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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 영애 집착을 시작합니다 (85)화 (85/130)

85화

“…….”

“…….”

약 5초 정도, 염소수염도 나도 입을 열지 않은 채 대치했다.

황족도 아닌 주제에 어찌 감히 대공녀 앞에서 눈을 또옥바로 뜨고 있는 건지. 확 찔러줄까, 하는 생각을 떠올릴 때쯤 그가 입을 열었다.

“명성 자자하신 카르이넨 대공녀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군무성 산하의 병력 관리과장을 맡고 있는 러셀 커닝엄이라고 합니다.”

그가 말하는 내 명성이 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군무성, 병력 관리과?’

처음 들어보는 부서였지만 이름부터 어쩐지 ‘너희 기사들이 이동하는 걸 모니터링 중’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일단 정말 이런 곳이 존재하는 것인지 확인차 유서 깊은 무가의 후손인 테오도르를 흘긋 보자 그가 침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쓰읍.’

황제가 우리 가문의 기사 몇 번 움직인 것 가지고 갑자기 위기감을 느끼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지.

“그래서? 커닝엄 공, 그대가 어째서 카르이넨 가문의 기사들을 억류한 것인가?”

처음부터 강경하게 본론을 들고나올 줄은 몰랐던지 러셀 커닝엄은 잠시 어색한 웃음을 보였다.

“억류라니요. 대공녀께서는 보기보다 성격이 급… 화통하시군요.”

“내 성격이 어떤지 이 자리에서 논할 필요는 없고. 내가 듣고 싶은 건 하나일세. 정상적인 절차를 밟고 마법 게이트를 이용한 우리 기사들을 붙잡은 이유.”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제 쪽에서도 여쭐 것이 있습니다만.”

“뭐지?”

“최근 계속해서 기사들을 로콰이트로 불러 모으시는 이유가 뭔지 말입니다. 지금쯤 카르이넨 대공령은 몬스터 처리에 전력을 투입할 때가 아닙니까?”

정말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점에 대한 짜증과 예상이 맞았다는 데 대한 흡족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아무 감정도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등받이에 여유롭게 몸을 기댔다.

“누가 들으면 사오십 명씩 불러들이는 줄 알겠군. 고작해야 서너 명, 이번에도 여섯 명밖에 오지 않았는데……. 황제 폐하는 물론 황태자 전하께서도 대범하셔서 이런 식으로 자잘한 일에까지 신경을 쓰지는 않으실 터인데 이상한걸.”

“공녀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하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경계하는 자들이 있어 제국의 평화가 지켜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가령 공 같은 사람 말인가?”

“그렇게 봐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참고로 러셀 커닝엄과 나는 어디까지나 온화한 표정으로 대화하는 중이었다. 웃는 눈매 사이로 살기가 튀어서 그렇지.

만약 이 남자가 정말 황제의 사람이다? 그러면 땡큐 포 유어 서비스다, 이거예요. 공무원이 월봉 날로 먹는 게 아니라는데 싫어할 국민이 어디 있겠어.

하지만 말을 나누면 나눌수록 감이 왔다. 이놈은 대쪽 같은 충신이라 고개가 빳빳한 게 아니라 그냥 오스틴과 비슷한 인간이었다.

“아무튼. 우리 기사들은 그대들이 경계할 의도를 가지고 로콰이트에 들어온 게 아니니 안심하게.”

이때를 대비해 준비해 둔 것이 있다. 옆쪽을 향해 가볍게 손을 젓자 클리데인이 품에서 빳빳한 원통형의 지함을 꺼내 러셀 커닝엄에게 건넸다.

“이것이 무엇인지요, 공녀님?”

“보게.”

“설마 이런 자리에서 제게 금전을…….”

“거기서 한마디만 더 꺼내면 나와 카르이넨 가문을 모욕한 데 대한 정식 항의를 황실로 보낼걸세. 증인은 내 옆에 있는 트레고스난 백작 영식이면 충분하겠지.”

무가로 오래 명성을 떨치다 보니 기사 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트레고스난 가문 사람이 많았다. 당연히 그들의 제자는 군부와 기사단 가릴 것 없이 곳곳에 퍼져 있었고.

테오도르를 지금껏 알아보지 못한 것인지 러셀 커닝엄의 표정이 조금 변했다.

“허허. 농담이었습니다.”

