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이제 클리데인이 떠나려는 것을 알아챈 듯 멈무가 끼잉, 하고 길게 우는 소리를 냈다. 그 모습이 마치 내게서 떨어지기 싫어하던 엘을 보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나쁜 사람은 아닌 모양이야. 다행이다.’
서류에는 크게 사고 친 흔적이 없었지만, 나쁜 놈이라도 얼마든지 본성을 숨기고 지낼 수 있는 법이다.
그러나 동물들은 좋은 사람을 알아본다고 하지 않던가. 게다가 클리데인은 자기가 움직여야 한다고 마구잡이로 그 아이들을 떼어내지도 않았다.
“크응.”
잠시나마 자기 생각을 떠올린 걸 알았는지 엘이 내 무릎 옆에 볼을 대고 부볐다. 그게 마치 완전히 화해했다는 표시 같아서, 나는 기뻐져 라망드에게서 손을 떼고 엘의 목을 꼭 안아주었다.
“올세 경, 그 아이들은 경이 마음에 든 모양이에요. 경만 괜찮다면 함께 지내도 좋아요.”
클리데인에게도 잊지 않고 그렇게 말해 주자 지금껏 담담했던 그의 얼굴이 햇빛을 정면으로 받은 것처럼 밝아졌다.
“정말 감사합니다. 개를 좋아하는데 근무 때문에 기르지 못했거든요.”
“잘됐네요.”
“예, 정말로.”
조금이나마 에사디엔과 닮은 얼굴이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클리데인은 그 함박웃음 띤 얼굴 그대로 당부했다.
“제 방은 아가씨 침실 바로 옆으로 배정받았습니다. 아무리 늦은 시각이라도 괜찮으니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가 있다면 바로 소리쳐 주십시오.”
기사들의 단체 숙소가 아니라 바로 옆방이라니. 나는 조금 놀랐지만 티 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감사합니다. 그러면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인사를 남긴 클리데인은 혹여나 파랑새 친구들이 떨어질까 목을 뻣뻣하게 긴장한 채로 자리를 떴다. 그의 뒤를 멈무가 톳톳톳, 하는 특유의 걸음걸이로 따라붙었다.
탁.
작게 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라망드가 무표정하게 나를 돌아보았다. 장난기도 짓궂음도 사라진 얼굴을 보자 조금 전 방문을 열었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등에 땀이 솟았다.
“바로 옆방?”
“그, 그러게. 나도 이제 알았네.”
“…….”
라망드는 더 말을 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었다.
얼마간 엘을 쓰다듬으며 기다려봤지만 열릴 기미가 없다. 조바심이 난 나는 결국 라망드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왜 화를 내, 라망드으.”
그제야 조금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왜 너한테 화를 내겠어.”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화가 났다는 것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는 건…….
“그럼 나 말고 누구한테 화를 내고 있는 건데?”
물어보면서도 왠지 답을 알 것 같았다. 옛날에도 가끔 봤던 모습이었으니까. 이를테면 라망드의 신성력을 받고도 내 열이 완전히 떨어지지 않아 독한 약을 먹어야 했을 때.
라망드는 자책하고 있는 거였다.
아니나 다를까 변명처럼 그가 내뱉은 건 자신의 선택을 탓하는 마음이었다.
“역시 사제가 아니라 성기사의 길을 택해야 했을까? 그래도 너한테 신성력을 주는 건 달라지지 않았을 텐데.”
어디든 다니며 신성력을 베풀고 설파할 수 있는 사제와 달리 성기사는 오롯이 신전 소속이다. 라망드는 그 사실을 나만큼이나 잘 알면서도 나를 돕겠다는 목표에 경도된 사람처럼 굴었다.
‘그러고 보니 최근 들어서 점점 신성력을 받는 일이 줄어들었지.’
오스틴의 일이 있고 난 후로는 정령의 힘이 완전히 자리를 잡고 균형을 이루었기에 더 그랬다. 피곤할 때 가끔씩 찾아온 라망드가 기운 내라며 몇 번 건넸을 뿐이었다.
나는 한숨을 삼키며 라망드의 손등을 위로하듯 토닥였다. 그도 어서 ‘전속 치료사 겸 친구’가 아니라 ‘친구로서 충분한 친구’로 자신을 받아들이길 바랐다.
“네가 성기사가 되었다면 지금처럼 함께 머무를 순 없었을 거야. 알잖아.”
