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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 영애 집착을 시작합니다 (87)화 (87/130)

87화

개비는 그대로 광신도를 덮치려던 심산이었지만 놈은 눈치 빠르게도 폭탄을 휙 내던져 버렸다. 위치를 봤을 때 동부에서 들어오는 마법진 쪽이었다.

- 이런, 쯧!

개비는 혀를 차며 바로 방향을 틀었다.

다행히도 폭탄이 완전히 터지기 직전에 몸으로 감쌀 수 있었지만, 어찌나 아슬아슬했는지 검은 구체에 붉은 금이 간 것이 보일 정도였다.

“휴우.”

너무 긴장해서 참았던 숨을 몰아쉬는 것도 잠시.

꾸우웅!

가로막혀 둔하게 들리는 폭발음과 함께 크게 흔들리는 개비의 모습에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그쪽으로 뛰었다.

어른 주먹 두 개 정도밖에 안 되는 크기이면서 얼마나 위력이 셌던지 개비가 감싼 상태인데도 바닥이 다 울릴 정도였다.

“개비!”

정신없이 달음박질치던 나는 어느 순간 목덜미가 스산해지는 느낌에 두 번 생각하지 않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정말 소름 끼치는 건, 그러자마자 머리 위로 초승달처럼 휜 단검이 지나갔다는 점이다.

“크윽!”

엄청난 타이밍 때문에 내 뒤를 노렸던 광신도도 균형을 잃고 구를 뻔했으나 날렵하게 낙법을 선보이고는 땅을 박차며 내게 막 시위에서 쏘아진 화살처럼 달려들었다.

“정화의 날을 막는 이물질! 이만 모래의 양분이 되어라!”

아니, 오스틴 이 자식이 대체 날 뭐라고 매도하고 다니는 거냐고요.

“으아아악!”

체면이고 뭐고 우렁차게 비명을 질렀다. 건강해졌다고는 해도 기사들처럼 검을 휙휙 피하는 건 애초에 나한테 무리란 말이야!

그래도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는 모양이다. 눈앞으로 날아든 칼날이 마지막 발악으로 내민 손에 붙잡힌 것이다.

“으윽.”

뜨끔한 느낌 뒤로 불로 지지는 듯한 고통이 따라왔지만 목숨이 더 소중했다.

“이… 돌아이야. 넌 죽어서 모래로도 불로도 돌아가지 못할 거야!”

광신도 입장에서는 더없을 저주를 퍼부으며 나는 꽉 쥔 칼날에 어마어마한 열기를 불어 넣었다.

“크아악!”

그런데 이상했다. 분명히 손에 화상을 입을 정도밖에 안 됐을 텐데 광신도는 온몸이 달궈진 사람처럼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뭐, 뭐지? 생각보다 더 출력이 셌나?’

의아했지만 더 머뭇거리지 않고 데굴데굴 구르는 놈의 뒤통수에 구두 굽을 꽂아주었다.

필살, 두개골 구멍 내기!

“으윽!”

잠시 부들부들 떨던 놈은 곧 움직임을 멈췄고, 그제야 나는 땀을 닦으며 한숨과 함께 중얼거릴 수 있었다.

“아아, 이렇게 또 한 켤레의 구두가 갔습니다.”

- 아아, 내 계약자가 이렇게 잔인합니다.

개비가 비틀비틀 날아오며 빈정거렸지만 크게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파편을 막은 데다 모두 녹이기까지 하느라 힘을 많이 쓴 것을 누구보다 내가 여실히 느끼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그냥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고생했어. 이제 남은 불씨하고 정령력만 흡수하고 집에 가자.”

- 오늘은 벽난로에 요시초를 잔뜩 넣어달라고 해야겠다. 내일도!

“그래, 그래.”

광신도의 정령력은 생각보다 얼마 되지 않았다. 고작해야 발목 정도에서 찰랑거리는 힘을 느끼며 굳게 닫아두었던 문을 열자 엄청난 웅성거림과 함께 어마어마한 시선이 내게 쏠렸다.

“나, 나왔다!”

그 모습을 마주하자마자 나는 깨달았다.

‘이거 엄청나게 피곤해지겠구먼.’

하지만 다행히 내게는 테오도르가 있지!

“미뉴엘 양!”

사람들 사이에서 빠져나온 그가 내 이름을 외쳤다. 그 모습을 흘긋 본 나는 별안간 산들바람에도 날아갈 것처럼 연약한 표정을 지으며 이마를 짚었다.