농담 좋아하시네. 그냥 제 생각이 그런 식으로밖에 굴러가지 않는 거겠지.

다소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지함을 열고 안쪽 서류를 확인한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신전에 지원을……?”

그건 플렌드나의 사도님께서 직접 자필로 쓰고 인장까지 찍어준 증명서였다. 다가오는 신년제를 위해 카르이넨 가문이 신전에 물자와 인력을 지원 중이라는 내용의.

“자네 말마따나 북부는 지금 한창 몬스터를 처리할 때지. 하지만 이 정도 인력이 빠졌다고 해서 우리가 무너질 거라고 여기는 것은 아니겠지, 커닝엄 공?”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신전에는 성기사들이 있으니 외부의 인원이 필요할 거라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하여…….”

“공은 미처 몰랐겠으나 나는 성인이 되기 전까지 플렌드나 신전에서 성장했다. 때문에 전에 없이 관계가 돈독한 상태이지.”

커닝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서류를 말아 넣은 지함을 클리데인에게 건넸다.

일이 슬슬 마무리되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잠시 긴장을 풀려던 찰나였다.

“……?”

클리데인이 지함 반대쪽을 잡았는데도 커닝엄은 손을 놓지 않았다.

“지금 무슨…….”

“그런데 말입니다, 공녀님.”

클리데인이 잡아당기는 힘을 버티지 못하고 끝내 지함을 빼앗긴 커닝엄이 가벼운 장난을 친 사람처럼 웃었다.

“이러한 사유가 있었는데도 어찌하여 기사들을 나누어 데려오셨습니까?”

허를 찔렸다. 솔직히 말해 이 부분을 물어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해서 입 안쪽 살을 깨무는 내게 다시 한번 질문이 이어졌다.

“이들이 빠져도 전력에는 타격이 없는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멋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병력 관리과를 농락하려는 줄 알겠습니다. 하하, 물론 제가 그렇다는 말은 아닙니다만.”

머리가 팽팽 돌았다. 하지만 연기가 나도록 돌아도 저놈의 입을 닥치게 할 말은 생각나지 않는 것에 절망하기 직전, 테오도르가 입을 열었다.

“나 자신이 기사이며 병력을 지휘한 경험도 있으니 대신 말해 보겠다, 커닝엄 공.”

“듣겠습니다.”

“사람을 다룰 때는 피로도를 감안해야 한다. 특히 전투는 사람을 빠르게 좀먹지. 다만 그 정도는 사람마다 다르니, 내 생각에는 토벌이 한 차례 끝날 때마다 지휘관의 판단으로 기사들을 골라 보낸 것이 아닌가 싶군.”

“그렇다면 낙오자들이라는 말씀입니까?”

비웃는 듯한 반문을 테오도르는 곧장 닥치게 했다.

“혹은 그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자들일 수도 있고.”

나는 바로 그 말에 맞장구치며 생긋 웃었다.

“어머니께서 상황에 따라 몇 명씩 나누어 보내신다고 했을 때는 몰랐는데, 내 생각에도 네 말이 맞는 것 같아.”

커닝엄도 하하 웃었다.

“앞으로는 대공께 이유를 꼭 여쭈어주십시오, 공녀님. 괜한 공무원들이 오해하지 않습니까.”

아, 거 꼬투리 엄청 잡네.

“가주께 반기를 들라는 말인가?”

웃음을 싹 지우고 싸늘하게 되묻자 그는 금세 꼬리를 말았다.

“설마 그렇겠습니까? 우리는 참 오해가 팽만한 세상에 사는 듯합니다, 하하.”

이럴 거면서 왜 자꾸 들이받는 것인지.

“글쎄. 잡담은 이만하고 우리 기사들을 데려가고 싶네만.”

“아, 물론이지요. 제가 모시겠습니다.”

커닝엄이 벌떡 일어나 앞장섰다. 심지어 손수 문까지 열어주는 친절함을 보였다.

‘이 온도 차는 무엇……?’

마지막 말 때문인가. 아니면 의혹을 풀어서인가. 아리송했지만 커닝엄에게 들리지 않게 속삭이는 테오도르 때문에 생각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잘하셨습니다. 제가 따라오지 않아도 됐겠는걸요.”

“아냐. 마지막엔 위험했어.”

의심받지 않게 하는 데만 골몰해서 인원을 나눈 이유를 물을 거라고는 예측하지 못했다.

