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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 영애 집착을 시작합니다 (89)화 (89/130)

89화

“오늘 낮에도 큰일이 있었다면서.”

“으응. 보고받았구나.”

“기사들이 못 오고 있다면 나가기 전에 나한테 말하지 그랬어.”

“하지만 언니는 바쁘고…….”

어물어물 말을 이으려던 나는 입을 다물었다.

꺼내려던 말을 되짚어 보면 다 위선이다. 나는 그렇게 성자 같은 인물이 아니다.

“오늘은 내가 현장에 있는 것이 최선이었어.”

마법 게이트가 무력화될 위기를 맞았을 때 가장 먼저 떠올렸던 것은 소상인들의 피해였지만, 결국 나중에 생각해 보면 나를 움직인 가장 큰 이유는 이것이었다.

‘황제의 신병을 확보하는 데 변수가 생긴다.’

나는 손가락 괴롭히기를 그만두고 편안하게 소파 가장자리를 짚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언니, 나는 말이야. 별 허접스러운 것이 내 일을 방해하면 짜증이 나.”

오스틴과 척을 진 것은 어째서인가.

사랑하지도 않는 주제에 결혼하자고 해서? 인간성이 너무 별로라?

아니다. 정령의 힘을 돌려두고 편하게 살아보려는 목표를 방해했기 때문이다.

“언니들도, 엄마도 다 그렇잖아. 그렇지?”

부모님과 언니들도 평온함에 가려진 나의 이런 면을 애초부터 읽고 ‘카르이넨답다’고 했겠지.

눈을 동그랗게 뜨던 언니는 이내 피식 웃었다.

때마침 테오도르가 나오는 바람에 더 말은 하지 않았지만, 대견하게 여기는 듯도 하고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한 눈빛이었다.

그대로 돌아선 언니는 반성의 방 문을 단단히 걸어 잠갔다.

“이 안에 있으면 사실이 흘러나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식사도 주방에 설치된 마법진으로 올라갈 테니까.”

“언니, 솔직히 말해 봐. 이거 반성용 아니고 감금 방이지?”

“후후. 옛날 사람 생각을 내가 어떻게 알겠니.”

그런데 왜 그렇게 음침하게 웃으시죠?

집무실에서 빠져나오며 잔뜩 미심쩍은 눈초리로 바라보았지만, 언니는 끝까지 아니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미뉴엘!”

그때 저 앞에서 가쁜 숨을 내뱉으며 라망드가 계단을 뛰어 올라왔다.

‘오늘 하루 신전에서 일을 돕는다고 했지.’

이제야 귀가한 모양인데, 아까부터 개비의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싶더니 라망드가 들어오자마자 에사디엔의 일을 귀띔해 준 것이 분명했다.

“…….”

나는 입을 꾹 다문 채 라망드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그의 곁을 지나쳤다. 냉랭한 분위기에 잠시 당혹스러워하던 테오도르가 그에게 눈인사만 건네고 내 뒤로 따라붙는 것이 느껴졌다.

라망드의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돌아볼 생각은 없었다.

귀여운 모습으로 나를 현혹한 에사디엔에게, 그리고 누구보다도 그런 것에 속은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하지만 사실을 알면서도 입을 다문 라망드나 개비를 향한 화살이 비껴나간 건 아니었다. 특히나 라망드에게는 배신감이 들 정도였다.

‘그래도 내가 자기랑 10년을 지냈는데.’

둘도 없는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나보다 에사디엔에게 의리를 지키다니.

이제 전처럼 종일 둘이 붙어서 살지 않으니까 라망드에게도 내가 모르는 일이 생길 수 있다. 그걸 처음 깨달았을 때는 조금 불안했지만 곧 받아들이게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건 너무 심하잖아.

“오늘 정말 고생 많았어, 테오.”

정말, 괜히 나한테 인사하러 왔다가 종일 사건에 휘말리느라 고생이 많았다.

“남부보다 여기 돌아온 하루 동안 겪은 일이 더 많은 것 같네.”

“너스레는.”

내가 작게 웃자 따라서 웃음 짓던 테오도르는 이내 진지하게 눈썹을 모으며 말했다.

“황자님을 잘 부탁한다.”

“고문하지 않을게. 걱정하지 마.”

“그런 뜻이 아니라…….”

“그만, 테오.”

나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조금 가라앉은 내 분위기를 보고 테오도르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 정도껏 끼어들어야겠지.”

