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기, 기름 뿌린 건 넘어갈 수 있으니까 그냥 이쪽으로 와요!”
“대체 무슨 일인지 말이라도 해야 알 것 아니오! 억울한 게 있어서 그래요?”
마법사들이 마구 외쳐댔지만 로브를 뒤집어쓴 사람은 말 한마디 없이 묵묵히 버티고 서 있었다. 왜 당장 덮치질 못하는가 했더니 그의 손에는 불이 환히 밝혀진 작은 유리등이 들려 있었다.
‘마법사들이 이렇게 많은데 저 불을 못 끄고 있었단 말이야?’
그렇게 생각한 순간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력이 통하질 않아.”
“아무래도 유리등 자체가 마법 아이템인가 본데.”
젠장.
당장 개비를 부르려던 나는 조금 전의 일을 떠올리고 멈칫했다.
‘한 가지 활로만 생각하지 말고, 다음 반격도 예상해야 해.’
만약 내가 테러, 혹은 방화범이라면 어떻게 할까?
이렇게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면 도망칠 생각 없이 끝까지 가겠다는 거겠지. 그런 사람이 과연 한 가지 방법만 염두에 두고 왔을까?
“…테오.”
테오도르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천천히 자세를 낮추며 오른손을 검 손잡이 위로 옮기고 있었다. 집중을 깨지 않도록 조용히 부르자 그는 녹색 눈동자만 움직여 나를 바라보았다.
“곧 불이 꺼질 거야. 내가 신호하면 사람들이 대피할 수 있도록 해줘.”
“그걸 어떻게 압니까? 마법사들의 말은 저도 들었습니다.”
나는 목소리를 더 낮췄다.
“너도 알잖아.”
“…….”
“정령의 힘.”
“……!”
깜짝 놀란 테오도르가 자세를 풀고 허리를 곧추세우려 했지만 나는 그의 어깨를 꾹 잡아 눌렀다.
“귀가하면서 얘기해 줄게. 저 사람, 하필이면 북부로 통하는 가장 큰 게이트를 노리는 게 이상해.”
테오도르의 얼굴이 단단하게 굳었다.
“무사히, 함께 귀가하는 겁니다.”
“걱정하지 마. 불은 나를 괴롭힐 수 없어.”
말하고 나서 나 스스로도 깜짝 놀랐다. 기척 없이 사람들 사이로 파고드는 테오도르의 뒷모습을 보며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릴 정도로.
‘방금 그거, 내가 한 말 맞아? 개비가 조종한 거 아니고?’
- 계약상 그런 짓은 못 하게 되어 있잖아!
너는 뭐만 하면 나를 의심한다느니, 어쩌느니……. 구시렁구시렁.
이 순간만 기다린 것처럼 마구 투덜대는 개비를 대충 달랬다.
‘아, 미안. 하지만 내가 아는 존재 중에 가장 강하고 신비로운 존재가 너라서 그렇지. 관대한 개비가 좀 참아.’
- 그래, 내가 어지간히 관대해야… 어?
마지막에는 ‘뭔가 이건 아닌데?’ 싶은 듯했지만 일단 넘겼으니 된 거다.
‘불은 나를 괴롭힐 수 없다니.’
내가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전생의 트라우마에서 점점 더 벗어나고 있다는 증거 같아서 놀랍고, 기쁘고…….
- 다 내 덕분인 줄만 알거라!
‘…그래, 그래.’
또 콧대가 높아진 개비에게 대충 대답해 주던 중이었다.
언제 저기를 올라갔는지, 2층 난간에서 테오도르가 머리 위로 동그라미를 그려 보이고 있었다. 그의 곁에서는 나이 지긋한 마법사가 흰 눈썹을 찌푸리고 있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어째 이성적이고 평화롭게 설득한 건 아닌 모양이었다. 하기야 그랬다면 이렇게 빨리 움직일 수는 없었겠지.
‘자, 이제 네 차례야. 개비!’
- 이쯤이야 누워서 요시초 먹기지!
순간적으로 옆에서 강하게 느껴졌던 개비의 존재감이 훅 사라졌다. 동시에 나는 테오도르를 향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후드를 뒤집어쓴 사람이 든 유리등에서 빛이 팍 꺼지는 것과 동시에 주변에 둘러선 마법사들이 움찔했다.
“저게 꺼졌는데 왜 대피 명령이……?”
