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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 영애 집착을 시작합니다 (84)화 (84/130)

84화

쥬엘라 언니의 결혼식을 준비할 무렵, 우리 저택에 방문했던 에사디엔이 집사에게 그 샌드위치에 대해 귀띔해 주었다지.

‘허허허. 놀라셨습니까? 황자님께서 아가씨를 생각하시는 마음이 지극하십니다.’

나중에 식탁에 오른 샌드위치를 보고 놀란 내게 집사가 껄껄 웃으며 전말을 알려주었더랬다.

그리고 역시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접시 위에 단정하게 담긴 두툼한 샌드위치를 보며 나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어제부터 참.’

누가 의도한 것도 아닌데 자꾸 에사디엔이 떠오르고 주변에서 접하는 것들이 그를 연상하게 한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샌드위치는 맛있었다. 입에 넣자마자 쭈욱 흘러나오는 육즙이 여전했다.

“여기 샌드위치는 항상 맛있네. 고마워, 집사.”

집사에게 인사하는데 벌써 제 몫을 다 먹었는지 어슬렁어슬렁 다가온 엘이 무릎 위에 머리를 턱 올렸다.

“너는 안 돼. 간이 된 거라서.”

“크웅.”

“밥이 모자랐어? 더 달라고 할까?”

하지만 엘은 그대로 고개를 눕힌 채 눈을 감았다.

움직이지 않을 기세라 어쩔 수 없이 그대로 두고 샌드위치를 반쯤 먹었을까, 다급한 노크 소리와 함께 클리데인이 들어왔다.

“아가씨, 마법 게이트 관리소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무슨 연락인지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오늘은 북부 본성에서 기사들이 오는 날이었지.’

즉 신분을 가리지 않고 카르이넨의 기사로서 들어오는 그룹이었다.

“내가 곧 가겠다고 하세요.”

이제 슬슬 태클이 들어올 때가 되지 않았나, 싶기는 했다. 이전에 말했듯 오스틴이 우리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다면.

“엘, 누나 다녀올게. 너는 방에 올라가 있도록 해.”

엘은 함께 가고 싶어 하는 것처럼 나를 올려다봤지만 목덜미를 긁어주자 이내 얌전히 수긍했다.

현관홀에서 헤어져 천천히 계단을 올라가는 엘의 모습을 보자 안쓰러웠다.

그러나 녀석은 엄연히 덩치 큰 맹수다. 나한테나 품 안에 쏙 들어오던 고양이지, 시내에 데리고 나가는 순간 모르긴 몰라도 거하게 뒤집힐 터였다. 그 소란에 놀란 엘이 어떤 돌발 행동을 할지도 알 수 없고.

‘오늘 저녁에는 많이 놀아줘야겠다. 오랜만에 내 손으로 목욕도 시켜주고…….’

그렇게 생각하던 중 엘이 돌아보았다. 나는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착하다, 우리 엘. 쉬고 있어. 누나 금방 다녀올게.”

이 거리에서 내 말이 들리지야 않을 테지만, 엘은 어쩐지 내 마음을 읽을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녀석은 대답하는 것처럼 입을 살짝 벌렸다가 닫았고, 곧 완전히 위층으로 올라가 모습을 감추었다.

그 꼬리 끝부분까지 모두 보이지 않게 된 후에야 나는 홱 돌아서며 표정을 굳혔다.

“가죠.”

“예, 아가씨.”

이런 일을 대비해 핑계도 생각해 두었다. 그러나 만약 그쪽에서 사람 말을 말 같이 듣지 않는다면 깽판이라도 치겠다고 각오를 다지며 천천히 열리는 문을 노려보았다.

그런데.

“어?”

문 앞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영상 통화, 아니 통신용 수정구를 통해 만난 게 얼마 전인데 그새 얼굴이 더 가무잡잡해진 그 사람은 장난스럽게 휘파람을 불었다.

“휘유, 전장에 나가는 장군님 같으시군요.”

“테오도르!”

나는 반갑게 그의 이름을 외쳤다. 분명 ‘조만간’ 로콰이트로 올 거라고만 했는데 생각보다도 빨리 남부의 일을 인계한 모양이었다.

“외출하십니까? 제가 때를 잘못 맞췄나 봅니다.”

무슨 소리를. 나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냐. 테오야 언제든지 환영이지. 다만 지금은 마법 게이트 관리소에서…….”

거기까지 말한 뒤 입 모양만으로 ‘기사들’이라는 글자를 만들어내자 테오도르는 아, 하고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쪽이라면 저도 함께 가시죠.”

