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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 영애 집착을 시작합니다 (90)화 (90/130)

90화

“그런데… 흠. 모래의 신이라.”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신이라고 들었어요.”

“지금은 그렇지. 옛날, 치트룸의 세가 강했을 때는 국교나 다름없었단다. 프레세리아야 국토에 사막 지역이 포함되지 않았고 어촌 사람들도 주로 바다의 신을 믿었지만.”

“그런데 왜 그 신이 불의 교단에서 나오는 걸까요?”

모래의 신. 겨울의 한가운데에서 대공령보다는 적더라도 쌓인 눈을 바라보며 언급하기에는 다소 어색한 신이었다.

이곳은 겨울이지만 사막에는 여전히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고 있겠지. 때로는 모래들이 스스로 흐름을 만들며 강물처럼 움직이기도 할 것이다.

‘어우, 더운 건 딱 질색인데.’

내가 다큐멘터리에서 봤던 사막의 모습을 상상하는 동안 뭔가 곰곰이 생각하던 사도님이 다시 입을 열었다.

“손을 잡은 것일 수도 있고, 혹은…….”

조금 꺼림칙한 것을 만지는 것처럼 사도님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쪽에 기생해서 약해진 신력을 보충하고, 더 나아가 신격 또한 예전처럼 높이려는 것일지도 모르지.”

“네? 기생이라니. 그런 것도 가능한가요?”

신앙의 세계란 알면 알수록 기기묘묘했다. 사도님은 깜짝 놀란 나를 이해한다는 듯 웃으셨다.

“미뉴엘, 사도란 모시는 신을 위해 뭐든 할 수 있는 사람들이란다. 아니, 애초에 신은 그런 사람을 택하는 것일지도 모르지.”

“그럼 저는 역시 사도가 될 만한 재목은 아니겠네요, 하하.”

그렇게 조금 무거워진 분위기를 농담으로 넘긴 나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쥬엘라 언니에게 부탁해 대형 보석을 조각해 본 적 있는 장인을 섭외했다.

그와 함께 거의 사람 크기만 한 원석을 플렌드나 신전에 보내고 얼마 후, 엄청나게 많은 수호부가 집으로 도착했다.

[만약을 대비하여.]

살짝 기운 각도의 아름다운 흘림체. 사도님의 글씨였다.

“아무리 보답이라고는 해도 이렇게 많이 보내주시다니.”

가만히 수호부의 개수를 헤아리니 얼추 우리가 준비한 기사들의 수와 비슷했다.

대체 이분은 어디까지 내다보고 계시는 걸까. 심상치 않은 예감을 억누르며 나는 수호부 하나를 꾹 움켜쥐었다.

* * *

‘에사디엔은 잘 지내고 있는 걸까.’

마법 학교에 방문하는 길, 내 맞은편에는 요즘 사이가 서먹해진 라망드가 아니라 호위 기사인 클리데인이 타고 있었다.

이제 기사들도 예정했던 수만큼 로콰이트에 들어왔으니 당장은 손이 비었다.

사교계며 황성의 상태를 파악하는 건 쥬엘라 언니의 일이라 한가해진 나는 불쑥불쑥 떠오르는 에사디엔 생각을 누르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처음 그와 파혼했을 때와는 달리 내가 생활하는 공간이 곧 엘이 있던 곳이다 보니 영 마음대로 되질 않았다. 더욱이 가까이 있는 호위 기사가 에사디엔을 닮은 사람이기까지 하니.

“아가씨, 도착했습니다.”

“아, 그래요.”

요즘 자주 그렇듯이 또 멍하니 쓸데없는 생각을 하던 내게 어느새 마차에서 내린 클리데인이 손을 내밀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클리데인이 내게 괜한 추파를 던지지 않고 충실하게 기사 역할만 수행한다는 점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속이 시끄러운데 그가 에사디엔과 비슷한 얼굴로 허튼짓을 했다면 쥬엘라 언니가 붙인 사람이고 뭐고 간에 나는 어마어마하게 폭발했을 것이었다.

“그런데 마법 학교에는 어쩐 일로 방문하신 겁니까?”

“네?”

또 멍하니 있다가 나도 모르게 반문한 것뿐인데 클리데인이 어색하게 웃으며 사과했다.

“아, 무례였다면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그저 올세 경이 내 일에 대해 질문하는 건 처음이라.”

하도 담백해서 말이지.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클리데인은 마치 기사 교본에 적힌 듯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했다.