“이건 무조건 따라야 하는 경보야. 자, 빨리 나가세. 마법진도 전부 멈추고 있어.”
그들의 말대로 마법진마다 앞쪽에 세워놓은 수정구의 불이 하나씩 꺼지고 있었다.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마법사들 사이에서 후드 괴인을 흘긋 바라본 나는 숨을 훅 들이켰다.
그는 수많은 사람 가운데서 정확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놀라서 굳은 나를 마법사 한 명이 잡아끌었다.
“귀족 영애이신가 본데 무례를 용서하세요. 이 안에서 큰일이 일어날 겁니다. 어서 나가야……!”
선량한 마음으로 타인을 구하려는 사람을 책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그를 따라 나갈 수도 없었다.
“먼저 가세요.”
“아니, 이 안에 있으면 위험해질 거래도요!”
알고 있다. 마법진 앞에 홀로 서 있는 저자는 이제 유리등을 집어 던지고 손 모양을 복잡하게 바꾸며 수인을 맺고 있었으니까.
나는 저것을 본 적이 있다. 카듀렌에 있는 마야 황녀의 저택에서.
‘불의 교단이구나.’
왜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나타나는 것인지. 하기야 지금은 오스틴이 로콰이트에 있으니 이놈들이 여기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아무튼 기름을 흩뿌린 곳에서 그 무지막지한 화염 구체를 터뜨리면 대참사가 일어날 것이 뻔했다. 그러면 나를 붙잡은 이 마법사도 다치게 될 테고.
그런 참사를 막기 위해 나는 내가 아는 마법사 중 가장 센 사람의 이름을 빌리기로 했다.
“난 브라시다스 님의 대행자입니다. 곧 그분이 당도하실 테니 걱정 말고 몸을 피하도록 하세요.”
“당신이? 하지만 마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데.”
그야 마력이라고는 한 방울도 없는 일반인이니까요.
하지만 나는 동요하지 않고 자기 최면을 걸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흑염룡도 백 마리는 키우고 있다네.’
넘치는 힘으로 고뇌하는 마법사가 지을 법한 쓸쓸한 미소도 아련하게 머금었다.
“함부로 드러낼 수 없습니다. 모두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아, 최근 대마법사님이 제자를 들였다더니 그게 당신……?”
아니, 그건 아닌데.
‘미안해, 팔로스.’
누나가 앞으로 더 잘해 줄게.
진짜 브라시다스의 제자인 팔로스에게 마음속으로 심심한 사과를 전하며 나는 뻔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분이 오기 전까지 저는 저자를 막고 있을 테니 어서 몸을 피하세요!”
“아직 젊은데, 더 어른인 내가 도움을 주어야 하…….”
“괜찮습니다. 나이 상관없이, 우리는 동료잖습니까!”
“…동료!”
사람 좋은 마법사의 눈에서 불꽃이 화르륵 일었다.
“꼭, 꼭 몸조심하게! 나도 친구들과 밖에서 만반의 대비를 하고 있을 테니 잊지 말게나. 뒤에 우리가 있다는 것을!”
아무래도 내가 이 사람의 열정 버튼을 누른 모양이다. 조금 미안해지려는 찰나 작작 떠들라는 듯이 불덩어리가 맹렬한 기세로 날아왔다.
“흐압!”
마법사가 서둘러 방어막을 쳤지만 힘에 부쳤는지 뒤로 주르륵 밀렸다.
나는 그가 보지 못하는 각도로 손을 뻗어 주변으로 번지려는 불길을 빨아들였고, 순식간에 기세가 죽은 불을 보며 마법사는 ‘역시’ 하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불이 주춤한 것도 잠시, 기름이 여기저기 뿌려진 탓에 기세가 다시 격렬해지는 건 금방이었다. 나는 서둘러 마법사를 완전히 내보내고 문을 쾅 닫았다.
눈을 돌린 몇 초 만에 이미 안쪽은 완연한 화재 현장이었다. 하지만 내가 걸음을 내딛는 곳마다 불은 마치 내게 복종하는 것처럼 수그러들다가 흡수되어 사라졌다.
“오스틴이 시키드나?”
“…….”
기선 제압을 위해 목을 뚜둑, 하고 꺾으며 최대한 험상궂은 표정과 말투로 이죽거렸다.
그러나 그런 내 모습에 움찔하는 것도 잠시, 괴인은 신음 한 번 지르지 않겠다는 듯 입술을 꾸욱 닫은 채 다시 수인을 맺기 시작했다.