“아……!”

한쪽 무릎을 굽히며 비틀거리는 효과를 주는 것은 덤이었다.

“힘을 너무 소진했… 쿨럭!”

“미뉴엘 양, 대체…….”

테오도르는 아연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득달같이 달려와 나를 안아 들었다. 나는 이 헌신적인 친구에게 다른 사람들 쪽에서 보이지 않는 각도로 속삭였다.

“올세 경하고 우리 기사들은?”

“먼저 보내려고 했는데 버텨서 마차와 함께 대기시켰습니다.”

“좋아. 이대로 기절할 테니까 뒷정리를 부탁한다!”

“예?”

당연하게도 테오도르가 추가적인 설명을 요구했지만 나는 예고한 대로 몸을 축 늘어뜨리며 기절한 척했다.

“미뉴엘 양.”

“저, 트레고스난 경, 어린 마법사는 괜찮은 겁니까?”

앗, 아는 목소리였다. 마지막까지 나를 데리고 나가려던 사람 좋은 아저씨.

나는 실눈을 뜨며 테오도르를 톡톡 쳤다.

“테오, 저 아저씨 이름 물어봐 줄래? 그리고 공작가로 찾아오라고 해.”

“…아는 사람입니다. 나중에 연락을 넣을게요.”

오오. 하긴 여기 사람들하고 안면이 있다고 했지.

내가 다시 기절한 연기를 시작하자 테오도르가 몸을 돌려 마법사에게 답했다.

“미… 아니, 이 사람은 괜찮다. 미안하지만 할아버님께 뒤처리를 부탁드린다고 전해 주겠나?”

“예?”

아니, 이 대화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은데요.

그때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어마어마한 노호성이 들렸다.

“테오도르 트레고스난!! 너 이 녀석!!”

“그, 그럼 잘 부탁한다!”

테오도르가 정말로 다급하게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변에서 사람들이 어어, 하고 놀라는 소리, 누군가를 말리는 듯한 소리에 이어 클리데인의 목소리가 들리고, 마차에 우악스럽게 올라타는 느낌이 이어졌다.

문이 탕 닫히는 소리와 동시에 나는 눈을 반짝 떴다.

“트레고스난 집안에 마법사인 분이 계셨어?”

“제일 먼저 물어보시는 게 그겁니까?”

그러면서도 테오도르는 하아, 하고 깊은 한숨을 쉰 뒤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외할아버님이십니다.”

“그렇구나. 나중에 선물이라도 보내야겠는걸.”

신발이 없어 허전한 발을 꼼지락대다가 말을 이었다.

“많이 놀랐지?”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미안해. 아무래도 오늘 너한테 해줄 이야기가 많겠어.”

점심때가 조금 지나서 외출했는데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흘렀는지. 벌써 해도 거의 다 져서 붉은 빛의 끝자락만 남은 상태였다.

나는 그 빛을 홀린 듯 바라보다가 마차가 멈추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아, 미안해. 너무 멍하니 있었네.”

“피곤하신 듯합니다. 저는 나중에 다시 오는 편이 낫겠어요.”

“아냐. 피곤하기는 한데, 뭐랄까……. 그것 때문이라기보다는 뭔가 기분이 이상해서.”

변명이 아니라 정말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아까 빗나간 칼날이 다시 날아오기라도 할 것처럼 좋지 않은 예감이 든달까.

하지만 나는 근질거리는 목덜미를 한 번 문지르는 것으로 털어내 버렸다. 그러고는 현관으로 폴짝 뛰어내리며 테오도르에게 웃어 보였다.

“저녁 먹으면서 얘기하자, 테오.”

“정말 괜찮겠습니까?”

내가 구두 없이 스타킹만 신은 것을 알아차린 하녀들이 부산스럽게 슬리퍼를 가져다주었다. 나는 폭신한 슬리퍼 안에 발을 집어넣으며 테오도르를 잡아당겼다.

“그러엄. 아, 나한테 반려동물이 생긴 거 몰랐지? 본성에 돌아가기 직전에 우리 집에 들어왔거든.”

“그러셨습니까? 무슨 동물인데요?”

“으음…….”

글쎄다, 엘을 대체 무슨 동물이라고 해야 할지.

계단을 다 올라갈 때까지도 정확히 답을 하지 못하는 나를 보며 테오도르가 조금 질린 표정을 지었다.

“정령만큼은 아니겠지만… 또 어마어마한 걸 키우시는 건 아니겠지요?”