“그래도 괜찮겠어?”

“네. 마법 게이트를 하도 자주 이용하다 보니 그쪽 사람들과 안면이 트였거든요.”

오오. 나는 감탄하며 그와 함께 마차에 올랐다.

“어쩌면 이렇게 꼭 맞춘 듯이 왔어? 고마워.”

“하하. 이렇게라도 도움이 될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미뉴엘 양 덕분에 남부의 상황을 정리하는 데 엄청난 아군이 생겼으니까요.”

훅 들어온 감사에 머쓱해졌다.

“아하하. 내가 뭘 한 게 있다고…….”

“진심입니다. 미뉴엘 양이 아니라면 카르이넨 가문에서 제게 조력해 줄 이유가 없잖습니까.”

테오도르는 우리가 그랬듯이 통신용 수정구를 통해 우리 어머니, 그리고 엘가 언니와 만났다. 우리 쪽은 몬스터들을 방어할 시기와 내 문제가 맞물렸고, 테오도르는 북부까지 긴 여행을 할 핑계도 짬도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면담을 하며 어머니와 언니는 테오도르에게 검사로서, 그리고 기사로서 많은 조언을 해주었다고 한다. 더불어 상단을 통한 원조도 시작되었고.

하지만 그건 테오도르가 진심 어린 태도를 보였고, 또 언니들도 그와 남부를 돕는 게 수지 타산이 맞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터였다.

뭐니 뭐니 해도 트레고스난은 유서 깊은 가문이고, 남부도 사막을 끼고 있는 데다 낙후되었다는 이유로 중앙 귀족들이 은연중에 천시하고 있지만 뒤집어 말하면 아직 개발되지 않은 곳이 많다는 뜻이니까.

…이 모든 생각은 모두 접어두고 나는 단순하게 하하하 웃었다.

“네가 잘해서 받은 거야. 나는 상관없어.”

“상관이 없기는요. 제가 봤을 때는 소공작님과 상단주님 두 분 다 미뉴엘 양의 소개라면 사기꾼이 나타나도 돈은 쥐여주고 내보내실 것 같습니다.”

“그 정도인가.”

언니들이 나한테 좀… 아니, 많이 맹목적이기는 하지. 오죽하면 원작에서 그리 못되게 굴었을 때도 내 편만 들다가 집안이 망했겠어.

내가 머쓱한 표정을 짓자 테오도르는 확언했다.

“‘그런 정도’를 넘어섰지요.”

“흠.”

하지만 한 가지가 걸렸다.

“아무래도 그건 아닌 것 같아, 테오도르. 왜인지 알아?”

“어, 어째서입니까?”

“언니들은 내가 한창 에사디엔을 따라다녔을 때부터 파혼하라고 했거든.”

“…….”

확신과 감사로 가득했던 테오도르의 얼굴이 순식간에 의기소침해졌다. 자식, 그래도 친한 친구라고 제 일이 해결된 기쁨보다 에사디엔 걱정이 앞서는 모양이다.

“황제 폐하께서는 저라면 찾아낼 수 있을 거라고 하셨지만, 영 감이 오지를 않습니다.”

이미 황제가 명령하기 전부터 에사디엔이 갈 법한 곳, 카듀렌은 물론이고 기사 수련을 하며 잠시 지났던 곳까지 모두 수소문을 한 뒤라고 했다.

“머리카락 한 올도 봤다는 사람이 없습니다. 게다가 그 정도는 황실 조사관들도 알아봤겠지요. 대체 어디 계신 건지…….”

“그러게. 많이 답답하겠다.”

“…영혼을 조금만 더 담아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테오도르는 이제 거의 울상을 짓고 있었다. 나는 괜히 궁금하지도 않은 창밖 풍경을 바라보며 부루퉁하게 중얼거렸다.

“파혼한 사이에 뭐 얼마나 더 애틋해야 하니?”

“아직 완전히 파혼하지 않으셨잖습니까.”

“테오도르, 너마저!”

‘브루투스, 너마저!’를 외친 카이사르처럼 배신감을 내비치자 테오도르가 멋쩍게 헛기침했다.

“어흠, 흠. 저는 처음부터 두 분을 응원했으니까요.”

그러면서도 나를 보는 그의 눈동자에는 양쪽 각각 ‘오해였잖아요.’, ‘좋아했잖아요.’라고 똑똑히 쓰여 있었다.

그래, 좋아했지. 분명히.