천천히 돌아서 마차에 올라타는 모습도 기운이 없어 보였다. 나는 미안한 마음에 그의 마차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서서 배웅했다.

“하아, 이제는 진짜 파김치가 된 것 같아.”

제발 쉬고 싶다.

그렇게 중얼거리며 돌아왔더니 이번에는 라망드가 내 방 앞에서 어두운 얼굴로 주먹을 말아 쥔 채 서 있었다.

“미뉴엘.”

“비켜줄래? 지금 엄청나게 피곤하거든.”

“…….”

차갑게 말하자 라망드는 천천히 옆으로 물러났다.

그에게 이렇게 군 적이 거의 없었으니 화를 내면서도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그래서 이대로 끝나겠구나 싶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문을 열려던 찰나.

타악.

뒤에서 라망드의 손이 뻗어 나와 문고리를 쥔 내 손을 잡아당겼다.

“뭐, 뭐야. 이거 놔.”

“차라리 화를 내. 나를 때리기라도 하라고.”

아니, 에사디엔이고 라망드고 왜 다짜고짜 때리라는 거야. 평소 내 이미지가 그 정도였나?

“내가 왜? 널 때리면 너보다 내 손이 더 아플 텐데.”

“이렇게 굴면 내 마음을 때리는 거나 마찬가진데, 네 마음은 안 아파?”

“…….”

대체 어디서 이런 말을 배워 오는 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살짝 소름이 돋은 팔을 쓸어내리는데 라망드가 손을 더 꼭 잡아왔다.

“미안해.”

어색해하는 나와 달리 라망드는 웃음기 하나 없이 진지하기만 했다.

“미안해, 미뉴엘.”

그가 진심이라는 것을 깨닫고 내 목소리도 조금, 아주 조금 누그러졌다.

“대체 왜 나한테 말을 안 한 거야?”

“내보내라고 했잖아.”

“그렇게만 말하면 내가 어떻게 알아? 그때 엘… 아니, 그 사람은 그냥 작은 동물로만 보였는데.”

“증거를 보일 수가 없었으니까.”

진중하게 가라앉았던 라망드의 얼굴이 조금 일그러졌다.

“그 저주인지 뭔지, 차라리 신성력으로 없앨 수 있었다면 그때 당장 네 눈앞에서 보여주고 쫓아냈을 거야.”

그때 생각을 하자 분한 기분이 다시 느껴졌는지 그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안 되더라고. 내 능력에 회의가 들었어.”

그 말을 듣자 라망드가 조금 안쓰러워졌다.

미래의 대신관감이라고 능력을 칭찬받기만 했는데 신성력이 통하지 않는 저주를 마주하고 얼마나 놀랐을까. 사실 에사디엔은 저주가 아니라 약의 부작용 때문에 변신한 거였는데.

“그리고 넌 생각보다도 더 ‘엘’을 좋아했고.”

그렇게 말한 직후였다.

왜인지 라망드가 놀란 표정을 짓더니 나를 끌어당겨 꽉 안았다. 기댄 그의 어깨가 조금 축축해지고 나서야 나는 내가 울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라망드의 말이 맞는다. 나는 엘을 좋아했다.

마치 첫눈에 에사디엔에게 반했던 것처럼 엘도 만난 바로 그날 내 마음을 가져가 버렸다.

작았을 때도, 커졌을 때도, 몸집의 크기와 관계없이 귀엽기만 했고 나를 따르는 그 애가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미안.”

라망드가 천천히 등을 도닥이며 사과했지만 나는 매몰차게 그를 밀어냈다.

“됐어. 쉬고 싶어. 이제 가.”

아니, 마음은 그랬는데 밀려나지를 않았다. 라망드가 이렇게나 힘이 셌던가?

“싫어.”

그는 도리어 나를 더 꽉 껴안으며 어림도 없다는 듯 말했다.

“오늘 밤은 같이 있어줄게.”

“필요 없어. 내가 벌써 널 다 용서한 것 같지, 너는?”

“그거하고는 관계없어. 내가 너를 몰라?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댔어. 미뉴엘 너… 밤새 엘 생각 나서 헛헛해할 거잖아.”

“야!”

이 말은 그냥 넘길 수 없었다. 나는 숨까지 참아가며 온 힘을 모아 라망드를 떨어뜨렸다.

“웃기지 마! 내가 그렇게 바보인 줄 알아?”

“바보가 아니라도 그건 당연한 거야.”

“아냐. 절대로 아니야. 아니라고!”

