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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 영애 집착을 시작합니다 (81)화 (81/130)

81화

그래도 클리데인은 눈치 빠르게 내게 한 걸음 더 다가오며 물었다.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아가씨?”

“아니, 아니에요.”

나는 고개를 저어 보이는 한편으로 엘의 목덜미에 손을 묻었다. 짧지만 부드러운 털이 손가락 사이에 스치며 울렁거렸던 마음이 조금이나마 가라앉았다.

‘어떻게 하지.’

분명히 짓궂은 의도가 섞였지만, 쥬엘라 언니가 준비한 사람이라면 무턱대고 내쫓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더 고민하는 대신 곧장 언니의 집무실로 향해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물론 따라붙겠다는 클리데인에게 엘을 떠밀듯 맡긴 후였다.

“언니!”

“…미뉴엘?”

내 뒤쪽을 흘깃 넘겨다 본 언니의 한쪽 눈썹이 슬쩍 일그러졌다.

“올세 경은 어디 가고? 아직 호위 기사라는 자각이 없는 건가?”

“내가 혼자 오겠다고 했어. 언니하고 둘이서 이야기하려고.”

“아유, 우리 아기.”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으레 그러하듯, 언니는 아까워 죽겠다는 웃음을 지으며 턱을 괴었다. 하지만 그 앞으로 척척 걸어가 앉는 내 얼굴에 웃음기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챈 뒤에는 그것도 다소 사그라들었다.

“선물이 마음에 안 드니?”

일단 사람은 선물이 될 수 없다는 것부터 지적하고 싶었지만, 이 시대 사고방식으로는 먹힐 리가 없었으므로 꾹 눌러두고 말했다.

“딱 삼 분 보고 그걸 어떻게 알겠어. 우선은 언니가 왜 올세 경을 붙여준 건지, 그 이유가 궁금해.”

“잘생겼잖니?”

“으응?”

간단하지만 생각지 못했던 답에 순간적으로 책상을 짚었던 손이 쭉 미끄러지며 자세가 기우뚱 기울었다.

그래, 잘생기기는 했지! 어렴풋하게 에사디엔이 떠오르는 얼굴인데 눈에 차지 않을 리가 있나.

그런데 쥬엘라 언니는 에사디엔 이야기를 입에 담지도 않았다.

‘내가 너무 넘겨짚었나.’

사실은, 에사디엔 대신 닮은 사람으로 만족하라든가… 뭐 그런 의도인 줄 알았다. 그래서 살짝 발끈한 채 뛰어온 건데, 오해한 것 같아 조금 미안해지려던 찰나였다.

“네 꿈이 미남들을 모아서 즐기며 사는 거라기에.”

“아, 그거 아니라니까!”

울상을 잔뜩 지으며 빽 소리쳤지만 언니는 그다지 개의치 않았다.

“그래, 그래. 언니가 우리 아기의 꿈을 팍팍 지원해 줄게?”

아이고, 아이고오. 라망드 한번 놀려보려다가 내가 평생 놀림당하게 생겼네.

“다들 너무 재미있어하는 거 아니야?”

“후후. 티가 났니?”

“못 살아, 정말.”

나는 한숨과 함께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평소에는 장난 같은 걸 모르는 사람처럼 굴면서 말이야. 내 앞에서만 봉인 해제해 주는 건 기뻤지만 내가 대상이 되고 보니 웃을 수만은 없었다.

“하지만 뭐든 지원하겠다는 건 진심이야.”

쥬엘라 언니가 단정하게 틀어 올렸던 머리를 툭 풀어 헤치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풍성한 머리카락이 검은 물결처럼 출렁이며 아래로 떨어졌다. 그 모습에 시선을 뺏겼던 나는 한 박자 늦게서야 되물을 수 있었다.

“응? 지원이라니.”

미뉴엘이 된 뒤로는 건강을 제외하면 뭐 하나 부족하게 지내본 적이 없는데. 말하지 않아도 필요한 것이 다 갖춰지고 일하지 않아도 생활비 걱정 없는 삶이란 얼마나 감사한가.

그런데 무슨 지원이 더 필요해?

영문을 몰라 눈을 깜빡이는 내게 언니는 또 한 번 크게 웃어 보였다.

“너는 항상 그래, 미뉴엘. 욕심이라고는 없지.”

“에이, 나도 사람인데 욕심이 왜 없겠어?”

지금은 다 충족이 되니까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다른 집안이었으면 네가 철이 드는 순간 전쟁이 시작됐을 거야.”

아, 그런 욕심을 말하는 거구나.