“…그러네.”
그제야 라망드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머리로만 알았다는 티가 여실히 났다.
‘하여간 라 첨지, 대충 대답하고 넘기려고 하기는. 차라리 귀신을 속여.’
이럴 때는 또 방법이 있지.
나는 토닥이던 라망드의 손을 확 잡아끌며 악녀처럼 씨익 웃었다.
“너 혹시 질투해?”
그런데 의외였다. 오만상을 찌푸리며 뭐 잘못 먹었냐고 할 줄 알았던 라망드의 동공이 벌어지며 입술마저 파르르 떨렸다.
“…뭐?”
라망드도 놀라고 나도 놀라려던 찰나였다. 그의 미간이 확 일그러지며 다시 한번 반문했다.
“뭐라는 거야?”
역시나.
생각보다는 약간 늦었지만 예상과 비슷한 반응에 나는 안심하며 라망드를 쿡쿡 찔렀다.
“네가 가족들 앞에서 미남 수집 운운하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걸?”
“아는 사실을 이렇게 또 한 번 짚어주시다니. 대단히 감사하군요, 미뉴엘 양.”
하하하. 나는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안 어울리게 웬 질투야. 친해지더라도 올세 경하고 나는 기사와 주군의 딸내미 사이잖아. 가장 친한 친구인 너하고 달리.”
“…너 정말 빈틈없이 못을 박는구나.”
응?
“못을 박아?”
“아니야.”
고개를 저은 라망드가 단단히 팔짱을 꼈다.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는 건지 궁금했지만, 그가 이렇게 방어적으로 굴 때는 껍질 안에 숨은 거북이보다 더 완고했으므로 일단은 넘어갔다.
클리데인에 대해 당부하는 것이 우선이기도 했고.
“아무튼 올세 경 앞에서는 에사디엔하고 닮았다는 말 하지 마.”
“왜. 신경 쓰여?”
아니라고 하려다 그냥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응……. 조금.”
“네가 그런대도 어차피 데리고 다니면 사람들은 뒤에서 수군댈 텐데.”
아차, 그런 문제가.
역시 로콰이트는 지내기 피곤한 곳이다. 분명 에사디엔을 차놓고 못 잊어서 닮은 기사를 데리고 다닌다고 떠들어대겠지.
‘내가 여기 머무르는 동안에 에사디엔이 돌아오기라도 하면…….’
그 사람은 상처받을까, 아니면 아직도 희망이 남았다고 생각할까?
‘아니야. 나를 다 털어내고 난 뒤라 무관심할지도 몰라.’
반길 만한 상황인데 어쩐지 입술이 바짝 말랐다. 나는 서둘러 에사디엔에 관한 생각을 머리에서 지우며 어깨를 폈다.
“그러라지 뭐.”
하지만 역시나 예리한 라망드는 용케도 내 동요를 알아채고는 혀를 찼다.
“센 척하기는.”
“아무튼 그 사람들이 떠든다고 우리까지 그럴 필요가 있겠냐는 거지. 그렇지 않아도 에사디엔이 사라진 마당에.”
“네가 그렇다면, 그래. 알겠어.”
이번에는 라망드가 내게 손을 뻗었다. 위로하듯 뺨을 감싼 손바닥에서 신성력이 부드럽게 밀려들며 쌓여 있던 이런저런 생각들을 간지러운 물결처럼 감싸고 녹여냈다.
스르르 눈이 감기며 그 감각에 몸을 맡기기 직전이었다. 별안간 엘이 으르렁거리며 라망드와 나 사이에 주둥이를 들이밀었다.
“엘? 어엇.”
나는 속절없이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엘은 우리를 떨어트린 것으로 만족하지 못했는지 아예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당당하게 한 자리를 차지했다.
“크릉.”
그래놓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모른 척 앞만 보는 모습이라니. 어이없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실없이 웃음만 나왔다.
“질투는 나보다 이 녀석이 더 하는 것 같네.”
자리를 빼앗기며 일어선 라망드도 헛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말했지만, 엘은 그가 방에서 나갈 때까지도 시침을 뚝 떼고 세수만 반복했다.
“모르쇠까지? 하하.”
졌다는 듯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라망드가 방을 나섰다.
쿵.
문이 꽤 큰 소리를 내며 닫혔다. 그 서슬에 벽난로 안에서 얌전히 타고 있던 장작 한구석이 무너지며 개비가 뿅, 하고 튀어나왔다.
