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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 영애 집착을 시작합니다 (88)화 (88/130)

88화

“하아.”

나는 한숨을 쉬며 이불 위에 올려진 담요를 가져와 에사디엔의 몸 위에 덮었다. 그러고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그의 곁에 무릎 꿇은 테오도르에게 포션을 건네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 정도로 못돼 먹지는 않았거든? 사람을 뭐로 보고.”

나처럼 악역에서 멀어지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정신 차리면 테오, 네가 황성으로 모셔 가도록 해.”

“그건 안 돼.”

그렇게나 걱정했던 에사디엔을 되찾았고, 황제에게서 받은 임무도 처리할 수 있게 되었는데도 테오도르의 얼굴은 어둡기만 했다.

“뭐?”

“오늘 마법 게이트 관리소에서 있었던 일. 왜 그들이 다른 지역에서 ‘병사를 보낼 수 있는 통로’를 없애려고 했을까?”

테오도르는 오스틴이 일을 저지를 순간이 임박했다고 말하는 거였다.

“하지만 그렇다면 더욱더 에사… 아니, 황자님을 돌려보내야지. 황제 폐하와 황태자 전하께서는 황자님을 아끼시니까 이황자를 몰아내라고 설득할 수 있을 거야.”

“이황자님은 대사로 몇 년을 지냈어. 능구렁이 천지라는 외교 무대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을 황자님이 말로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아니요.

에사디엔은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이었다. 그 사실을 떠올린 우리는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더군다나 증거도 없으니.”

“그래서 우리가 지금 숨죽이고 있는 거고.”

사람 마음은 참 간사하다.

빨리 에사디엔이 발견되었으면 좋겠다며 테오도르를 지원하겠다고 생각한 것이 바로 어젯밤인데, 막상 눈앞에 그가 보이자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가 문제였다.

그를 보고 싶니 아니니 하는 문제는 더 큰 문제 때문에 생각나지도 않았다. 아니, 사실 아직도 얼떨떨하기만 했다.

‘엘이 에사디엔이라고.’

다시 한번 되뇌어봐도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것만 같았다.

“미뉴엘.”

천천히 에사디엔에게 포션 한 병을 다 먹인 테오도르가 조금 미안한 낯으로 나를 불렀다.

“왜, 왜 그러는데.”

어째 불길한 예감에 나는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튀어나왔다.

“황자님을 부탁해. 우리 집에는 외부인이 많이 들락거려서.”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게다가 한껏 미안해하면서도 씰룩거리는 저 입꼬리! 뭔가 선수를 빼앗겨서 거하게 당하는 듯한 기분에 목덜미를 붙잡았다.

“저기요? 갑자기 이러시기 있음?”

“그렇잖아. 우리 저택에 비교하면 카르이넨 대공저는 난공불락의 철옹성이지, 암.”

하아아. 물론 우리 집에 들락거리는 사람이야 쥬엘라 언니의 심복 몇 명뿐인 건 맞는데.

‘저는 처음부터 두 분을 응원했으니까요.’

이 말이 걸린단 말이지.

“테오, 설마 이 인… 아니, 이분이 날 속였는데도 응원하려는 건 아니지?”

“에이, 서얼마 그러겠어.”

“그런데 왜 나를 똑바로 보질 못하니.”

이를 갈며 주먹을 꽈악 말아 쥐자 기겁한 테오도르가 몸으로 에사디엔을 가렸다.

“포, 폭력 반대!”

뭐라는 거야? 이 폭력이 만연한 시대에.

“야, 일단 네 직업부터 기사 아니니?”

“기, 기사는 지키기 위한 직업이야!”

“무력이 있어야 지킬 거 아냐. 좀 비켜보라니까?”

“미뉴엘, 너 주전파였어?”

“아니거든!”

급기야 서로 뇌를 거치지 않고 말하기 시작했다. 아수라장이 되기 직전, 에사디엔이 눈썹을 찌푸리며 신음을 흘렸다.

“으음…….”

작은 소리였는데도 테오도르와 나는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입씨름을 멈췄다.

깨어나려나 싶어 잠시 기다렸지만 자잘하게 반짝거리는 속눈썹은 들어 올려지지 않았고 테오도르는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며 내게 물었다.

“혹시, 정말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화난 건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황자님을 고문하면 안 되는 거… 알지?”