“기사가 모시는 주인의 일에 괜히 참견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그렇군요. 혹시 올세 경은 예전에 꿈이 마법사였나요?”

그래서 마법 학교에 온 게 신기했나?

“아니요. 다만 마법사가 꿈이었던 사람을 알고 있어서요.”

대답하는 클리데인의 표정이 전에 없이 부드러워서 더 말하지 않았는데도 그 사람이 그에게 매우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동시에 마음 한쪽이 이상하게 울렁거렸다.

‘에사디엔도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다른 사람에게 나에 대해 말하며 저런 얼굴을 해본 적이 있을까.

그런 생각이 문득 들어서.

브라시다스의 연구실에 들어서자마자 호탕한 웃음과 함께 인사가 날아왔다.

“오랜만이군, 제자님!”

그 말에 클리데인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다래졌다.

“장난치시는 거예요. 난 마력이 없거든요.”

급하게 해명한 후 브라시다스에게 사과를 건넸다.

“지난번에 사칭했던 건 죄송했습니다. 마법사들을 내보내느라 너무 급해서 그만…….”

“로콰이트 마법사의 절반이 내 제자가 자네라고 알게 된 마당에? 이렇게 된 김에 그냥 제자 하지 그러나.”

“마력도 없는데 무슨 말씀이세요.”

“그러니 명예 제자지.”

명예 교수는 들어봤어도 명예 제자는 또 처음 들어본다. 한숨을 쉬려던 나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미심쩍은 표정으로 브라시다스를 올려다보았다.

“그… 실험하려고 그러시는 건 아니겠죠, 설마?”

클리데인이 있어 정령이라는 말은 안 꺼냈지만 브라시다스는 찰떡같이 알아듣고 말을 돌렸다.

“실험은 무슨. 그런데 이 훤칠한 젊은이는 누군고?”

맞네, 맞아. 실험하고 싶었네.

나는 속으로 혀를 차며 둘을 서로에게 소개했다.

“브라시다스 님, 이쪽은 제 호위 기사 올세 경이에요. 경, 이쪽은 대마법사님.”

무려 대마법사라는 말에 클리데인의 눈이 아까보다 더 커졌지만 브라시다스는 동네 아저씨처럼 털털하게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대마법사는 부담스럽고, 그냥 노인네라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나는 감격스러워 보이는 클리데인에게 이야기가 길어질 듯하니 그동안 학교 내부를 둘러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했다.

조금 전 그가 말했던 사람에게 브라시다스를 만난 것에 더해 학교 이야기까지 해줄 수 있다면 좋겠지, 싶어서였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역시 제안을 듣자마자 그의 연두색 눈이 햇빛을 받은 새싹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확실히 에사디엔보다 표정이 다양한 사람이다.

나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브라시다스 님을 만나는 게 목적이니 나는 괜찮아요.”

“아, 혹시 모르니 이걸 들고 다니게.”

브라시다스도 좋은 생각이라며 클리데인에게 커다란 펜던트가 달린 사슬을 건네주었다.

“이걸 보이면 어지간한 곳은 자유롭게 둘러볼 수 있을 게야.”

여러 차례의 감사 인사와 함께 신난 클리데인이 나가고 난 뒤, 내가 물었다.

“저게 뭔가요?”

“내 교수 신분을 증명하는 목걸이일세.”

그걸 외부인한테 넘기면 어떻게 해요!

내가 놀라서 벌떡 일어났지만 브라시다스는 덤덤하기만 했다.

“오늘은 강의가 없는 날이니 필요하지 않아. 그보다 말일세.”

책상 앞으로 돌아가 앉은 그가 깍지 낀 양손으로 턱을 받쳤다. 조금 전 목걸이 이야기를 할 때와는 딴판으로 날카로워진 눈빛이 번뜩였다.

“이전에 봤을 때보다 훨씬 생생하게 살아난 것 같군그래.”

‘하하하… 무서워라.’

결국 개비가 봉인되었던 동굴에 갔던 일부터 오스틴 때문에 모든 힘을 터뜨렸던 것까지 낱낱이 말하고 나서야 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그 뒤로 개비와의 연결이 단단해졌죠. 뭐랄까 제 안에 있는, 불의 힘을 담은 그릇이 커진 것 같기도 하고.”

“그랬군.”

후아. 나는 지쳐서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이렇게 한 번에 많은 말을 해본 적은 처음이었다. 대체 선생님들은 어떻게 한 시간 내내 쉬지 않고 수업하시나 몰라.