그리고 에사디엔이 감정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는 동안 나는 딱 내가 좋아했던 만큼 상처받았다. 뒤늦게 그가 매달렸다고 해도 이미 생긴 상처는 사라지지 않는다.

‘하아.’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한숨을 속으로 삼켰다. 그렇게 가리고 가려보려 해도 꿈에까지 에사디엔이 나왔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았다.

‘아주 총체적 난국이구나, 미뉴엘 카르이넨.’

에사디엔이 마음을 못 잡은 것 때문에 틀어졌으면서 이제는 내가 흔들리다니. 더 어이없는 점은 그 사람이 한창 매달렸을 때가 아니라 눈앞에 없으니 비로소 이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게 바로 밀당이라는 건가?

“젠장…….”

뭔가 당한 기분이 들어 혀를 차자 테오도르가 짐짓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저기, 미뉴엘 양이 황자님을 염려하고 있는 건 잘 알겠습니다. 제가 오해했나 봅니다.”

“아니거든. 뭐라는 거야.”

나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뀐 뒤 마차 문을 벌컥 열었다. 때마침 마차는 마법 게이트 관리소에 도착한 참이었다.

‘기사들이 걸린 것만 아니었다면 타이밍이 잘도 들어맞는다면서 웃었을 텐데.’

실없는 생각으로 긴장을 풀려고 애쓰는 한편으로, 나는 테오도르를 돌아보지 않은 채 조용히 말했다.

“감정이 어찌 됐든 그분을 찾는 데 나도 최대한 힘을 보탤게.”

아무튼 에사디엔 본인을 눈앞에 데려다 놓으면 이 마음도 갈피를 잡을 수 있겠지.

“아가씨.”

문을 너무 거칠게 열었는지 클리데인이 조금 놀란 표정으로 다가와 나를 수행했다.

뒤늦게 그의 얼굴을 본 테오도르가 할 말 많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러나 애초에 내가 고른 사람이 아니었으니 할 수 있는 건 어깨를 살짝 으쓱하는 것뿐이었다.

“뭐. 어쩌라고.”

“아닙…니다.”

마법 게이트는 언제 어느 때라도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지금도 카르이넨 가문의 문장과 나의 미모를 보고 점점 더 많은 시선이 쏠리고 있었다.

“카르이넨 공녀님이십니까?”

한눈에 봐도 ‘나 마법사임’하고 얼굴에 써 붙인 듯한 사람이 그 사이를 비집고 다가와 물었다. 우리 기사들이 잠시 이동을 제한시켰다고 진상을 부릴 사람들은 아닌데, 이상하게도 진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상태였다.

“그러하네. 우리 기사들은 어디 있나?”

“사무소 안에서 대기 중입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그를 따라 들어간 사무소 내부는 밝고 깔끔했다. 건물이 주는 인상에 잠시나마 호감을 가지려던 찰나, 마법사가 열어준 문 안쪽을 본 나는 한쪽 눈썹을 매섭게 추켜올렸다.

“저 사람은 우리 가문의 기사가 아닌데.”

아무리 다른 일에 쓰려고 데려오는 거라지만 이름과 얼굴 정도는 다 외워두었다. 하지만 안에 있는 남자처럼 말라깽이에 염소수염을 기른 사람은 단연코 한 명도 없었다고.

“그리고 왜 한 명이지? 저 양반이 다 잡아먹기라도 했나?”

“그…것은 아니옵고…….”

마법사는 이게 추궁인지 농담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땀을 비 오듯 흘렸다. 그러자 그때까지 묵묵히 기다리고 있던 안쪽의 남자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일단 잠시 들어오시지요, 공녀님.”

어쩐다. 잠깐 고민하는 내 어깨를 뭔가가 두 번 툭툭 쳤다.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도록 슬그머니 올린 테오도르의 손가락이었다.

‘그래. 테오하고 올세 경이 있었지.’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아도 언제나 개비의 힘이 내 안에 머물러 있다. 그 말은 언제라도 그를 부를 수 있다는 뜻이다.

- 이제야 나를 떠올리다니, 떼잉.

깜짝이야.

‘너도 왔었어?’

- 조금 귀찮지만 어쩔 수 있나. 허약한 네 몸을 빌려 힘을 다 되찾으려면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아, 예…….

아무튼 지금은 나 혼자가 아니다, 이거야!

나는 오만하게 턱을 치켜올린 채 염소수염 앞으로 걸어가 클리데인이 빼준 의자에 우아하게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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