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참 나, 뭘 했다고.”
종일 아늑한 벽난로에서 요시초 가지나 태워 먹고 있었으면서 말이야.
나는 에휴, 하고 한숨을 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드디어 엘과 둘만 남자 종일 북적거렸던 주변이 고요해졌다.
그 사실을 인식하자 어깨에서 힘이 빠져나가며 불현듯 하품이 치밀었다.
‘요즘 들어서 피로가 누적된 것 같기는 하단 말이지.’
미뉴엘이 되고 난 후로 이렇게 일을 해본 적도 없는데……. 그러니까 에사디엔에게 선물할 태피스트리를 짜느라 일주일 동안 철야했을 때를 제외하면.
“그건 버렸으려나.”
나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아, 왜 자꾸 떠올리는 거야!”
아무래도 클리데인 때문인 것 같았다. 백 번 생각하는 것보다 한 번 닮은 사람을 보는 게 더…….
“크웅?”
또다시 에사디엔 생각에 빨려들던 중, 엘의 목소리를 듣고 가까스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또냐! 환장하겠네!”
녀석은 내가 갑자기 한탄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 기울이고는 어서 잠옷으로 갈아입으라는 듯 나를 드레스 룸 쪽으로 밀었다.
나는 그 힘에 속수무책으로 떠밀리며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그래, 그래. 잠이나 자자. 잠이나…….”
자고 나면 다 잊히겠지.
그렇게 자기 최면을 걸며 길고 도톰한 잠옷을 입고 나오자 엘이 내 침대 옆 바닥에 길게 엎드려서 기다리는 모습이 보였다.
‘전에는 먼저 올라가서 뒹굴고 있었는데.’
하지만 이제는 내가 침대에 올라가고 한참이 지난 후에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하아.”
이게 뭐라고 또 마음에 걸린다.
나를 태우고 다닐 만큼 덩치가 커졌는데도 내 팔뚝만 하던 시절의 모습을 잊지 못해서였다. 테이블에서 제대로 뛰어내리지도 못해서 지면과 박치기하던 그 모습을.
고민하던 나는 결국 침대 가로 굴러가 아래로 손 한쪽을 내밀었다. 엘도 아직 잠들지 않았던지 곧장 내 손바닥에 머리를 부볐다.
“엘, 올라올래?”
“…….”
엘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내가 녀석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재촉하지 않고, 천천히.
그러기를 잠시, 엘이 몸을 일으켜 침대 모서리에 턱을 올렸다.
‘정말 그래도 돼?’
그렇게 묻는 것처럼 둥글고 커다란 눈이 나를 빤히 응시한 채로 떨렸다.
그 모습을 보자 확신이 들었다. 그냥 내가 너무 예민했던 거다. 동물에 사람을 투영해서 생각하다니.
“그래도 돼.”
엘이 안심하도록 최대한 부드럽게 웃으며 손짓했다. 그러자 주춤거리던 녀석이 천천히 위로 올라와 내 곁에 몸을 눕혔다.
“미안했어, 엘.”
나는 사과하며 엘의 부드러운 배 쪽 털을 매만졌다. 원래 고양잇과 동물은 배 만지는 걸 싫어한다던데, 엘은 배는 물론이고 커다래진 검은색 젤리를 문질러도 눈을 감은 채 목만 울렸다.
그러다 보니 나도 점점 과감해져서 발바닥을 양손으로 잡고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 단단한 것 같으면서도 힘주어 누르면 말랑하게 들어가는 감촉이 중독적이었다.
계속 만지작거리기를 얼마간, 어느 지점을 누르자 숨어 있던 발톱 하나가 쑤욱 모습을 드러냈다.
“우와. 날카로워…….”
작은 낫처럼 예리해 보이는 발톱을 조심조심 만져보자 엘이 지금까지 잡혀 있던 발을 빼더니 이제 그만하고 자라는 것처럼 이마를 핥았다.
키득키득 웃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엘은 몇 번 더 나를 핥아주다가 껴안듯이 조금 전 빼냈던 발을 내 위로 올렸다.
솔직히 꽤 무거웠지만 동시에 아늑한 느낌도 들었다. 엘과 만난 지 이제 백 일이나 되었을까. 함께한 시간이 길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렇게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포근해졌다.