대체 사람을 어떻게 보는 건지. 나는 어이가 없어서 팔짱을 끼며 되물었다.

“그럼 뺨 한 대 때리는 것 정도는?”

“안 돼. 황족 상해는 사형이야.”

“쳇.”

진심으로 아쉬워서 혀를 찬 뒤였다. 다소 갈라진 목소리가 늦은 대답을 건넸다.

“괜찮다.”

에사디엔이 눈을 뜬 것이다.

테오도르의 부축을 받아 몸을 일으킨 그가 식은땀이 배어난 얼굴로 쓰게 웃었다.

“그대가 때리는 거라면 얼마든지 맞지. 사실 맞을 만한 짓을 하기도 했고.”

“…됐습니다.”

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에사디엔이 일어나 앉으면서 담요가 흘러내린 탓이다.

‘어우야. 맨날 집에서 누워 있기만 했으면서 어떻게 근육이 여전하지?’

아니, 이게 아니지.

‘심지어 올세 경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이쪽이 훨씬 더…….’

아니, 이것도 아니지! 미쳤냐, 미뉴엘 카르이넨!

저걸 안 보려면 차라리 돌아서야지, 하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마치 내 마음을 읽은 듯 에사디엔이 허리를 더 곧게 세웠다.

당연히 담요는 더 아래로 흘러내렸고, 조금 전 눈을 돌려야겠다고 생각했던 나는.

“으아.”

분명 그렇게 생각은 했는데요.

전거근에 무슨 자석이라도 달렸는지 속수무책으로 시선을 뺏겨버렸다.

“미뉴엘.”

“에, 예?”

그러다 얼빠진 소리까지 내버린 나와 달리 에사디엔은 몸이 드러나는 것 따위 신경 쓰이지 않는 사람처럼 단정한 표정으로 진지하게 말했다.

“라망드 사제도, 정령께서도 너에게 빨리 사실을 말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두려워서 차일피일 미룬 것은 나이니 둘에게 너무 분노하지 말았으면 한다.”

“…둘에게 뭐라고 하든 그건 제가 알아서 할 일입니다.”

“그대의 말이 옳다.”

차분함을 가장하던 에사디엔의 눈이 흔들렸다. 그 모습이 조용하게 눈물만 뚝뚝 흘리던 엘과 겹쳐 보이기 시작하자 나는 더 견딜 수 없어져 돌아서고 말았다.

“지내실 곳을 마련하겠으니 잠시 기다리세요.”

마음 같아서는 지붕 밑 다락방, 아니 계단 옆 창고도 아까웠지만 우리 가문에서는 하인도 그런 곳에서 지내게 하지 않는다. 하물며 에사디엔은 황족인데.

인기척 없는 복도를 성큼성큼 걷노라니 막상 이 일을 쥬엘라 언니에게 어떻게 말하나, 싶어졌다.

내가!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짐승이! 파혼 상대라니!

이건 정말이지 평생 이불을 차도 사라지지 않을 대망신이었다.

‘다들 뭐라고 생각할까. 부모님은? 엘가 언니는?’

하……. 아버지하고 쥬엘라 언니는 몰래 에사디엔을 암살할 방법을 강구할지도 몰랐다.

세상에. 둘의 성격상 실패할 계획은 짜지 않을 테고, 만에 하나라도 그 사실을 황제에게 들키는 순간.

“멸문 엔딩…….”

그것만은 안 된다. 내가 그걸 막으려고, 다른 말로는 평생 마음 편히 놀고먹으려고 테오도르랑 결혼도 안 했는데 하필이면 황자랑 얽혀서는!

‘아이고, 내 팔자야. 아이고, 아이고.’

나는 엉엉 울며 벽에 머리를 쿵쿵 찧었다.

“무슨 엔딩?”

조금 가라앉은 쥬엘라 언니의 목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내가 어느새 언니의 집무실 앞에 도착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 언니.”

“미뉴엘, 식사하러 내려오지도 않더니 갑자기 여기서 뭐 하는 거니?”

내 턱을 잡고 요리조리 살펴보던 언니가 갑자기 표정을 확 굳혔다.

“혹시 트레고스난 영식이 무례라도 저질렀니? 내일 당장 그쪽 집안 부동산을 다 뒤집어 줄까?”