“덕분에 살았어. 고마워, 테오.”

진심으로 인사하자 그가 환하게 웃었다.

그때였다.

“어, 당신 뭐야!”

“뭐 하는 거야! 진정하고 그거 내려놔요!”

어렴풋하게 들리는 소란에 어리둥절해서 마주 보는 우리와 달리 커닝엄은 이마를 찌푸리며 걸음을 재촉했다.

지금 우리가 있는 지점은 갈림길이었다. 소란은 오른쪽에서 들리고 있었고, 커닝엄이 향하는 방향은 바로 정면이다.

“잠시만, 커닝엄 공. 저쪽에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인데.”

“그쪽은 지키는 담당자들이 있으니 금세 수습될 겁니다. 공녀님께서는 어서 기사들을 데리고 대피하시지요.”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강한 불의 냄새가 나고 있었으니까.

정확히 ‘냄새’라기보다는 예감에 가까웠다. 뜨겁게 달궈진 공기 특유의 텁텁한 냄새가 코끝에 머무르는 듯한 느낌. 개비의 힘이 강해질수록 예민하게 느낄 수 있었다.

전에도 생각했지만 로콰이트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큰불이 나면 답도 없다.

‘그래도 지금은… 내가 있어.’

- 나도 있지.

하여튼 생색내는 데 빠지는 법이 없는 개비 녀석 같으니……. 아, 다 들린댔지.

- 내가 항상 봐주는 줄 알아.

‘어이구. 그래, 그래.’

대충 코대답을 던진 후 커닝엄을 향해 정색했다.

“내가 가보겠네.”

“예?”

나는 그의 얼빠진 반문을 무시하고 곧장 클리데인에게 명령을 내렸다.

“올세 경, 경이 커닝엄 공과 함께 가서 우리 기사들을 데리고 나가요.”

“아가씨, 피하셔야 합니다!”

“나는 테오도르와 함께 갈 테니까 걱정 말아요.”

“하지만, 그렇다면 트레고스난 경보다 저를 데려가십시오. 호위 기사는 저…….”

“올세 경.”

나는 클리데인의 옷을 확 끌어당기며 속삭였다.

“지금 저쪽에서 기다릴 우리 기사들이 믿을 수 있는 건 같은 카르이넨 가문 소속의 기사예요. 나는 테오를 믿지만, 내 믿음을 기사들에게 강요할 수는 없잖아요?”

“아가씨…….”

“그리고 저자가 갑자기 태도를 바꾼다거나 허튼짓을 할 경우, 베어도 좋아요.”

클리데인의 눈이 조금 커졌다. 어금니를 악물었는지 턱선이 도드라지는 것과 동시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경도요.”

나는 그에게 미소 지은 후 테오도르의 팔을 잡아끌었다.

“가자, 테오.”

“어어, 왜 그쪽으로 가십니까!”

갑자기 방향을 튼 나와 테오도르를 커닝엄이 붙잡으려 했지만 클리데인이 재빨리 방해하며 얼렀다.

“당신은 카르이넨 가문의 기사들에게 나를 안내하면 됩니다.”

철컥, 하는 소리에 이어 날붙이 스치는 스산한 소리가 울렸다. 말이 필요 없는 협박에 커닝엄의 목소리도 더는 들리지 않았다.

속이 시원했지만 그들의 기척이 멀어질수록 점점 더 가까워지는 불의 예감에 더해, 솔솔 흘러드는 기름 냄새(이건 진짜 냄새다) 때문에 차마 웃을 수가 없었다.

“미뉴엘 양, 괜찮습니까?”

“…으응.”

점점 짧아지는 내 호흡을 깨닫고 테오도르가 이렇게 물을 정도였다. 괜찮다고 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한 대답으로 넘어갈 수 있었던 것은 그 순간 우리 눈에 들어온 광경 덕분이었다.

‘마법 게이트 관리소’는 말 그대로 수도로 들어오는 수많은 마법 게이트를 총괄하는 곳이다.

실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넓은 공간. 마치 버스 터미널처럼 쭉쭉 이어진 게이트들이 출발 지역에 따라 큰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마법진 위에서 지금 이 순간에도 빛과 함께 사람들이 나타나는 와중, 입구에서 가장 먼 쪽의 마법진 앞에 떡 버티고 선 사람과 마법사들이 한창 대치하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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