그렇지 않아도 피곤했던 몸은 엘의 온기에 녹아들듯 잠을 받아들였다. 나는 하품과 함께 잠꼬대처럼 중얼거렸다.
“잘 자, 엘…….”
가물가물하던 눈이 마침내 감겼다. 그리고 어디선가 맡아봤던 시원한 향기가 코끝을 스쳤지만 나는 그 정체를 알아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잠에 빠져들었다.
* * *
“미뉴엘.”
낮은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누워 있는 내 어깨를 흔들었다.
잘 자다가 방해받았으니 대답이 곱게 나올 리 없다. 나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짜증을 잔뜩 담아 내뱉었다.
“아, 뭐야.”
“미뉴엘.”
하지만 상대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눈을 꾹 감은 채 손을 마구 휘저어도 그때뿐. 내가 멈추면 바로 다시 깨우기를 반복했다.
“…….”
누군지는 몰라도 가만 안 둔다, 진짜.
이를 갈며 끝내 일어난 내 앞에는.
“미뉴엘…….”
셔츠 한 장만 입은 채 흐트러진 머리를 한 에사디엔이 있었다.
“뭐, 뭐야!”
두 번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반사적으로 에사디엔을 떠밀었다. 그는 이상할 정도로 쉽게 나가떨어졌지만, 나는 그야말로 식겁한 상태라 그에 대한 의문도 떠올리지 못하고 내달리기만 했다.
하지만 다리는 물에 잠기기라도 한 듯 빠르게 움직이지 못했고 모퉁이를 돌 때마다 다른 모습의 에사디엔들이 나타나 나를 뒤쫓았다.
“미뉴엘.”
“미뉴엘!”
웃는 에사디엔, 우는 에사디엔, 무표정한 에사디엔……. 수많은 에사디엔이 내 뒤를 따라 우르르 몰려오는 모습을 보고서야 나는 이게 꿈이라는 사실을 자각했다.
‘그래서 이렇게 느린 거였구나.’
그렇게 생각한 순간, 발밑이 푹 꺼지며 고꾸라진 내 위를 에사디엔들이 매섭게 덮쳤다.
“이런 미친! 비켜요!”
무거워!
하지만 에사디엔들은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각자의 말만 되풀이했다.
“사랑한다.”
“파혼은 하지 않을 거다.”
“보고 싶었다.”
“미뉴엘.”
아, 진짜! 로봇이냐고!
점점 숨이 막혀왔다. 더 견디지 못한 나는 단전에서부터 우러나온 진심을 사자후로 토해 냈다.
“저리 꺼져!”
그 순간, 에사디엔들의 행동이 뚝 멎었다.
“뭐, 뭐야.”
스산한 기분에 몸을 움츠렸지만 이상 현상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정확히 삼 초 후, 내 위를 덮었던 에사디엔들이 동시에 폭발한 것이다.
“…에사디엔!!”
터지는 소리도 없이, 그의 머리카락에 햇빛이 비칠 때마다 보이던 보석 같은 빛 가루들이 내게로 쏟아졌다.
끔찍할 정도로 아름다운 광경이었지만 나는 핏물을 뒤집어쓴 사람처럼 비명을 지르며 꿈에서 깼다.
“아아악!”
옆에 있던 엘도 그 서슬에 놀라서 벌떡 몸을 일으켰고, 바로 몇 초도 지나지 않아서 문이 부서지듯 열리며 데인이 뛰어들었다.
“아가씨!”
눈을 뜨자마자 검만 집어 들고 뛰쳐나왔는지 상의를 입지 않은 채였다. 역시 기사라 그런지 근육이…….
아니, 이게 아니라!
나는 문고리가 덜렁거리는 침실 문을 슬쩍 보며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냈다.
“미안해요. 별일은 아니고… 그냥 악몽을 좀 꿔서.”
“그러셨다면 다행입니다. 물러가 보겠습니다.”
클리데인에게서는 탓하는 기색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더 머쓱해졌다.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정중히 인사하고 돌아갔다.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나는 손바닥에 얼굴을 푹 묻었다.
“왜 도망만 다닌 거야, 바보 미뉴엘.”
어디 있는지는 몰라도 어서 황성으로 돌아가라고 할걸.
꿈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도, 꿈에서 말한다고 에사디엔이 듣는 게 아니라는 것도 잘 알았지만 어쩐지 한탄하게 되었다.
그런 나를 위로하듯 엘이 울었다.
