싶기도 했다.

“엘…….”

한숨을 내쉬며 침대 가로 굴러가 손을 뻗었다. 짧지만 부드러운 털의 감촉을 기대했지만 아무리 휘저어도 잡히는 건 허공뿐이다.

‘서, 설마!’

엘이 또 바깥에 나갔다가 쓰러져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벌떡 일어나려던 찰나 손끝에 드디어 뭔가가 닿았다.

‘잉?!’

하지만 그건 축축한 코. 바로 멈무의 것이었다.

“멈무야, 이리 와.”

나는 말랑말랑한 엘 대신 딴딴한 멈무를 껴안고 물었다.

“엘 형아 어디 갔어?”

“왕?”

“노랗고 큰 고양이 어디 있는지 알아?”

“왕!”

아까와 달리 선명하게 짖은 멈무가 몸을 버둥거렸다. 놓아달라는 뜻인 것 같아 바닥에 내려주자 문가로 토토톳 뛰어가다가 나를 돌아보았다.

“따라오라고?”

“왕!”

“그, 그래.”

어차피 슬슬 날도 밝고 있으니 상관없겠지.

멈무 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따라가며 나는 내심 감탄했다. 요즘 동물들은 다 이렇게 똑똑한가?

‘난 엘이 천재인 줄 알았는데.’

다른 사람이 보기에 특출난다고 하면 영재고,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면 천재라는 말이 맞나 보다.

하마터면 팔불출 주인이 될 뻔했다.

그렇게 나를 뒤에 두고 거침없이 걷던 멈무는 내 방과 꽤 떨어진 곳에서 멈췄다. 얼마나 머냐 하면, 일단 내 방은 3층인데 여기는 1층이었다.

“여기야?”

“왕!”

“고마워.”

머리를 쓰다듬어줬지만 어째 반응이 심드렁했다.

“왕…….”

“왜, 왜 그래?”

당황했던 나는 곧 이유를 깨달았다. 칭찬할 때는 마땅히 간식이 따라와야 하는데 빈손이라서였다.

“육포라도 챙기고 다녀야겠네. 오해하지 마, 멈무야. 나 그렇게 맨입으로 퉁치는 사람 아니야.”

미안하니까 오늘은 특별히 맛있는 간식을 내달라고 해야겠다.

그렇게 멈무에게 약속한 뒤 혹시 엘이 자고 있을까 싶어 살금살금 문을 연 나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아, 미뉴엘.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멀거니 서 있던 내게 라망드가 인사하며 다가왔다. 고개를 돌리자 그의 손에 엘이 먹을 법한 먹이 접시와 물그릇이 들려 있는 게 보였다.

“미뉴엘?”

“라망드, 혹시 네가 엘을 여기로 옮겼어?”

“응. 임시로.”

“임시라니? 언제까지가 임시인데? 그리고 갑자기 애를 왜 옮겨?”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게 더 화가 나서 날카롭게 묻자 라망드가 이상하다는 듯 나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우리 오늘 로콰이트로 갈 거잖아. 그러니까 오늘까지지.”

“오늘?”

날짜가 벌써 그렇게 됐나?

“그래, 오늘.”

“아…….”

날짜를 여러 번 체크했는데도 막상 오늘이 그날이라는 건 몰랐다. 시간의 흐름에 무뎌진 탓이었다.

“미뉴엘, 너 많이 피곤해 보인다.”

안에 그릇들을 내려놓고 문을 닫은 라망드가 걱정스럽게 내 이마를 짚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신성력이 피로가 쌓인 몸 구석구석을 마치 페퍼민트 오일을 바르는 것처럼 시원하게 풀어주었다.

“…고마워.”

그렇지만 고마운 건 고마운 거고.

“아무리 임시라고 해도 너무한 거 아냐?”

“뭐가?”

뭐가, 라니.