얼토당토않은 협박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듣자 긴장이 조금이나마 풀리며 입술 사이로 실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기디온 형부가 질색하는 언니의 농담 중 하나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상식 없는 짓 할 애가 아닌 거 알면서 왜 그래.”

“그러면 우리 아기가 왜 이렇게 울상인데.”

“그게…….”

한동안 망설이던 나는 에라 모르겠다, 하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시시각각으로 싸늘해지다 못해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언니의 얼굴을 더 지켜볼 수 없어 중간부터는 바닥만 쳐다봤지만.

* * *

당연히 집안은 발칵 뒤집혔다. 하지만 지난번에 에사디엔이 미쳤다고 오해했을 때와는 다르게 우리 가족들만 아는 물밑에서의 소란이었다.

에사디엔은 아무것도 숨기지 않고 쥬엘라 언니가 묻는 대로 모두 털어놓았다.

왜 갑자기 모습을 감추었는지, 어떻게 짐승으로 변했는지.

그러나 언니는 그에게 왜 우리 저택으로 왔느냐고 묻지 않았다. 나는 그 부분이 못내 아쉬웠지만 차마 끼어들 수가 없었다.

“당장은 황성으로 돌아가지 않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유는 그간 조금이나마 들어서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알고 있다.”

“그러면 이런 거처를 내어드리는 것도 양해해 주십시오.”

냉랭한 언니의 말에도 에사디엔은 담담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충분히 이해한다.”

에사디엔은 급하게 구한 옷을 입은 채 결코 넓다고 할 수 없는 방 한가운데 놓인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이곳은 예전 대공가의 자식들이 말을 듣지 않으면 사용하던 ‘반성의 방’이라고 했다. 면적이 좁은 대신에 천장을 튼 것처럼 층고가 높아 답답함은 덜했고 직계들이 사용했던 곳이라 치장이 고급스러웠다.

하지만 반성을 위한 방인 만큼 창문은 사람 키보다 훨씬 높은 곳에 붙어서 밖을 내다볼 수 없었다.

게다가 출입구도 단 한 군데, 그것도 공작의 집무실에서만 들어갈 수 있는 구조였다.

‘엄마가 태어나시기도 전에 닫힌 곳이랬지.’

그런데 에사디엔으로 인해 다시 열리게 되었네.

나는 언니에게 들리지 않도록 작게 한숨을 쉬었다.

침대도 작지 않다지만 그래봐야 청소년용이라 에사디엔이 누우면 다리가 삐죽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 모습을 상상하자 웃긴 것이 아니라 어쩐지 입맛이 썼다.

팔짱을 꼈던 손을 들어 입가를 가리려는데 문득 에사디엔과 눈이 딱 마주쳤다.

‘계속 쳐다보고 있어.’

에사디엔은 시야 내에 내가 있으면 이쪽으로만 시선을 주었다. 그가 엘과 동일한 존재라는 사실을 또 한 번 사무칠 정도로 느끼게 하는 점이었다. 엘도 나와 함께 있을 때면 오로지 나만 따라서 고개를 움직였으니까.

쥬엘라 언니가 그런 에사디엔의 시선을 몸으로 가로막으며 한층 더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 같아서는 지하 감옥을 혼자 쓰게 해드리고 싶은데 말입니다.”

언니가 독설을 내뱉을 때의 목소리 울림은 정말로 무서운 데가 있어서, 테오도르는 물론 나까지도 몸을 움찔 떨었다. 그러나 에사디엔은 잠시 울적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을 뿐이다.

“…미안하군.”

쓸쓸한 목소리로 읊조린 사과는 이렇게 상황이 다다른 모든 이유에 대해 보내는 것이었다.

분위기가 한층 더 침울해지려던 차에, 테오도르가 에사디엔과 잠시 독대하고 싶다고 부탁했다.

덕분에 나는 쥬엘라 언니와 함께 에사디엔의 시선을 피해 어머니의 집무실에 앉아 잠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미뉴엘.”

“…응?”

딱히 떠올리는 생각도 없는데 머리가 멍했다. 그런 탓에 한 박자 늦게 대답하자 언니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 뺨을 어루만졌다.

“왜 네가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거니.”

“내 표정이 어떤데?”

의아해서 물었지만 언니는 한숨만 한 번 쉬고는 바로 주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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