“크웅.”
그런데 낮게 울리는 그 소리가 하필이면 꿈속에서 들었던 목소리와 비슷하게 들렸다. 나는 움찔 몸을 떨며 손을 얼굴에서 천천히 떼어냈다.
“에사…….”
하지만 역시나 내 앞에 있는 건 얌전히 앞발을 모으고 앉은 엘이었다.
“후우.”
나도 모르게 긴장했던 모양이다. 참았던 숨을 내뱉은 순간, 달빛을 받은 엘의 눈 주위로 보석 같은 빛무리가 어룽졌다.
‘…어?’
서둘러 눈을 비벼봤지만 역시나 착각이었다. 터키석 같기도 하고 바다 같기도 한 엘의 눈동자만 빛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대가 좋아할 수 있는 남자가 되고 싶어서.’
왜 하필이면 지금 이 말이 떠오르는 건지.
“아니지, 엘……?”
그리고 나는 또 왜 엘에게 이렇게 묻는 건지.
목소리가 덜덜 떨렸지만 막상 엘은 다시 누워 눈을 감은 채로 깊은숨을 내쉬는 중이었다.
“자, 잠들었나.”
어쩐지 내가 점점 더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사람이 동물로 변하다니. 그럴 리가 없지.
“그래… 그럴 리가 없어. 내가 예민했던 거라고 결론 내렸잖아.”
더군다나 에사디엔이라면 티가 났을 거다. 만에 하나, 아니 백만 분의 일의 확률로 그가 동물이 되었더라도. 그 사람이라면 마음을 숨기지… 못할 테니까.
‘그대를 사랑한다.’
“아.”
갑자기 목덜미가 화끈해지며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신음과 함께 가슴을 짚었다.
“왜… 자꾸 생각나는 건데.”
눈앞에서 사라졌으니 더 빨리 잊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등진 뒤에는 돌아보지 않는 것이 내 신조인데.
그런데 왜 그 사람만큼은 이토록 지우기가 힘든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엘…….”
나는 마치 도피하는 사람처럼 엘의 부드러운 털에 뺨을 부비며 눈을 꽉 감았다.
‘테오가 에사디엔을 찾으라는 명령을 받고 로콰이트로 귀환한다고 했지.’
황성의 상태가 불안한데 에사디엔까지 실종 상태이니 더 신경이 쓰이는 것일지도 몰랐다. 나는 테오도르가 돌아오면 그에게 적극 협조하기로 다짐하며 다 달아난 잠을 억지로 청했다.
* * *
예쁨 받는 백수일 뿐인 내가 그동안 무슨 일로 바빴느냐고? 바로 우리 가문의 기사들을 로콰이트에 데려오는 일이다.
물론 우리 가족이나 저택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라 황성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면 치고 올라가 황제와 황태자의 신병을 확보하기 위한 추가 병력이었다.
문제는 너무 많은 수를 불러 모으면 반역을 준비하는 것으로 보이기에 십상이라는 점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황자 오스틴과 척을 진 상태였다. 카르이넨 본성에서 그가 물러나기는 했어도 우리를 향한 눈길이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만큼은 확실했다.
‘하여간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인간.’
나는 쯧쯧, 혀를 찼다.
내가 이 일을 맡은 건 언니들이 바쁘다는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오스틴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돌이켜보면 내 소중한 백수 라이프를 방해하는 요소는 다 오스틴에게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번에야말로 응징하고 말겠어.’
이를 아득바득 갈며 기사들의 신분을 상단의 일꾼이나 여행객으로 세탁하고, 한편으로는 신분을 바꾸지 않은 기사들도 다른 이유를 대가며 조금씩 로콰이트로 데려왔다.
마포 대교와 원효 대교 사이에 줄 하나 걸어두고 외줄 타기 하는 기분이었지만, 아무튼 병력은 카르이넨을 포함한 영지에서 출발해 하나둘씩 별문제 없이 도착하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오늘 점심은 특별히 카듀렌에서 공수해 왔습니다, 아가씨.”
점심 메뉴를 기대하고 식탁 앞에 앉자마자 흘러나온 집사의 말에 내 어깨가 움찔, 하고 굳었다.
“카, 카듀렌?”
에사디엔하고 놀러 갔던 소도시의 이름 아닌가.
그렇다면.
‘혹시 그건가. 고기 치즈 샌드위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