나는 머쓱해져서 손가락을 꼼지락대며 말했다.

“굳이 내가 그러지 않아도 부모님하고 언니들이 챙겨주잖아.”

“그러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점이 신기하다고.”

에휴. 나는 몰래 한숨을 삼켰다.

그렇게 싸움닭처럼 굴어봐야 나한테 남는 게 뭐가 있다는 말인가.

물론 적당한 행복을 추구할 줄 아는 건, 두 번째 삶을 사는 사람이 터득한 지혜라고 할 수도 있겠지. 백지상태에서 귀족이라고 떠받들어지면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재산을 노리는 게 정당한 권리라고 생각할 법…….

‘아, 아니. 그건 아니지.’

곰을 깍둑썰기하고 상계를 쥐락펴락하는 언니들이 있으면 백지가 아니라 펄프 상태에서도 감히 욕심을 부릴 순 없을 거다.

“크흠. 바쁜데 시간을 뺏은 것 같네.”

“뺏다니? 내 시간은 다 네 거 해도 돼.”

“언니…….”

나는 살짝 흐릿해진 눈으로 언니의 뜨거운 시선을 피했다. 자꾸 이러시면 형부가 섭섭해해요.

“아무튼 올세 경 신상 명세 좀 줘봐.”

별것 아닌 일로 칭찬을 듣는 것도 근질거려서 냅다 화제를 돌렸다. 쭉 편 손바닥을 내밀자 이럴 줄은 몰랐던지 내내 장난스럽게 웃던 언니가 눈을 깜빡거렸다.

“뭐?”

“나한테 붙이기 전에 조사해 뒀을 것 아냐.”

“응, 뭐. 그렇기는 한데.”

“계속 붙어 있을 사람인데 어느 정도 알고는 있어야지.”

라페슈가 처음 우리 저택에 왔을 때 그러지 않았던 것이 후회될 따름이다.

‘원작과 다르게 움직이는데도 여주인공이니까 그냥 착한 사람일 거라고 생각한 게 잘못이야.’

나는 언니가 서랍 한쪽에서 꺼내준 몇 장의 서류를 빠르게 훑어 내렸다.

“클리데인 올세. 원래 우리 기사단 소속이었다고? 처음 보는 사람인데.”

저런 얼굴을 보고도 잊어버릴 리가 없는데 말이야.

“올세 경은 북부 본성이나 로콰이트에서 근무한 적이 없거든. 주로 상단 쪽 일을 도왔지.”

“그렇구나.”

기사단 근무도 어느 정도 리더급이 되기 전에는 로테이션이라고 알고 있는데. 그렇다면 입단한 지 오 년이 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가볍게 대답하며 슥 내려가던 시선이 마지막 페이지에서 뚝 멎었다.

“왜 ‘만나는 사람 없음’에 별을 다섯 개나 그려뒀어?”

“재미있으니까?”

아, 정말!

* * *

결국 마지막까지 놀림의 끈을 놓지 않은 쥬엘라 언니 때문에 나는 별일 하지 않았는데도 묘하게 지친 몸을 끌고 방으로 돌아왔다.

“미뉴엘.”

“아, 라망드.”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라망드와 동물 친구들이 찾아와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분명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을 텐데 체감상으로는 그보다 더 지난 것 같아 웃으며 그들을 반기려 했지만.

‘뭐, 뭣이여, 이 분위기?’

엘이나 멈무, 파랑새 친구들이야 넘기더라도 클리데인을 스치고 떨어지는 라망드의 눈빛이, 정말이지… 서리가 낄 것처럼 낮은 온도였다.

그런데 그걸 또 어찌나 잘 감추는지 그와 십 년을 보낸 나, 그리고 정면에서 그걸 봤을 클리데인이 아니면 아무도 못 느낄 정도였다.

‘라망드가 저렇게 사람을 경계하는 건 처음 보는데.’

왜 저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본능이 경보음을 울리고 있었다.

지금 들어가면 쥬엘라 언니를 상대할 때보다 더 힘들어질 거라고!

‘…음. 주방에 망고가 있나 물어보러 가볼까?’

자연스럽게 뒷걸음질 쳤지만, 꼭 이럴 때만 눈썰미가 좋아지는 라망드에게 붙잡혀 버렸다.

“어디 가?”

널 피해서 다른 곳으로?

그러나 다행히 정신 줄을 단단히 붙들고 있던 내 입은 생각과 전혀 다른 말을 해주었다.

“아하하. 내가 내 방을 두고 어디로 가겠어.”