“여기 비품 창고잖아. 어떻게 엘을 여기서 지내게 해?”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 옆. 안 쓰는 청소 도구를 보관하는, 창문도 작고 공간도 좁은 이런 곳에 엘을!

하지만 라망드는 심각성을 모르는 건지, 아니면 느끼지 못하는 건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원래 고양이는 좁은 곳 좋아해.”

“고양이 아니라면서!”

“고양잇과는 거의 그래. 호랑이도 작은 상자 좋아하잖아.”

그건 귀엽지만! 아파트 몇 채 부술 정도로 귀엽지만!

“좁은 건 그렇다고 쳐. 그래도 어떻게 나한테 한마디도 안 하고 엘을 다른 데로 보낼 수 있어?”

드디어 라망드가 팔짱을 끼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침을 꼴깍 삼켰다.

“너, 엘이 네 침실에 없는 거 언제 알았는데?”

“…조금 전에.”

이건 맞추면 무심한 주인이 되는 거고 틀리면 더 무관심한 주인이 되는 질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라망드의 한숨 섞인 대답에 가슴이 뜨끔해졌다.

“그저께 옮겨왔어.”

라망드의 눈초리가 ‘그러면서도 당당하게 좋은 주인이라고 할 수 있어?’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나는 그만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그리고 내가 독단으로 한 거 아니야. 엘, 그 녀석이 원한 거라고.”

아니, 잠깐만.

엄청난 말에 나는 반성하던 것도 잊고 라망드를 추궁하기 시작했다.

“너, 엘이 하는 말을 알아듣는 거였어? 장난인 줄 알았는데……?”

“어느 정도는.”

라망드가 애니멀 커뮤니케이터일 줄이야! 이렇게 다재다능할 수가.

나는 양손을 깍지낀 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물었다.

“그럼 엘이… 왜 나하고 같이 있기 싫어하는 건데?”

“싫어한다기보다…….”

“보다?”

하지만 뭐라 말하려 했던 라망드는 곧 고개를 저으며 딴소리를 했다.

“네가 직접 물어봐.”

아니, 갑자기 이렇게 백 스텝을 밟으면 어쩌자는 거야.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소맷자락이라도 붙들려고 했지만 라망드는 휙휙 잘도 피해 다녔다.

“나는 못 알아듣잖아. 좀 도와줘, 응?”

“미안하지만 중간에 끼는 건 달갑지 않아서.”

라망드는 그렇게 냉정할 정도로 명확히 말한 뒤, 덩달아 신이 나서 우리 사이를 뛰어다니던 멈무를 달랑 안고는 자리를 떴다.

“우리도 밥 먹으러 가자, 멍멍아.”

믿었던 지원군이 이렇게 발을 뺄 줄이야. 허탈하게 라망드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조심스럽게 창고 문을 다시 열어보았다.

창고라고는 해도 엘이 몸을 펼 정도는 되었지만 사방에 물건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으니 역시 턱없이 좁아 보이기만 했다.

“엘.”

“…….”

엘은 나를 알은척하지 않았지만 천천히 걸어 들어가는 발소리에 귀가 좌우로 움직이고는 있었다.

“침대에 올라오지 말라고 해서 화난 거야?”

“…….”

여전히 답이 없었다.

중간쯤에 멈춰 섰던 나는 다시 엘에게 다가갔다. 이번에는 조금 더 천천히.

“그게 아니면, 내가 또 잘못한 게 있는 거야?”

“…….”

“엘, 라망드한테만 말하지 말고 나한테도 말해 줘.”

커다란 얼굴을 꼭 껴안을 때까지도 엘은 석상처럼 가만히 있었다.

“나도 알고 싶어.”

“…….”

“우리, 계속 같이 살 거잖아. 그렇지?”

그러자 드디어 눈을 뜬 엘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마치 지난번에 내가 질렸느냐고 장난을 쳤을 때처럼.

“왜 그래, 누나 마음 아프게.”