물 한 컵을 다 마실 때까지 기다리던 브라시다스는 내가 잔을 내려놓자마자 기대에 찬 눈으로 물었다.

“내가 정령을 볼 수 있겠나?”

“네? 으음.”

평소였다면 바로 개비의 의향을 물어봤겠지만 요즘은 라망드 못지않게 개비와도 서먹했다. 왜 엘의 정체를 말해 주지 않았냐고 화내는 내게 녀석이 심드렁하게 대답했기 때문이다.

- 그러게 그 짐승한테 직접 물어보라고 하지 않았냐.

‘그 말, 어이없는 거 너도 알지? 사람이 어떻게 짐승하고 대화해!’

- 그거야 네 능력 부족이지. 사제는 잘만 하던데.

안 그래도 다퉜던 라망드와 비교하기까지.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화산에서 마그마가 분출하듯이 폭발해 버렸고 그 후로는 개비도 삐졌는지 내게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도 들은 척은커녕 코빼기도 비추지 않을 줄 알았건만.

- 고목 같은 인간이로구나.

특유의 뻐기는 듯한 말투와 함께 벽난로 안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게 아닌가.

“개비?”

화난 거 아니었어?

- 화는 네가 냈으면서 무슨 소리냐. 난 묻는 말에 대답만 했는데.

“아니, 하지만…….”

- 사납기는 그 짐승보다 네가 더 했다.

“야!”

나는 브라시다스의 눈치를 보며 짧게 윽박질렀지만 개비는 내가 왜 그러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으으. 녀석은 부끄러워진 내가 잠시 얼굴을 가리는 동안에도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브라시다스와 대화했다.

- 고목은 어떤 변화에도 담담하거늘.

“하하.”

- 너는 다르구나.

“어떻게 다르오?”

- 지금도 나를 뼛속까지 들여다보고 싶어서 환장한 눈이군.

신기하게도 저런 말을 하면서도 개비는 전혀 기분 나쁜 상태가 아니었다.

더 신기한 건, 지금 무심한 표정을 짓는 그의 낯에서 처음 만났을 때의 생떼 부리는 어린애 같은 분위기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었다.

브라시다스는 어깨를 들썩였다.

“정령께서도 미뉴엘 양만큼이나 과격합니다그려. 나는 단지 궁금하고 궁금해서 견딜 수 없을 뿐이오.”

- 궁금하다?

“이 세계를 이루는 핵심 원소가.”

- 흐음.

긴 숨소리만큼이나 개비의 코에서 연기가 길게 흘러나왔다. 그들은 아무런 말도 없이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러기를 잠시, 웃음기 없던 얼굴들에 산불처럼 웃음이 일었다.

- 정 나를 알아보고 싶다면 기회를 주지.

“어떤 기회인지?”

- 정령력을 보충하러 다녀와야겠다. 따라와서 관찰하도록.

“호오.”

브라시다스는 제법 솔깃한 표정을 지었다. 위쪽으로 눈을 굴리며 턱을 쓰다듬는 것이 수업 스케줄을 어떻게 조절할지 고민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방학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생각은 아예 없는 것으로 보였다.

‘교장이 보면 슬퍼하겠어…….’

속으로 혀를 찬 나는 개비에게 물었다.

“갑자기 어디를 가겠다는 거야? 그동안 그런 말은 없었잖아.”

- 저 인간을 보니 갑자기 떠올랐다.

“게다가 정령력 보충이라니? 지금도 요시초를 어마어마하게 투입해 주고 있는데.”

- 요시초 좋지. 하지만 그거로는 한계가 확실해. 당장 지금도 처음보다 회복 속도가 줄어들지 않았느냐.

“그렇기는 하지만…….”

개비 말대로 전에는 돌아서면 상태가 다를 정도로 불의 힘이 차오르는 속도가 빨랐다. 그러나 지금은 수도꼭지를 아주 조금만 틀어놓은 듯한 속도로 바뀌었다.

게임 경험치도 레벨이 올라가면 더 많이 필요한 것과 비슷한 이치로 받아들이고 있었건만.

“지금 당장은 좀 그래.”

물론 브라시다스가 함께 간다면야 화산이든 갱도 안이든 바닷속이든 살아서 돌아오기는 하겠다만 오스틴이 황성에서 엉덩이를 들썩거리고 있는데 쉽게 자리를 비울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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