“아니거든. 얼마나 귀여운데? …늠름하고.”

“늠름?”

“백 번 들어도 한 번 본 것만 못하댔어. 일단 한번 봐.”

나는 방문을 벌컥 열어젖히며 엘을 불렀다.

“엘, 누나 왔어. 늦어서 미안!”

방 안은 불을 밝히지 않아 어둑어둑한 가운데, 실낱같은 노을빛을 맞고 있던 엘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미뉴엘, 무사히 다녀왔…….”

반갑게 다가오며 입을 열었던 엘도, 그를 안아주려 몸을 숙이려던 나도, 역시나 상상을 뛰어넘는 반려동물에 놀라던 테오도르도.

모두가 딱딱하게 굳었다.

‘에사디엔.’

그 사람의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려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뚝 멎은 숨소리로 미루어 볼 때 테오도르도 그리 생각했음이 분명했다. 나보다 그가 더 그 목소리를 오래 들었으니까.

“…….”

누구 하나 섣불리 숨조차 내뱉지 못할 침묵이 이어지는 가운데, 마지막 남은 빛이 사라졌다.

엘이, 아니 지금껏 내가 엘이라고 이름 붙이고 애정을 주었던 것이 비명 같은 신음을 내지른 것은 그때였다.

“크, 흐윽.”

보이지 않는 손이 그것의 목과 엉덩이를 동시에 잡고 쭉 늘린 것처럼 몸이 휘었다. 더불어 우둑, 우둑, 하고 뼈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에 나도 모르게 입을 가리며 물러섰다.

테오도르는 그런 내 앞을 가리며 섰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뭘 키우신 겁니까?”

“나, 나도, 나도 몰라…….”

눈앞이 어지럽게 흔들리며 귀에서 이명이 들렸다. 한순간 다리에서 힘이 풀렸지만 가까스로 버티며 나는 다시 중얼거렸다.

“나도 몰라.”

내 품에 안고 치료했는데. 밥을 먹이고, 씻기고, 침대에서 함께 기대 자고는 했는데. 심지어 저 아이는 나를 구하기까지 했는데.

하지만 충격받은 감성과 반대로 이성은 차갑기만 했다. 이성이 뇌리를 얼릴 것처럼 속삭였다.

‘정말 몰랐니?’

처음 엘을 본 라망드가 학을 떼면서 싫어했을 때, 개비가 엘과 무언가 이야기하다 입을 다물었을 때.

눈 덮인 정원에서 에사디엔의 목소리가 들렸다고 생각했을 때, 그의 향기가 느껴졌을 때.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며 넘겼던 그 모든 순간은 비로소 와르르 무너지는 진실이 되어 나를 덮쳤다.

거기에 짓눌려 압사할 것 같다고 생각했을 때, 테오도르의 커다란 손이 내 어깨를 강하게 붙잡았다.

“정신 차려, 미뉴엘!”

“…테오.”

테오도르가 내게 말을 놓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렇게까지 정색한 것도. 얼굴이 희게 질릴 정도로 놀랐으면서 나를 챙기는 마음이 여실히 느껴졌다.

그는 검을 뽑으며 동요가 드러나지 않도록 높낮이 없이 말했다.

“나가서 기사들과 사제를 불러. 만약 저것이 황자님을 흉내 내는 삿된 것이라면 조용히 처리해야 하니까.”

삿된 것이라니. 최소한 그럴 리는 없다고 하려 했지만 목구멍이 말라버린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 지금까지 조용히 있던 개비가 나섰다.

- 저건 삿된 존재가 아니다.

어둠 속에서 홀로 활활 불타는 존재가 말하자 테오도르도 어떻게 확신하느냐고 반박하지 못했다.

개비는 씁쓸한 얼굴로 손가락을 튕겼고, 그 즉시 방 안의 모든 초와 벽난로에 불이 붙으며 어둠이 사라졌다.

어둠이 물러나면 두려움도 함께 걷힌다.

어느 틈엔가 뼈가 어긋나는 듯한 소리는 멈췄고, 엘이 있던 자리에는 에사디엔이 고통 끝에 정신을 잃은 채 쓰러져 있었다.

- 저 인간은 에사디엔 로콰이트라고 한다. 너희가 아는 그 인간.

이제는 더 이상 부정하지 못할 현실 앞에서 개비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 쫓아낼 테냐?

그 말에 착잡함과 놀라움, 얼떨떨함이 섞인 표정으로 에사디엔을 내려다보던 테오도르도 나를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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