- 호위 기사라는 것이 붙었다고?
“그렇대. 어떻게 지금까지 가만히 듣고만 있었어?”
이렇게 없는 입이 간지러운 것처럼 굴 거면서.
- 뭐어. 네가 날 부르지도 않고, 소개하려는 것 같지도 않으니 그랬지.
나는 조금 감탄했다.
이 녀석한테도 눈치라는 게 생기는구나. 역시 사회화란 참 중요한 거였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개비가 내 앞으로 휭 날아오더니 눈매를 좁히는 것이 아닌가. 눈구멍 안에서 기세 좋게 타오르는 불씨가 매서웠다.
- 너 지금 속으로 욕했지?
아, 눈치가 좋아지면 이건 조금 불편…….
- 네 생각이 나와 통하는 걸 잊은 게냐? 분홍색 금붕어라더니, 과연.
제일 싫어하는 별명을 듣자마자 발끈한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라망드가 말했지?!”
개비의 멱살을 확 낚아채려 했지만 녀석은 이미 휘파람을 불며, 아니 부는 척하며 여유롭게 피한 뒤였다.
- 글쎄다. 잊어버렸느니라.
“이런 불타는 금붕어 같으니라고!”
공중에서 한 바퀴 돈 개비가 얼굴 이곳저곳을 일그러트리며 빽 소리쳤다.
- 뭐라고? 너는 도무지 위대한 존재에게 존경을 표할 줄 모르는구나. 미물 주제에!
“그 미물한테 애원해서 겨우 계약한 주제에!”
우당탕퉁탕!
개비와 나는 동시에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 아니, 달려드는 것과 동시에 서로의 손을 피했다. 이 말만 들어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을 텐데, 딱 한 마디로 묘사하면 ‘난장판’이었다.
“거기 서!”
- 네 녀석이나 딱 서 있어라!
“서란다고 서겠어?!”
- 그 말 그대로 돌려주마!
넓은 방 안을 몇 바퀴나 돈 우리는 마침내 엘을 가운데 두고 대치하며 숨을 몰아쉬었다.
“허억, 허억…….”
어째 개비하고 말만 섞었다 하면 유치하게 굴게 되는 느낌이었다. 녀석이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그런가?
개비는 옆구리가 결리는 사람처럼 허리를 굽히며 제안했다. 내장도 없으면서.
- 이, 이제 그만하자.
“나약, 허억, 한 정령 같으니라… 후우… 고…….”
나는 호흡을 가다듬으면서도 호시탐탐 개비를 낚아챌 궁리만 하는 중이었다. 그런 내 손을 엘이 살짝 핥았다.
- 저 녀석도 그만하란다.
까슬까슬하면서도 말랑하고 따뜻한 느낌에 입매가 속수무책으로 풀어졌다. 눈이 마주치자 엘은 개비의 말이 맞는다는 듯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안절부절, 눈치를 살피는 것처럼 자꾸만 앞뒤로 쫑긋거리는 귀가 시선을 끌어당겼다.
‘이렇게 커졌는데도 귀여울 줄이야.’
거거익선은 사이언스였다. ‘왕 크니까 왕 귀엽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던 거다.
“오구오구, 알았어요오. 우리 엘이 그만하라는데 그만해야지.”
엘의 턱을 마구 긁어주자 개비가 부루퉁하게 중얼거렸다.
- 차별이 너무 심한 것 아니냐?
“응? 한 판 더 하자고?”
그건 싫었는지 개비가 크흠, 하고 크게 헛기침했다. 조그맣게 말아 쥔 채 입 앞에 댄 주먹 뒤로 연기가 폴폴 흘러나왔다.
- 아, 아무튼 널 지킬 자가 생겨서 다행이구나. 너는 너무 무모해서 말이야.
“내가 뭘 어쨌다고 다들 나한테 무모하대.”
하지만 개비와 엘은 미처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 응, 아니야.
“크우웅.”
둘의 마음이 척척 맞는 모습을 보자 어이가 없었다. 나만큼 내 목숨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필요할 땐 망설이지 않고 기사들을 부르는 사람이 바로 나인데.
- 너한테 그걸 납득시키려다가는 안 그래도 없는 기운이 다 빨려나가겠어. 난 이만 쉬련다.
그 말을 끝으로 개비는 램프의 지니처럼 벽난로로 쏙 빨려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