나는 아득바득 부정했다. 라망드의 고집도 나 못지않았지만 결국 언제나 그랬듯 우리 둘 사이의 승자는 나였다.

하지만 그렇게 억지로 라망드를 보낸 나는 어이없게도 침대에 눕자마자 실소를 흘렸다.

“짜증 나, 라망드 플렌드나. 어떻게 나를 그렇게 잘 아는 건데…….”

분하게도 라망드의 말이 맞았다.

침대뿐만 아니라 방 안 곳곳에서 엘과의 기억이 떠올랐다. 시트를 갈다가 흘렸는지 베개 밑에 딱 한 올 남은 금빛 털을 발견했을 때는 차마 버리지도 못하고 서랍 안에 고이 넣어두었다.

나는 그렇게나 바보였다.

* * *

“무슨 일이라도 있니?”

사도님이 걱정스럽게 물으셨다.

‘바보 미뉴엘 카르이넨이 오늘 아침에도 침대 위를 한참 더듬고 나서야 더 이상 엘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거든요.’

하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할 수는 없었으니 피곤한 눈두덩을 문지르며 허허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냥… 반려동물이 떠나 버렸어요.”

“저런.”

나는 플렌드나 신전에 와 있었다. 사도님이 신년제를 돕고 있다는 증명서를 써주셨으니 가끔 이렇게 얼굴을 비추는 척이라도 하는 게 예의였다. 내가 사도님과 만나는 걸 좋아하기도 했고.

사도님과 함께 걷던 회랑이 끝나고 시야가 탁 트이며 중앙 정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짜잔! 올해도 아름답지 않니?”

사도님은 어린아이처럼 밝게 웃으며 신년제를 맞아 새로 장식한 정원을 자랑하셨다.

아름다움을 관장하는 신의 신전답게 이런 명절 때는 누구보다 치장에 진심이다. 그러다 보니 매해 다른 꾸밈을 하고는 했다.

올해는 플렌드나 신의 신상을 중심으로 역대 사도들의 조각상이 둘러서 있고, 그 사이사이를 겨울인데도 푸릇푸릇한 식물들과 금빛 장식이 가득 메웠다.

“말해 무엇할까요.”

잠시나마 걱정들을 잊고 감탄하던 나는 플렌드나 신상을 보고 문득 머리에 떠오른 것을 물었다.

“플렌드나 님의 크리스털 신상… 사도님 개인 소장품은 복구가 됐나요?”

뿌듯함과 기쁨으로 빛나던 사도님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아니……. 어떻게 수리를 해도 나중에 덧붙인 부분은 티가 난다지 뭐니.”

하하. 아무래도 말을 잘못 꺼낸 것 같다.

“왜 신성력으로 부서진 물건은 못 고치는 걸까? 신의 이름으로 철퇴는 내릴 수 있잖니! 그런데 어째서 반대는 안 되는 거냐고.”

언제나 슬픔은 분노로 흘러가기 쉽다. 그건 오랜 세월을 산 덕후… 아니 사도님도 다르지 않았다.

“하필이면 그곳을.”

잔뜩 흥분한 사도님은 그때 관절이 아니라 더 엄청난 것을 빼앗아야 했다고 뇌까렸다.

“그 불경한 놈들이! 감히 플렌드나 님의 소중한 그곳을 건드렸는데!”

아니, 습격한 놈들은 그렇다 치고 우리도 점점 불경죄에 다가가는 것 같은데요.

결국 내가 주머니를 털어 새 신상을 만들어드리겠다고 약속하고 나서야 사도님은 평소처럼 우아한 모습으로 돌아오셨다.

‘살짝 당한 느낌은 들지만.’

평소 감사한 일이 많았으니까 이 정도야 괜찮았다.

나는 조금 웃고는 불의 교단 이야기를 이어갔다.

“제가 전문가는 아니지만, 불의 교단에서 새로운 신을 만들려고 하는 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순수한 불은 신 따위가 아니다. 이 세상을 정화하기 위한 빛이며, 정화의 날이 올 때까지 우리 땅에 잠든 모래의 신을 부린다!’

내 입을 통해 광신도의 말을 들은 사도님이 혀를 찼다.

“다른 교단의 교리를 열심히도 끌어모았구나.”

정화의 빛, 정화의 날 등.

순수와 정결의 신, 심판과 정의의 신 등을 모시는 교단에서 많이 쓸 법한 말을 짜깁기한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사도님도 이리 말씀하시니 조금 놀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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