“그러면 긴말 말고 이리 와서 앉아.”

라망드가 자기 옆자리를 팡팡 내리치며 불렀다.

“빨리, 미뉴엘 카르이넨.”

윽. 왜 성까지 붙여 부르고 그래.

‘멈무한테 자기 먹을 육포까지 준 거 걸렸나?’

라망드가 잘 먹기는 해도 식탐을 부린 적은 없는데. 딱히 짚이는 게 없는데도 이상하게 진땀이 났다.

내가 녀석의 눈치를 살피며 안으로 주춤주춤 들어가자 클리데인도 일어서려 했다.

“아가씨.”

“아냐, 괜찮아요. 그대로 있어도 돼요.”

하지만 나는 얼른 손을 내저어 클리데인을 다시 앉혔다. 연한 새싹 빛깔의 정수리 위에 파랑새들이 둥지를 틀듯 옹기종기 자리를 잡았고, 멈무도 질세라 그의 무릎에 턱을 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풋풋한 색상의 머리카락이며 투명한 피부 때문인지 마치 동물 친구들과 한때를 보내는 엘프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그래, 눈은 흐뭇하네…….’

어쩌면 쥬엘라 언니의 선물(?)이 영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다고 생각하며 자리에 앉자마자 양쪽 뺨이 따가워질 정도의 시선들이 동시에 달라붙었다.

“기사분이 왜 네 개인실에서 이러고 계시는 거야?”

내 왼쪽에 앉은 라망드와.

“므웅.”

소리도 없이 오른쪽 발치로 다가온 엘까지.

“어, 그게, 이 사람은 클리데인 올세 경이라고 하는데…….”

일단 서로 인사부터 시키려던 나는 잠깐 움찔했다.

‘역시 사람을 앞에 두고 선물 운운하는 건 못 할 짓이지.’

그러면 갑자기 호위 기사가 붙은 이유를 뭐라고 설명할지 생각하던 중이었다. 그 짧은 틈도 견디지 못한 라망드와 엘이 재촉하기 시작했다.

“하는데?”

“크릉?”

“…너희는 내가 없는 동안에 서로 통성명도 안 하고 뭐 했니?”

오늘따라 유독 극성스럽게 구는 녀석들이 어색하기도 하고 클리데인 보기에도 민망해서 쏘아붙였지만, 라망드는 전혀 타격받지 않은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통성명은 했지. 네 전담 호위 기사로 배치되었다는 말도. 그런데 오늘 아침, 아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런 말은 없었잖아?”

클리데인은 라망드에게도 딱 나를 만났을 때 했던 말만큼만 한 모양이었다. 건너편으로 시선을 흘긋 던지자 클리데인이 조금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죄송합니다만 저는 명령받은 대로 보직을 옮겼을 뿐이라서.”

“알아요. 기사니까. 라망드는 내 걱정을 많이 하거든요. 소꿉친구다 보니.”

호위 기사라면 거의 종일 함께 지낼 텐데, 그보다는 덜하겠지만 자주 나를 찾아오는 라망드와 사이가 나쁜 건 곤란했다.

최대한 녀석의 행동을 커버한 결과 클리데인의 웃음이 조금 자연스러워졌다.

“소꿉친구. 그렇군요.”

그런데 라망드가 그 틈을 귀신같이 비집고 끼어드는 게 아닌가.

“걱정을 안 하게 생겼어? 네 주위에서 별의별 일이 다 일어나는데.”

아, 이거다! 오늘 막 근무지가 바뀐 기사에게 겁을 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 좋은 변명거리를 놓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언니들도 걱정한 모양이야. 그러니까 밀착 호위할 기사를 붙여준 거지.”

사실 쥬엘라 언니가 말은 안 했어도 그런 의도가 없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언니의 집무실에서 본 서류 속 클리데인의 근무 평가는 분명히 상위권이었으니까.

라망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래서였구나. 나는 ‘그분’을 닮… 읍!”

얘가 정말!

“하하하. 라망드, 입술에 모기 붙었다!”

나는 기겁해서 라망드의 입을 탁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막고는 클리데인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에사디엔 이야기를 꺼내는 게 달갑지 않은 것은 둘째 치고, 클리데인도 실력이 아니라 얼굴 때문에 호위 기사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면 얼마나 의욕이 떨어지겠어.

“들어가서 쉬어요, 올세 경. 앞으로 잘 부탁해요.”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아가씨. 그런데…….”

클리데인은 난처한 듯 머리와 무릎을 점거한 동물들을 가리켰다.

“이 녀석들은 어떻게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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