“개비, 저 사람한테 정령력이 얼마나 있는 것 같아? 먹을 만하겠어?”
어느새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내 곁에 현신한 개비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 먹어봐야 알겠는걸.
그 말에 괴인의 입매가 파르르 떨렸다. 금세 사라졌지만 그 모습을 놓치지 않은 나도 씩 웃었다.
“당신, 불의 교단 사람이지? 당신들이 숭배하는 ‘순수한 불의 힘’이 바로 이 불의 정령으로부터 비롯됐다는 사실, 알고 있어?”
괴인이 문득 손을 멈췄다.
“…거짓말.”
대화에 응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기에 조금 놀랐지만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눈앞에서 보고도 믿지 못하는 건가? 그렇다면 당신은 ‘불의 신’의 모습을 한 번이라도 본 적 있어?”
계속 말을 유도하면서도 나는 불길이 수정구들에 닿지 않도록 천천히 빨아들였다. 마법 게이트를 유지하는 핵은 마법진이 아니라 수정구라는 말을 들은 적 있기 때문이다.
만약 저 사람 뒤의 마법진이 파괴되면 수많은 사람의 발이 묶이게 된다.
토벌이 끝나면 로콰이트에 오기로 한 어머니와 엘가 언니는 다른 길을 강구해 볼 수 있겠지만, 일반 영지민들은 그러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조심조심 불길을 조절하고 있었건만, 이어진 대답에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순수한 불은 신 따위가 아니다. 이 세상을 정화하기 위한 빛이며, 정화의 날이 올 때까지 우리 땅에 잠든 모래의 신을 부린다!”
“우리 땅이라고?”
이 사람, 남부 끝에서 온 건가.
무엇보다 모래의 신을 부린다니. 나는 개비를 내려다보며 짐짓 감탄했다.
“네가 신을 부릴 줄이야.”
- 저런 헛소리를 믿냐?
“…라는데. 어떻게 생각해?”
친절하게도 괴인의 의견을 물어봐 줬지만 상대는 대화를 할 마음 자체가 없었다.
“감히 불의 전사에게 삿된 손길을 뻗느냐!”
거참.
나는 혀를 차며 그의 공격을 몸으로 맞았, 아니 불길을 열심히 흡수했다.
나도 광신도 따위하고 대화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이놈을 잡아서 정보를 빼내면 오스틴을 무너뜨리기 수월하겠다는 데 생각이 닿았을 뿐이지.
“싸우자는 게 아니야. 진짜 불에 가까워질 수 있는 곳으로 오라는 거야.”
“헛소리! 내가 바로 불의, 불에 의한, 불을 위한 백성이며 전사다!”
“…….”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대체 오스틴은 언제부터 작업했기에 사람이 저 정도로 세뇌되었단 말인가? 사이비 교주로서 적성이 엄청난 놈이었다.
또 상대가 저런 반응이라면 더 설득하는 것도 시간 낭비였다. 차라리 기절시켜서 데려가는 게 낫겠다 싶어진 나는 개비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좀 해봐!’
- 어이가 없구나.
개비는 혀를 차면서도 스르르 모습을 감췄다.
이제 녀석이 해결할 때까지 시간을 끌어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광신도가 기습적으로 수정구 하나에 불덩어리를 던졌다.
“어딜!”
손쉽게 그것을 막아내고 의기양양하게 돌아봤을 때였다.
“헉.”
광신도의 손에 검은 구체가 들려 있었다. 나는 숨을 들이켜며 뒤로 조금 물러섰다.
이 세계는 마법과 신성력을 중심으로 돌아가지만 그렇다고 해서 화학이 하나도 발전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리고 저건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봐도 폭탄이다.
‘불은 흡수할 수 있지만 충격파하고 파편은… 불의 영역이 아니야.’
클리데인이나 테오도르 중 한 명은 곁에 남겨야 했던 걸까.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고 했던가. 이제 피도 토하지 않고 불도 무서워하지 않게 됐는데 이런 상황이 되자 당장 저놈을 막을 수 있는 무력을 바라고 있다니.
- 걱정 마라. 저 정도는 막아줄 테니.
불현듯 개비가 광신도의 뒤쪽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나마 주변에 남아 있던 불길도 그에게 모조리 흡수되며 녀석의 모습이 팔다리를 벌린 날다람쥐처럼 쭈욱 늘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