달래려고 했지만 원인을 모르니 달랠 방법도 알 수 없었다.

엘이 눈을 깜빡일 때마다 손톱보다도 큰 물방울들이 후두두 떨어졌다.

엘은 끝까지 으르렁 소리 한 번 내지 않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 커다랗고 어린 짐승이 울음을 그칠 때까지 껴안아주는 것뿐이었다.

* * *

오전을 그렇게 보내고 났더니 로콰이트의 대공저에 도착했을 때쯤에는 아직 해도 지지 않았음에도 완전히 파김치가 되어 있었다.

바쁜 와중에도 마중 나온 쥬엘라 언니가 이렇게 말할 정도로.

“어머, 세상에서 제일 예쁜 우리 막내. 왜 이렇게 녹초가 됐니? 얼굴이 녹색으로 보일 지경이야.”

순간 주변에 있던 모두가 얼어붙었다. 배경이 눈보라 치는 허허벌판으로 바뀌는 것 같은 착각에 나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우리 언니, 오늘따라 왜 저렇게 기분이 좋담.’

우리가 돌아와 기뻐서라고 하기에는 뭔가 부족한데. 언니와 가장 잘 통하는 기디온 형부마저 다급하게 속삭이는 중이었다.

“여보, 그건 아닌 것 같아…….”

하지만 우리 언니는 주변의 평에 개의치 않지. 내가 재미있으면 됐지 아무렴 어떠냐는 얼굴로 눈을 찡긋해 보였다.

“어서 올라가 봐, 미뉴엘.”

은근히 재촉하는 말투에 영문을 몰랐던 나는 라망드와 마주 보고 어깨를 으쓱였다.

빨리 올라가서 쉬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은데 저렇게 말하니까 뭔가 찝찝하단 말이지.

미적거려봤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거의 등이 떠밀리는 수준으로 올라가야만 했다.

“언니가 저렇게 신난 건 또 처음 보는데…….”

그래서 더 무서운 거였다. 심지어 라망드도 떼어놓고 나 혼자 가게 했으니까.

“뭐야, 뭐지? 뭘까?”

내 방인데도 문 앞에서 서성거리던 나는 보다 못한 엘이 가까이 다가와서 톡 쳐주어서야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그래. 네가 있었지.”

아침나절 이후로 엘과 나는 아직도 어색했지만 여전히 의지가 되었다. 나는 엘의 이마를 쓱 문지르고는 내 방인데도 노크를 한 뒤 문을 열었다.

그랬더니 역시나. 안에는 처음 보는 사람이 서 있었다. 그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곧바로 내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상체를 살짝 숙인 탓에 어깨를 살짝 넘는 길이의 연둣빛 머리카락이 앞쪽으로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앞으로 아가씨를 모실 클리데인 올세라고 합니다.”

“…모시다니, 혹시 올세 씨는 기사인가요?”

“그렇습니다, 아가씨. 데인이라고 불러주십시오.”

용모 단정, 태도 깔끔. 실력은 모르겠지만 첫인상은 괜찮아 보이는 사람이었다. 엘을 보고서 놀라지도 않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곧바로 경계를 풀 수는 없었다.

“그런데 저는 올세 경이 올 거라는 말을 전달받은 적 없… 아.”

없다고 생각했는데.

- 이 언니가 우리 아기를 위해 준비한 선물이 있거든.

언니가 묘하게, 아니 대놓고 즐거워하던 이유가 이거였구나.

‘사람이 선물이었냐고! 귀족들의 사고방식이란!’

갑자기 공화주의자에 빙의한 나는 심란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 사람, 보면 볼수록 에사디엔하고 닮았잖아.’

특히 눈매하고 코가.

의도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던 나는 턱 하니 이마를 짚었다.

하지만 개비와의 연결이 견고해질수록 정비례로 튼튼해진 몸은, 전과 달리 놀라는 정도로는 비실거릴 기미조차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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